MAKE UP -1- 내 이름은 윤 현, 뼈대깊은 상업 가문인 윤씨 집안의 늦동이 막내로 태어났다. 나는 셋째인 형과는 무려 8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는데,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 집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다. 그렇게 소중한 막내라면 왜 이렇게 구박을 하겠는가. 뭐, 내가 5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소중한 막내 아들 취급을 받았던 것 같긴 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 5살 생일 때였다. 마침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고 오셨던 아버지의 친우 중 한 분이셨던 박 의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의원님이 나가셨을 때 아버지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후에 나는 그 때 알아서 분위기 파악을 하고 숨어 있을 걸, 하고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불행히도 나는 어렸었다. 게다가 그 날은 무려 내 생일날이 아니었던가. 바로 내가 주인공인 날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면서 다가가 아버지 무릎에 기어 올라갔다. 평소처럼 아버지가 “에구,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예쁘지?” 라는 식의 말씀을 하실 줄로 알고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무릎에 앉아서 쭉 손을 내밀고 있는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셨을 때에는 나름대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 아빠, 나빠.” 어린아이의 문장실력을 최대한 이용해 내가 삐쳤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도도도 뛰어가려는데 아버지가 나를 턱하고 붙잡았다. 그대로 몸을 끌어안는 아버지를 향해 숨이 막힌다고 칭얼대며 바둥대는 나에게 아버지는 짤막한 한숨을 쉬면서 나직히 말씀하셨다. “ 아무래도 안되겠어...” 나는 나중에 그 때 그 말을 두고두고 회상하면서 역시 뭔가가 있는게야, 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단순히 아버지가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볼을 부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다음날 바로 드러났다. 아버지가 나에게 가정 교사를 붙여주셨던 것이다. 아아, 내 나이 5살 밖에 되지 않았건만 이게 웬 말이란 말인가. 내 인생 최초로 맞는 고난이었다. 되지도 않는 말을 씨부렁거리길 잘 하던 가정교사는 나의 빈약한 어휘력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어휘력 확장을 목적으로 웅변을 가르쳤다. 아무 힘없는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시키면 하는 수밖에. 가정 교사는 하루에도 엄청난 분량의 과제를 내 주며 외우라고 시켰으며 다음 날 곧바로 테스트를 해 결과를 확인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5살 꼬마에게 그것은 끔찍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에야 가정 교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얄팍한 심정으로 과제를 외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가정 교사가 얼굴을 늘상 찡그린 채로 다니면서 빽빽거리는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40대 중반 아저씨라면야 말 다한 것이다. 곧 애초의 생각은 변질 된 채 나는 누가 이기나 보자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가정교사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단순히 누가 먼저 지칠까 하는 생각으로 한 웅변을 가장한 책 외우기는 나에게 엄청난 어휘력과 피곤함을 안겨 주었다. 가정교사가 온지 반 년이 얼추 되던 때였다. 어느 날 밤 나는 평소처럼 밤 11시에도 과제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 꾸벅꾸벅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창문을 살짝 열었는데... 그런데 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신호탄이 된 것마냥 갑자기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서러움이 밀려왔다. 서러움의 주체는 참 애매모호했다. 우선 이 시간이 되도록 과제를 끝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 나와 잘 놀아 주지도 않고 이런 공부를 시키면서 힘들다는 말에도 외면하시는 아버지, 외국에 나가서 돌아오시지 않는 어머니, 나를 놀리기만 하는 셋째 형, 내 어려움을 모른 척하는 형과 누나, 무엇보다 그 재수없는 가정교사... 생각하다 보니 왠지 더 서러워져서 어느새 나는 훌쩍거리면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우는 와중에도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슬퍼져서 울음은 더 커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손을 꽉 쥐면서 결심한 것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내 멋대로 할 거야. 나는 그렇게 결심하면서 과제를 내팽개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가정교사가 나를 찾아와 어제 내준 과제를 외워보라고 했을 때 나는 떨리는 속을 부여잡고 당당해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안 했습니다.” 가정교사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이 말투 하나에서도 알 수가 있다. 젠장. 가정교사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 혹시 어제 과제를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기서 어제의 결심과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야 없지 않은가. “ 없습니다.” 가정교사는 턱을 한 번 쓸어보더니 예의 빽빽거리는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 몸이 안 좋으셨나 보군요. 오늘은 이대로 쉬십시오. 대신 내일 어제의 과제를 안 해 놓으신다면 그 때는 충분한 벌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고집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다음날도 과제를 해오지 않은 나에게 가정교사는 바지를 걷어올리라고 말을 하곤 회초리를 가져왔다. 가느다란 막대기의 위력을 셋쨰 형이 맞는 모습을 보면서 충분히 알고 있었던 나에게, 그것은 고집의 심각한 감소를 가져왔다. 이대로 용서해달라고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빌어볼까 했던 마음은 가정교사가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하면서 깨끗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벌은 무척이나 아팠고, 또 서러웠다. 나에게 정확히 5대를 때린 후 가정교사는 회초리를 치우고 “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내일도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아버님에게 말씀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식의 말을 지껄이고는 나가 버렸다. 나는 공부방을 그대로 뛰쳐나와 서재로 가서 구석에 앉아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가정교사가 나가면서 한 말이 가슴에 걸리는게... 이대로 아버지에게 이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에게 관대하고 다정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태도가 요즘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작은 형을 때리는 것처럼 날 때린다면... 급기야 울음은 더욱 커져갔고, 나는 꺽꺽대며 곧바로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때 그런 내 몸을 누군가가 꼭 껴안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못난이, 왜 이래? 누가 뭐라 그래?” 언제나 나를 못난이, 돼지라고 부르면서 놀리고 괴롭히는 작은 형이었다. 서재는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터라 일부러 이리로 들어왔는데 작은 형이 그 날 따라 왜 그 곳에 왔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 허엉, 저리로 가.” 나를 꼭 껴안고 있는 형을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5살 꼬마의 손이 8살이나 많은 초등학생의 힘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 왜, 말해 봐. 형이 다 해결해 줄게. 응?” 그 날 따라 다정한 형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울먹이면서 그 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흐윽, 그래서 아빠한테 이르면 어떡해, 응?” 말하고는 다시 서러워져서 선우 형을 올려다보는데... 순간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형의 눈이 이상하게 광채가 나는 것이 왠지 무서웠다. “그래, 그 놈이 널 때렸다고?” 혀엉, 웃으면서 말하지 마... 왠지 형의 저 모습을 보니 미연 누나가 선우 형이랑 놀지 말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 “으응, 여기... 아파.” 내 머리가 조금만 더 굵었었다면, 그 때 알아서 선우 형을 피했을 텐데. 누누이 말하지만 역시 내 나이가 어린 것이 한이었다. 바보 같은 나는 형의 눈빛 같은 것은 금방 잊어버리고, 그저 형이 내 편을 들어주는 듯한 것에 안심하고는 어리광을 부렸다. “괜찮아. 우리 현이 혼나지 않게 형이 잘 말해 줄게. 자, 가서 약 바르고 누워 있어야지?” 형이 내 몸을 번쩍 안아들고 나갈 때에도 나는 그저 안심한 김에 “울었더니 졸려...” 같은 소리나 지껄이면서 태연히 잠에 들었을 뿐이다. 잠에서 깨어나보니 미연 누나가 내 옆에 앉아서 나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에게는 3명의 형제가 있었다. 제일 큰 형인 선재 형은 나와 나이 차이가 14살이나 났다. 선재 형은 무척이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같이 있으면 심심하다. 게다가 선재 형은 아버지의 사업을 돕느라 바빠서 나와 같이 있는 시간도 극히 적었다. 셋째인 선우 형은 그나마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많았지만 나를 만나면 놀리고 괴롭히기에 바빴다. 언제나 선우 형의 짓궂은 장난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했던 내 입장에서 선우 형은 나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미연 누나였다. 나보다 10살이 많은 미연 누나는 다정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나에겐 어머니 대신이었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제일 익숙한 사람이랄까. 미연 누나에게는 언제나 좋은 향기와 따뜻한 공기가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 지금의 미연 누나의 걱정스런 눈빛은 무척이나 미안한 것이었다. “ 현이 깼니?” 미연 누나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나는 살풋 고개를 끄덕였다. “ 현이 공부하기가 힘들었니?” 나는 이 말에는 조금 망설였다. 솔직히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왠지 미연 누나가 실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부를 못하고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괜찮지만, 미연 누나가 실망하는 것만은 싫다. 그런 내 맘을 안 것처럼 미연 누나는 조용조용히 말을 이었다. “ 지금 아버지가 현이를 공부 시키려고 하는 것은 현이를 너무 좋아해서야.” 날 좋아해?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날 미워하는 것 같은 걸. 아버지는 선우 형이랑 똑같다. 볼을 부풀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게 미연 누나는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 지금은 힘들지만 현이가 이렇게 공부를 해 두면 나중에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도움이 되는 거야.” 어휘력이 늘어난 나에게도 미연 누나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무엇보다 나도, 선우도, 선재 오빠도 모두 이렇게 공부를 했는걸.” 이 말은 알아들었다. 정말? 모두 공부를 했었어? 형들도, 누나도 나와 같이 어렸던 때가 있고, 나와 같은 시기를 가졌었다니 왠지 신기했다. 눈을 빛내며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가 쿡하고 웃었다. “ 정말이야. 우리 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선재 오빠처럼 될 수 있는데.” “누나처럼도?” 예쁘고 똑똑한 누나는 나의 우상이었다. “ 응, 나처럼. 그리고 나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가 좋아.“ 이 말이 결정타였다. 다음날 가정교사는 왜인지 해고를 당해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도 새로운 각양각색의 가정교사는 연이어 들어오곤 했다. 그렇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세뇌에 약한 타입이었고, 특히 신뢰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약했던 것이다. -내 나이 다섯 살, 공부에 입문하다.- -2- 8살이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가 보았다. 그 전에도 가끔씩 집 밖으로 나가긴 했지만 언제나 차에 타거나 누군가에게 안겨서 잠깐씩 나갔다가 들어왔기 때문에 장시간의 외출에 나는 흥분해 있었다. 학교는 엄청난 곳이었다. 그 곳에는 나와 같은 어린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 곳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아는 것과 보는 것은 역시 틀린 것이다. 명성 초등학교 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곳은 부잣집 자제들만 입학하는 명문이라고 설명하는 선우 형의 말과 같이 아이들은 모두 곱고 예뻤다. 아이들과, 아이들을 따라온 듯한 수많은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그저 입을 벌리고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같이 따라온 선우 형은 바보 멍청이 하면서 머리를 마구 흐트려뜨렸다. 선우 형은 정말 싫어 ! 라고 말했다가 오히려 양 볼을 늘이는 형벌을 받은 나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잔뜩 부어서 서 있었다. 학교에 오기 전에 선우 형은 ‘밖에 나가서 울면 다신 집에서 못 나가게 할 거다.’ 라는 극악한 협박을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선우 형은 언제나 진심이며, 자신의 말은 꼭 책임질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 이리로 오세요.“ 라고 소리치시는 예쁜 여선생님의 모습에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헤벌레 웃자 내 보호자로 따라온 선우 형은 또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내 볼을 잡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학교는 생각했던 것처럼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곳이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즐거웠던 1학년 때와는 달리 이상하고 불편한 점은 2학년이 되면서 눈에 띄게 나타났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는 서로의 친구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친.구. F.R.I.E.N.D.(나는 그 즈음 영어도 배우고 있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서로 즐겁게 놀면서 만드는 관계, 이른바 우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친구라는 것이 없었다. 같이 놀기는커녕 아이들은 나에게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네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서 말을 걸곤 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거나, 대답을 한 후 도망가 버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겠는가. 처음에는 단순히 이상하게 생각했었지만, 곧 그것은 의문으로 바뀌었고, 다시 고민이라는 것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런데 같은 반인 2학년 녀석 중에 한 명이 내 눈에 포착이 되었다. 김민현이란 이름을 가진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 녀석은 왜인지 인기가 많았고 언제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녀석이 부러워진 나는 시간이 날 때면 멍하니 녀석을 보며 어떻게 하면 녀석처럼 친구가 생길까만 생각했다. 그런 나를 알아챈 것인지 어느 날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서 어색한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 내가 너 옆에 앉아도 돼?” 민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내 옆의 짝꿍을 쫓아내고 냉큼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때만 해도 나는 별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요즘에 받은 교육의 성과대로, 녀석의 옆에서 행동을 분석해 봐야지, 하는 식의 흉계를 꾸미고 있었을 뿐이다. 아아, 그런데 맙소사. 녀석은, 김민현은 시원스럽게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사악하고, 무서운 놈이었다. 인기 있는 녀석의 주위에는 곧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아이들은 녀석과 함께 재잘거리며 놀곤했다. 여전히 나. 만. 빼놓고. 간간히 김민현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힐끔거리며 보곤 했었는데, 나는 그런 녀석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나쁜 자식, 자기가 친구가 많다고 나에게 뻐기려는 거다. 정말 치사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녀석의 주위에 몰려든 아이들 역시 나를 힐끔거리며 보면서 수근대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띄곤 했다. 여기서 나는 확신했다. 저 아이들은 분명 나를 비웃으면서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내 짝꿍이 된 녀석은 나를 같잖게 불쌍히 여기기라도 한 거겠지. 김민현은 그 후로도 왠지 나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하곤 했지만 나는 그런 녀석을 철저히 무시해 주곤 했다. -내 나이 9살, 나보다 잘난 다른 이에 대한 질투를 깨닫다.- -3- 4학년에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내 삶에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나에게 친구는 없었고, 나는 수업이 끝나면 차에 태워져서 집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간간히 김민현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 주위에서 얼쩡거리곤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그런 내 모습에 이상하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아직도 자신이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녀석은 분명히 잘난척 하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 이라고 간단히 결론 짓고 나는 김민현이라는 이상한 생물체에 대해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런데 4학년이 되어 새로운 반으로 들어간 나에게는 엄청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마녀 이슬비의 출현이었다. 처음에 새로운 교실이라서 좋군 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며 앉아있던 내 옆자리에 구불거리는 파마머리를 리본으로 묶은 이슬비가 턱하니 와서 앉을 때 이미 나는 예감을 했어야 했다. 이것이 내 재난의 시작임을. 이슬비는 나보다 몸집도 컸고 힘도 셌다. 그런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어른들 앞에서는 새초롬히 앉아 있곤 했다. 물론 그렇게 앉아 있을 때에는 나름대로 예쁘게 보이긴 했다. 무엇보다 이슬비의 인형처럼 하얀 얼굴과 어린 아이 특유의 빨갛고 앙증맞은 입술, 갈색으로 예쁘게 컬해진 머리카락은 남자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슬비는 그 뿐만 아니라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라고 한다. 나는 믿을 수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이슬비를 싫어하고 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슬비는 내 옆에 앉자마자 내 손을 꽉 붙잡더니 말했다. “ 이제부터 넌 나랑만 같이 다녀야돼.” 아아, 지금 하필이면 그 생각이 날 건 또 뭐람. 나를 학교로 보내면서 내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하던 선우 형의 말이 뭉실뭉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 [현이 너 학교에 가서 누가 자기랑만 같이 다니자고 하면 절대 그러면 안 돼. 왜냐하면 그것은...] “뭐야, 너 어디서 밥 먹으려고. 이리와, 나랑 같이 먹어.“ 이슬비는 점심시간이 되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손을 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이럴수가. 나는 여자아이가 남자보다 힘이 약하고, 지켜줘야만 되는 존재라는 미연 누나의 말에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서 이슬비는 나를 턱하니 옆에 앉혔다.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려는 나를 억누르고 이슬비는 주위의 아이들에게 “ 어서 음식 가져와.” 라고 명령했다. 그런 이슬비의 말에 아무런 의문도 없는 듯이 아이들은 다다다 뛰어나가서 내 식판과 이슬비의 식판에 음식을 가득 담아서 대령해 바쳤다. 그래, 말 그대로 바. 쳤. 다. 흑, 역시 그런 거지? 선우형... [그것은 그 녀석이 너를 부려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이를테면 하인처럼 말이야. 처음에 잘해주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닌 것처럼 해도 속으면 안돼. 그런 녀석이 사실은 더 나쁜 녀석이거든.] 형, 어떡해? 나 찍힌 거야? 날 부하로 부려먹으려고 이슬비가 지금 이러는 거지?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어서 음식을 먹고 식당을 빠져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이슬비가 자기 식판에 있는 반찬을 태연스레 내 숟가락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많이 먹어. 너 이렇게 말라서 뭐에 쓰냐?”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말이다. 대체 왜? 게다가 나는 오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슬비는 극악스럽게 오이 초무침을 한 가득 올려놓아주면서 싱긋 웃는 것이다. ...앞날이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체할 것 같은 점심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이슬비를 피해 달아나려고 무지 애를 써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이슬비는 그런 내 손을 꼭 붙잡고 어디를 가든지 꼭 같이 데려가곤 했다. 그래, 솔직히 말해 그리 싫진 않았었다. 무엇보다 이슬비는 무척 예쁜 여자 아이였고 혼자였던 나에게 그런 관심은 외면하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이슬비는 딱히 나에게 무엇을 시키거나 하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무언가를 안겨주는 쪽에 가까웠다. 내가 너무 말라서, 내 학용품이 부실해 보여서, 그냥 날이 좋아서 라는 등의 갖가지 이유로 이슬비는 언제나 나에게 무언가를 가져다 주곤 했다. 비록 받을 때에는 이슬비 특유의 강압적인 분위기로 인해 선물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곤 했지만 말이다. 어느새 나는 이슬비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단, 한 달이 지나기 전까지만 말이다. 세상에, 나를 끌고 다니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소개조차 시켜주지 않는 이유가 뭔데? 게다가 이슬비는 내가 다른 아이와 인사말 한 번 나누는 것도, 다른 아이가 내 옆에 있는 것도 무척 싫어해서 그런 일이 생기면 모지락스럽게 내 옆구리를 꼬집곤 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슬비는 힘이 셌고, 따라서 그 여자아이 특유의 꼬집기라는 기술은 엄청나게 무서운 것이었다. 뭐, 그래도 이런 것 뿐이라면 나도 말을 안 한다. 자기는 친구도 많으면서, 나에게만 쩨쩨하게 구는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다. 다시금 내 마음속에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으니... 내가 이슬비와 같이 다니면서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횟수가 늘어난 김민현의 모습은 그런 내 마음에 확신을 더해줬다. 역시, 날 불쌍하게 여긴 거였나. 이슬비는 반장이기도 했으니, 선생님에게 부탁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단순한 우월감으로 아무 생각없이 생색 내기 위해서 한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짜증나고 싫은 그런 상태일지도. ...말해두지만 나는 자학이 취미인 사람이었다. 미연 누나는 안 좋은 버릇이라며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뭐, 어떤가. 최악의 상황을 예상해 두고 있으면 나중에 충격도 덜 받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물론 자학하는 사이 내가 혼자서 생각하던 것들이 진짜처럼 여겨지곤 하는 일도 종종 있곤 하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세뇌가 잘 먹히는 타입이었다. -4- 어쨌든 이슬비와 같이 있는 것이 껄끄러워진 나는 그 날부터 이슬비를 피해 교내 일주를 시작했다. 처음 2,3일간은 그런데로 따돌렸다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지 곧 이슬비에게 붙잡힌 나는 방과후에 그대로 이슬비에게 끌려갔다. “ 너 요즘 왜 이러는 거야!” 학교안에 운치 좋게 꾸며진 장미 정원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간 이슬비가 울 듯한 얼굴로 그렇게 외치자 내 마음속에 뭔가 파문이 일어났다.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 어쩌면 모두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는 이슬비에게 사과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언제나 아마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 같다. 그 때 누군가가 빈정대는 말투로 끼어든 것이다. “뭐야, 너 여기서 뭐 하냐?” 시선을 들어 바라본 곳에 보이는 것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커다란 몸집의 남자아이였다. “ 꺼져, 이승호.” 이슬비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는데도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이제까지 다른 아이들은 이슬비가 무슨 말을 하면 온 몸을 바쳐 그 말을 이뤄주곤 했는데, 이 녀석은 뭔가 다르다. “ 흐응, 이게 네가 요즘에 돌본다는 그 녀석?” 녀석은 눈을 가늘게 휘면서 웃었다. 하얀 피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잘 생긴 사내아이가 웃는 모습이 그렇게 재수 없어보인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 말투는 뭐란 말인가. 돌봐? 누가 누굴? 기분이 팍 상해 버린 내가 그대로 몸을 돌려 그 곳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이슬비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 “ 윤 현, 너 내 말에 대답은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뭐 잘못했어? 만약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게, 응?” 처음 들어 보는 이슬비의 다급한, 울음 섞인 말에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내 앞에서 가늘게 눈 웃음을 짓고 있는 이승호라는 녀석 때문이었다. “ 헤에, 뭐야, 너? 진짜 비리비리하게 생겼구나?” 신기한 듯 이승호는 나를 바라보며 턱하고 말을 던졌다. 저게~! 슬비의 팔을 뿌리치고는 나는 그대로 그 곳을 빠져 나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몸을 실으면서 내가 한 생각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싸가지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그 날 이후로 이슬비는 왠지 모르게 내 옆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애써 힘겹게 웃어 보이곤 하는 것이다. 그런 이슬비 대신 나에게 다가온 것은 이승호란 녀석이었다. “무슨 생각하면서 걷길래 앞도 제대로 못 보냐?” 씨발아, 네가 다리를 걸었잖아~! 나는 선우 형에게 배운 온갖 욕들을 속으로 퍼부으면서 이승호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이슬비의 사촌이라고 하는데 나와는 반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심심하면 나에게 와서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 괴롭힘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다양해서-. 어떨때는 이렇게 다리를 거는 것 정도에서 끝나기도 하고, 이상한 곳에 끌고 가서 나를 버려두고 온 적도 있었다. 전에는 빈 교실에 나를 가둬두고 간 적이 있다. 그 때는 얼마나 암담하던지. 선우 형의 협박이 아직도 생생해서 차마 울지도 못하고 빈 교실에 앉아 있다가 수위 아저씨의 도움으로 창문을 열고 겨우 탈출한 것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시비를 걸까, 하는 생각에 어서 녀석을 피하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내 앞을 녀석이 가로 막았다. “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능글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짜증이 났다. 아무리 내가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생각하고, 혼자 있는 걸 외로워 한다지만 이건 아니다. “비켜.” 툭하니 내뱉는 내 말에도 이승호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 이승호, 너 이리 와봐.”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역시...슬비였다. 슬비는 요즘 들어서 왠지 더욱 갸름해진 얼굴을 도도히 치켜들고 서 있었다. “ 싫은데. 난 지금 바빠서.”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안 바빠 보이는데? 너 지금도 할 일이 없어서 나한테 시비나 걸고 있었잖아. “ 잠깐이면 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만약 오지 않으면...” 슬비는 말을 끊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왠지 불편해진 공기에 인상을 찌푸리자 이승호는 머뭇거리면서도 슬비에게 다가갔다. “조용한 곳에서 애기하자.” 슬비는 승호의 팔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나는 왜인지 점점 더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 형, 형은 친구를 어떻게 사겼어?” 집에 돌아온 나를 반겨 주는 것은 역시나 선우 형이었다. 선우 형은 분명히 고 3인 걸로 아는데 어떨 때는 나보다도 더 일찍 집에 와 있곤 했다. 고등학생들은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들었는데 선우 형을 보면 그 말이 의심스러워지곤 한다. 대체 고 3이 왜 힘들다고 하는 거지? 선우 형을 보면 나보다 더 놀기만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형이 집에 있어서 좋긴 했다. 비록 나를 놀리는 것밖에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선우 형에게 요즘 내 최대의 관심사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선우 형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식 웃었다. “왜, 누가 너랑 친구하재?” “아니.” 슬비가 이상하게 행동하긴 하지만 분명 친구하자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 그럼 ...혹시 네가 친구하고 싶은 놈이 있는 거야?” 형? 왠지 말투가 이상하다? 게다가 갑자기 높아진 형의 목소리는 무척 귀에 거슬렸다. 인상을 찌푸리는 나에게 형은 씩 하고 웃었다. “ 그래, 말해봐. 누군데?” ...있어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 없어. 그냥 형은 어땠는지 궁금해서.” 내 말에 형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눈을 빛냈다. “ 오, 이 형의 일이 궁금해진거냐? 현아?” 인간이 왜 저럴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분위기 있는 척, 똑똑한 척 잘도 꾸며대던 형이 사실은 이렇게 주책스러운 인간이라는 것은 절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솔직히 형이 목소리를 내려 깔고 눈을 부릅뜨면 나름대로 거칠은 분위기가 잘 형성이 되는데... “형, 내 앞에서도 제발 다른 사람들 한테처럼 대하면 안돼?” 간절한 내 음성에도 형은 굴하지 않고 뭐가 좋은지 그저 히죽거리며 웃어대기만 했다. “ 어허, 그럴 수야 없지. 사랑하는 동생 앞에서 내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게 형의 마음이거든.” “ ...난 인간이 아니냐? 나도 감정이라는 게 있어.” “그래서 감동 받았다는 말이야?” “ ...나도 인간 취급 좀 해달라는 말이다, 이 꼴통아!” 형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그만 속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아아, 이 화상을 어쩌면 좋을까. 형은 그런 내 말에도 아랑 곳 없이 느닷 없이 사색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어허, 글쎄. 내 주변에는 워낙 나의 추종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솔직히 이 형은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거기다 배경도 받쳐주지 않냐. 그래서... 야, 어디가? 현아?“ ...물은 내가 잘못이었다. 역시 미연 누나 말대로 형은 피해야 할 구덩이였다. 이승호는 그 뒤로도 변함없이 나를 괴롭히곤 했다. 나쁜 놈. 슬비는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말없이 바라보곤 하면서도 끈질기게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내 4학년 시절은 끝났다. -내 나이 11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왠지 모를 감정에 대해서 알다.- -5- 5학년 때였다. 다행히 나는 슬비와도, 성호와도, 김민현과도 모두 다른 반이었다. 선우 형의 말에 따르면 내 또래의 사촌이 명성 초등학교에 전학을 온다는 것이다. 그 사촌은 미국에서 수의사로 일하시는 둘째 이모의 아들로 이번에 이모부의 전근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모부는 유명 신문사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고 계셨다. “정말, 정말?” 연신 되물으며 좋아하는 나에게 선우 형은 왠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 이틀 정도 이 곳에서 묵고 곧 집 구해서 나간다니까 함부로 정 줄 생각은 하지마.” 라는 식의 싸가지 없는 말을 해댔다. 사촌이 오기 전날 밤, 설레임으로 한 숨도 못 잔 나는 정작 사촌이 오는 날, 현관문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에 고용인인 해원 아저씨나 일하는 누나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 이 상태가 좋았다. 현관문 앞에 앉아 있어야지, 사촌이 왔을 때 제일 먼저 맞아 줄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사촌이 오면 지금까지처럼 친구가 없는 내 모습도 끝이 나는 것이다. 나도 이슬비나 이승호처럼 돈독한 관계를 자랑할 수 있는 누군가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 이승호. 이승호를 생각하자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니까 얼마 전의 일이다. 5학년이 됐는데도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고 있는 녀석에게 질린 나는 틈을 노려 녀석을 잡고 조용히 물어보았다. “ 대체 이렇게 날 괴롭히는 이유가 뭐야?” 아무도 없는 방과 후 화장실에 녀석을 데리고 가 묻자 녀석의 얼굴이 조금 이상해졌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녀석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조금 이해는 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게 조용히 말을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녀석과 나는 화장실 변기 한 칸에 같이 들어가 있었다. 녀석을 계속해서 바라보자 매일 능글거리던 이승호도 나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 그건 , 네가...” 이상하다? 녀석은 당당하고 비꼬기 잘하는 밉살맞은 녀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내 눈앞의 이승호는 사람이 바뀐 듯 갑자기 내 눈을 피해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녀석이 고개를 팍 들었다. “하지만 너 슬비에게는 안 그렇잖아.” 뭐가? 뭐가 안 그런데? 말을 계속 해 보시지. 하지만 승호는 갑자기 뭔가 엄청나게 억울한 듯한 눈을 하면서 이상한 말들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녀석의 혼잣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승호는 갑자기 획 밀치더니 문을 열고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 윤현, 너 두고 봐.” 나가기 전에 나를 살벌하게 바라보면서 요따위 말이나 남기고 뛰쳐가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무척이나 허탈해졌다. 뭐야, 저 녀석? 녀석의 말을 나름대로 종합해본 결과 나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승호는 내가 슬비에게 쌀쌀맞게 대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화가 난 거다. 녀석, 보기와는 다르게 사촌간의 정이 돈독한가 보다. 사촌 없는 사람 서러워서 어디 살겠나. 나도 형제는 있단 말야. 하지만 이제 승호와 슬비의 관계가 조금 부러웠던 암울한 시절도 끝이다. 음하핫, 이승호 . 너야말로 두고 보라고. 이제 나에게도 사촌이 온단 말이다~! 처음 만난 사촌은 갈색 빛이 약간 묻어나는 검은 머리에 눈에는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왠지, 그림에서 본 학자의 모습이 떠올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촌의 이름은 안재범이었다. 그런 재범이의 모습이 낯설었던 나는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처음의 결심이 무색하게 선우 형의 뒤에 숨어서 재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선우 군, 많이 컸군. ” “ 이모부,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시죠? 재범이와 같이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 선우 형은 웬 일로 내가 형 뒤에 숨어 있는 데도 혼내지 않고 이모부에게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중인격자, 이모부 오기 전에는 실컷 험담했었던 주제에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산뜻한 얼굴이다. “하하,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아. 그 뒤에 있는 것이 현인가? 현아, 이모부란다. 이리 와보렴.” 나를 보면서 생긋 웃는 그 모습에 맘이 혹해진 나는 조심스레 선우 형 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이모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모부.” “현이는 여전히 귀엽구나. 재범이란다. 현이랑 동갑에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렴.” 이모부는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모부의 손이 지나가면서 나는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에 가슴에 설레기 시작했다. “네!” 헉, 너무 크게 대답했다. 내 대답 소리에 내가 더 놀라서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잘 보이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이런 모습만 보이고... 한심함에 차마 울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으며 선우 형을 바라보자 선우 형은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꽉꽉 눌러댔다. 지금 분명히 봤다. 선우 형이 입 모양으로 ‘바.보’ 라고 말하는 것을. 흑, 하지만 나는 사촌이 와서 너무 좋아서, 그래서... “재범이야, 잘 지내자.” 그 때 내 눈앞으로 손 하나가 불쑥 나왔다. 잘 정돈이 된 하얗고 길쭉길쭉한 손가락은 약간 살이 붙어서 예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주인하고 똑같은 손이다, 예뻐.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해 버렸다. “으응.” 볼을 붉히면서 나는 재범이를 바라보았다. 재범이는 그 때부터 내 친구가 되었다. -6- 이모부가 재범이와 같이 우리 집에서 묵으시는 이틀 동안 나는 내내 재범이와 붙어 다녔다. 선우 형은 그 동안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뚱하니 앉아 있었지만, 선우 형을 신경쓸 시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재범이와 같이 노느라 바빴으니까. 재범이는 첫인상과 똑같이 상냥하고 착한 아이였다. 나보다 어른스러워서 같이 있으면 묘하게 의지가 되는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재범이는 선우 형처럼 ‘바보’ 니 ‘돼지’ 니 하는 식으로 날 놀리지도 않았다. 이틀이 지나자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연휴도 끝났기 때문에 학교에 가야 했다. 그런데 학교에 가게 되면 재범이는 내 모든 것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집에는 애써 감춰왔던 그 끔찍한 사실을. 내가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라는 것을 알고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밤에 자러 침대에 들어갔지만 너무 걱정이 된 나는 잠도 오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나는 더욱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래, 이승호! 그 녀석이 또 날 괴롭힌다면 재범이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괴로움에 몸을 떨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선호 형은 노크 같은 것 안 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밖에서 재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야, 들어가도 돼?” "으응.“ 대답하자 문이 찰칵하고 열렸다. 재범이는 손에 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왜?” “나 내일 나가. 집 구했거든.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랑 같이 자고 가려고.” 허억~, 이것은 그 말로만 듣던 친구와 같이 밤 지새기 아닌가? 나는 감동에 몸이 떨렸다. “싫어?” 조심스럽게 묻는 재범이에게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좋아.” “그래? 그럼 내가 바깥쪽에서 잘게. 침대가 넓어서 떨어질 염려는 없으니까 좋은걸?” 상냥하게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좋던지, 나는 그만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 왜 그래?” 재범이는 당황한 목소리로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었다. “흐윽, 내일 학교 가면 날 싫어하게 될 거야.” “응?” 의아한 듯 묻는 재범이에게 나는 울먹이면서도 차마 아무 말도 해 줄수 없었다, 어찌 말한단 말인가. 이 슬픈 사연을. 하지만 역시 재범이는 뭔가 달랐다. 그저 울고 있는 나를 꽉 끌어안고 상냥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 내가 왜 너를 싫어해. 절대 그런 일은 없어. 알았지?” 그 목소리를 그만 믿고 싶어진 나는 재범이를 바라보았다. “진짜지? 정말로 ? 무슨 일이 있어도?” “으응.”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단호히 대답하는 그 음성에 나는 마음을 놓고 재범이와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시켰다. 재범이는 약속까지 다 한 다음에 내 옆에 누워 나를 꽉 안아 주었다. 그 날 밤 나는 달콤한 잠에 푹 빠져 한번도 깨지 않았다. 다음날 일어나니 재범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내 옆에서 같이 잤는데? 꿈이었나? 멍한 머리로 생각하면서 나는 세면실로 들어갔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니 곧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다. 어제 일이 꿈이었다면, 나는 재범이에게 다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선우 형이 세면실 문을 확 열었다. “바보 멍청이, 너 누가 함부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랬어?” 형의 얼굴이 심술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때였다면 알아서 몸을 사렸겠지만 이 때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형, 나 어제 재범이랑 같이 잔 거 맞아?” “허, 이게 이제는 머리까지 딸리네. 그 녀석은 아침 일찍 자기 집에 들렀다 간다고 나갔다.” 빈정대는 형의 말에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너, 혹시 그 녀석이 무슨 짓 안 하던?”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서 형이 목소리를 낮추며 묻자 나도 덩달아 고민에 빠졌다. “무슨 짓?” 어제 나랑 손가락 걸고 약속한 거? 하지만 그건 내가 하자고 그런 건데? 형을 바라보며 묻자 형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그랬으면 죽었지.” 죽어? 무슨 소리야, 대체? 의문부호로 가득차서 눈만 땡글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형이 갑자기 풋 웃었다. “우리 돼지는 먹기도 많이 먹으면서 왜 이렇게 부실할까. 쯧쯧.” 헉, 그러고 보니 여기는 세면실이었지.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티셔츠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 여기는 내가 쓰는 세면실이잖아? 형, 어서 나가~!” 소리치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형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어허, 내 누누이 말하지만 가족들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있으면 안 되지.” 그게 아니겠지... “ 사생활 보장은 어디다 팔아먹고?” 눈을 부릅뜨자 형이 놀란 듯이 말했다. “응? 현이가 그런 어려운 단어도 말할 줄 알다니? 야아~, 대단한데?“ 음하핫, 이 정도는 기본이지, 뭐. 하고 신나게 웃다가 나는 곧 후회해야 했다. 이 인간, 그사이에 도망쳤어~! 나는 씩씩하게 집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했다. 기분이 날아갈 듯한게 모든 것을 얻은 것 같다. 오늘은 월요일. 아침 조회가 있는 날이다. 평소라면 느지막이 나가서 혼자 서 있어야 하는 이 아침 조회를 치 떨리게 싫어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야, 5반에 전학생이 왔어.” “뭐? 누군데? 여자야?” “아니, 남잔데 꽤 노는 놈인가봐. 얼굴이 장난 아니던데?” 한 아이가 교실로 들어오면서 소리치자 아이들이 곧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재범이는 5반으로 배정됐구나, 우리 반으로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노는 놈이라는 게 무슨 말이지? 재범이는 얌전하고 착하게 생겼는데? 의문을 품고 아침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홀로 교실을 나서고 있었다. 복도 저 멀리에서 아이들과 같이 나오는 재범이의 얼굴이 보였다. 재범이는 어느새 친구들을 사귀었는지 몇몇 남자 아이들과 친근하게 어울려 있었다. 그런데... 재범이의 그 잘생긴 얼굴 여기저기에 울긋불긋하게 피어 있는 저 멍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설마 집에 가다가 말로만 듣던 그 깡패라는 것을 만나기라도 한 걸까? 나는 걱정이 되어서 재범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재범이는 나와 눈이 마주 치자 흠칫 놀라더니 눈을 쓱 피하는 것이다. 뭐지? 지금 날 못 봤나? “재범아~.” 다다다 달려가서 재범이를 조그맣게 부르자 재범이는 나를 무시하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 먼저 나갈 테니까 나중에 보자.” “저기, 재범아.” 혹시라도 나를 눈치채지 못하는가 싶어 손을 뻗자 재범이가 획 내 손을 쳐냈다. 뭔가, 놀랐다. 하지만 재범이도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재범이는 나를 바라보며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뭐야, 지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서럽던지. 나는 선우 형의 말도 잊어버린 채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울고 말았다. 그 후로도 재범이는 나를 명백하게 무시하면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역시 그랬던 거다. 재범이도 나와 친구하는 것이 싫어진 거다. 부끄러워 진 거야. 덩달아 같이 재범이를 무시하면서도 나는 가끔씩 재범이와 친구가 되었던 마지막 날 밤의 꿈을 꾸곤 했다. - 내 나이 12살, 우정과 배신에 대해서 배우다.- -7- 명성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아버지를 졸라 배현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명성의 아이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살고 싶었다. 나의 창피한 과거를 알고 있는 아이들, 나에게는 아는 척도 제대로 안 했던 아이들과 계속 같이 학교에 다닌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졌기 때문이다. 배현 중학교는 명성과는 달리 시설도 건물도 모두 낡고 허름했지만,(심지어 운동장도 작았다.)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무엇보다 명성과는 차로 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설마 이런 곳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거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른 채 입학했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이번에 내 목표는 분명히 세워져 있었다. 나도 친구를 사귀게 되면 명성 초등학교 나왔던 녀석들 앞에 데려가서 꼭 자랑하고 말 거다. ...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번에도 친구는 생기지 않는 걸까? 왜 초등학교 때랑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여전히 나는 혼자였고, 아이들은 나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자주 바라보며 수근대곤 했다. 새로운 기분이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나의 기분은 급격하게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가 나타났다. “네가 그 소문의 신입생?” 나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미소짓는 얼굴에 나는 으응? 하고 소리없이 반문했다. 소문? 설마 내가 혼자 다니는 것이 이미 전교에 소문이 났단 말인가? 비록 사실이라지만 그건 정말 싫었다. “ 내 이름은 미경이야, 이미경. 이 학교 3학년이야” 나에게 쓱 내밀어진 하얗고 작은 손을 쳐다보았다. 이미 호되게 데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 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주위에서 아이들이 수근대는 것도 신경쓰였다. “내 이름은...” 우물거리면서 말 하려고 하는데 미경 선배가 활짝 웃었다. “알아, 윤현. 현이라고 불러도 돼?” 왠지 모를 박력에 밀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경 선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모르겠는데. 주춤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미경 선배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 역시 차갑네, 하지만 그게 더 마음에 들어. 너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내가 싫진 않지? 특별히 싫지 않으면 나와 사귀자?“ 사귀어? 곧바로 내 머릿속은 광속 회전을 시작해 의식을 바람에 태워 보내 버렸다. 이건 혹시... 혹시... 그 말로만 듣던... 교제 신청? 마음에 드는 사람이 만났을 때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라는 말을 시작으로 친구의 관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는 엄청난 권유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무섭다. 미경 선배가 왜 내게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도 재범이처럼 곧 나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약한 내 마음은 혹시, 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때? 앞으로 같이 다니면서 혹시 싫어지면 언제든 헤어져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라면서 미경 선배는 애교있게 웃었다.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버림당하는 일은 없을 거다. 만약 선배가 나에게 실망한 것 같으면 내가 먼저 미련없이 이별을 말해야지. 이것은 그 때까지의 유예 기간일 뿐이다. 단지 추억으로만 존재하게 될 뿐이라도 지금의 외로운 나에게는 그것마저도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미경 선배의 손을 잡았다. 주위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제도 모르고.” “ 하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냐?” “잘 어울리긴, 저 얼굴을 어디다 갖다 대?” 안들린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다. 그래, 미경 선배가 예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냐? 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최대한 무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현아, 뭐해?” 미경 선배다. 선배는 왜인지 내가 마음에 든 듯 했다. 그녀는 매일 쉬는 시간마다 1학년인 우리 교실에 놀러와 나를 상대해 주고 있었다. 그런 미경 선배가 오히려 부담스러워져서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미경 선배가 싫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흐음, 현아. 오늘은 너네 집에 놀러가도 돼?” 놀러가? 우리 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경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 너 가끔씩 이런 표정 지으면 정말 귀엽다니까~. 뭐,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특별히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난 너네 집에 놀러 가보고 싶은걸.” 하고 애교있게 웃는 미경 선배를 보며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귀여워? 누가? 가족들에서밖에 귀엽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나다. 그것도 선우 형은 둔하다느니, 멍청한 돼지라느니 구박하기에 바쁜 나인데. 미경 선배는 취향이 특이한가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긴 그러니까 나와 친구하고 싶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까지 했겠지. 왠지 이제까지의 미경 선배 행동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싫어?” 싫다기보다... 집에 온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재범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떠난 후 갑자기 쌀쌀맞아진 녀석이 왜 생각이 나는 건지, 그리고 그 기억이 지금 미경 선배와 겹쳐지는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면서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미경 선배에게 합당한 이유를 설명할 자신은 없었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야,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너네 집 부자야? 차 정말 좋다.” 미경 선배는 여느때처럼 나를 마중 나온 차에 같이 올라 타 신기한 듯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이 차가 좋은 거든가? 우리 집에서 제일 평범한 차라고 들었는데, 하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집이 잘 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성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도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에 미경 선배의 반짝이는 눈빛은 내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아, 역시 귀티가 흐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역시 혈통이 다르다는 건가.” 미경 선배는 과장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시트를 만지작거렸다.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미경 선배는 오해를 한 듯 했다. “어, 설마 현이 너 화난 건 아니지? 맘에 담아 두지는 마. 내가 워낙 생각이 없으니까.” 기죽은 듯한 얼굴로 얌전히 앉아 있는 미경 선배를 보자 괜시리 미안해졌다. “괜찮아요.” 말을 하자 갑자기 차 안의 공기가 더욱 내려간 듯한 착각이... 하하, 대체 왜 이러지? 말을 잘못 했나? 화 안났다고 다시 고쳐 말 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면서 속으로 여러 말들을 고르면서 그 말들의 장단점을 비교 검토하고 있는데 어느새 차는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현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오랫동안 차를 운전해 주셨던 강 아저씨가 정중히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미경 선배와 같이 차에서 내렸다. “와아~.”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없었던 미경 선배는 차에서 내리자 작은 감탄사를 내뿜었다.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선배를 보면서 집 안에 들어서자 선우 형이 창가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며 달려오신 해원 아저씨에게 가방과 웃옷을 벗어 건네고는 내 뒤에서 비칠거리면서 서 있는 미경 선배를 잡아끌었다. “저희학교 3학년에 다니는 최 미경선배예요. 제...” 친구라고 말 해야 하나? 하지만 미경 선배가 말했듯이 선배와 나는 사귀고 있는 중이며 시험 기간을 가지고 있는 사이이다. 언제든지 맺고 끊을 수 있는. 게다가 아까 차 안에서의 일로 인해 나는 미경 선배를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마음속으로 할 말을 고르다가 주위의 침묵에 못 이겨 결국 나는 “저랑 사귀고 있는 사이예요.” 라고 말했다. 순간 해원 아저씨의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허억, 도련님과 사귀시는 분이라구요?” ...왜 이렇게 놀라는 걸까. 내게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해원 아저씨에게 그렇게 경악스러운 것이던가?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흩뿌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속으로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미경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조심 조심 미경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는 정말로 굳어 버렸다. 선배는 눈에서 빛을 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억, 손은 대체 왜 가슴에서 모아 쥐고 있는 거죠, 선배? 왠지 모를 두려움에 그저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위로 손이 놓아졌다. 잊고 있었다, 내 인생 최대의 역경인 웬수같은 선우 형을~! “그래, 우리 현이 친. 구. 라고?" "네, 현이와 사귀고 있는 미경이예요.“ 미경선배가 뺨을 붉히면서 다소곳이 대답하자, 내 머리 위에 놓인 손에 갑자기 힘이 팍 들어갔다. 아파, 아프다고~! 차마 미경 선배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서 나는 형의 심술을 온 몸으로 받아 내면서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래?” 미경 선배를 위 아래로 흩어보던 형이 갑자기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난 현이 작은 형인 선우 라고 해. 지금 xx대학교에 다니고 있지. 앞으로 잘 부탁해.” 형이 이렇게 얌전히 미경 선배를 대해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형은 싱긋 웃는 그대로 미경 선배를 이끌고 소파에 앉았다. 형과 선배를 따라서 앉으려는 나를 형이 찌릿하고 노려보았다. 여, 역시. 기분이 나쁜 게 틀림없어. 저 인간 대체 무슨 속셈이야? 반쯤 겁에 질려서 형을 바라보자, 미경 선배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나를 쳐다보았다. “현이는 학교 갔다 와서 피곤할 텐데 우선 씻고 와라. 조금 후에 선생님이 오시기로 했지 ? 미경이는 그 동안 나랑 놀고 있지 않을래?” “네에...” 미경 선배는 바닥을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안이 덥나? 아까부터 선배얼굴이 왜 저렇게 빨개져 있는 거지? “자, 현이 어서 올라가렴.” 재촉하는 형의 말에 밀려 2층 내 방으로 올라가면서도 나는 내내 불길함을 떨치지 못했다. 뭔가가 있어... “미안해. 하지만 우리 이제 그만 사겨.”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는 미경 선배를 그저 나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커다란 충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 “왜요?” 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싶다. 대체 왜 내게 친구가 생기지 않는 건지, 친구라고 생기기만 하면 곧 바로 없어지고 마는 건지 나는 정말 궁금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라도 해야 고치든지 할 것 아닌가. 내 말에 미경 선배가 우물쭈물 시선을 피했다. “난, 사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깊은 사이였던 것도 아니고...” 물론 미경 선배와 내가 깊은 우정을 나눈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서 드 는 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말없이 뒷말을 재촉하며 미경 선배를 바라보았다. “ 흐윽, 시, 실은...” 미경 선배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난 현이 너도 좋지만 선우 오빠가 더 좋아, 아니, 사랑해~!”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저 멍하니 있는데 미경 선배의 충격 고백은 계속되었다. “ 선우 오빠에 비하면 내가 많이 모자르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난 선우 오빠가 너무 좋아. 현이 너는 사실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잖아? 날 귀찮게 생각하는 것 다 알고 있다고. ” 흐느끼면서 나에 대한 원망인지 아니면 선우 형에 대한 연심인지를 더듬더듬 말하던 미연 선배는 결국 “ 그러니까 너도 날 응원해 줘. 나 정말 바람피지 않고 선우 오빠한테 잘 할 자신 있어.” 라는 말을 남기고 휘리릭 사라졌다. 이게...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결과 나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우 형, 이번엔 정말 가만 안 있을 거야~! 씩씩대며 집으로 돌아가자 역시나 선우 형은 학교에는 가지도 않고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형,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를 득득 갈면서 선우 형을 노려보자 형은 빙긋 웃었다. 지금 그런 미소를 한다고 나에게 먹힐 것 같아? 살벌한 내 기세를 알아챈 듯 형의 얼굴이 살짝 굳더니 곧 다시 여유롭게 펴진다. “ 흐음, 왜? 미경이라는 그 애가 헤어지재? ” 저 인간이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만 있자 형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현이 너가 순진해서 그래.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그저 그 계집애가 혼자 좋아서 난리치는 거지. 현이는 아직 어리니까 여자와 벌써부터 사귈 필요는 없는 거야. 때가 되면 형이 예쁘고 착한 여자를 구해서 소개시켜 줄게, 응?” 그러니까 화 풀어, 라면서 헤죽 웃는 형에게 나는 분노의 주먹을 날렸다. “형이 뭔데 내 친구를 뺏아가?” 형에게는 그닥 아플 것도 없는 약한 주먹일텐데도 형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형을 외면하고 나는 방으로 뛰어 올라가 문을 걸어 잠궜다. 다음날 내가 학교로 갈 때까지 형은 계속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인상을 쓰면서 학교에 도착하자 이런 내 기분을 아는 듯 반은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 다만 이상하게 복도 창문에 다른 반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인상을 쓰면서 앉아 있자 앞에 앉은 한 여자 아이가 신경이 쓰였는지 힘겹게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현아, 선배와 헤어...졌어?” 얼굴이 빨개져서 묻는 그 여자 아이를 바라보자 급기야 여자 아이의 얼굴이 점점 숙여지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가 획 돌려졌다. ...내가 이렇게 기분나쁜 분위기를 풍기자 거슬렸나 보다. 그런데 역시 미경 선배가 나와 같이 다녔던 것이 아이들에게는 상당한 의외였던 듯 하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헤어진 다음 날 바로 아는 것을 보면. 그래, 하긴 미경 선배가 별종이긴 했지. 암, 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암울해졌다. 형을 생각하면 정말 이가 갈린다. 형은 친구도 많으면서, 왜 내게 있는 단 하나의 친구마저도 빼앗아 간 걸까?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이대로 친구 없이 지낼 나의 남은 인생을 생각하자 기분이 더욱 어두워졌다. 나는 책상에 책을 펼친 채 멍하니 글자를 응시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아. 계속되는 마음속의 외침은 옛날 내가 가정교사와 대결했을 때처럼 어느새 확신처럼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수업이 끝나지도 않은 오전에 서슴없이 학교를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웅성대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특별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 선우 형이 없는 곳, 나를 아는 이들이 없는 곳.’ 다만 이런 글귀가 내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역전에 가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지역의 기차표를 끊었다. -8- -부제 :장남의 책임과 의무- “뭐야, 정말 못생겼어.” 라면서 선우는 연신 막내의 얼굴을 만져댔다.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괴롭히고 울려서 자신을 쳐다보게 하는 성격의 선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재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에서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순한 막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제 3살이 된 현이는 벌써 눈물을 달고 훌쩍이고 있었다. 선우의 팔을 연신 피하려는 듯 하지만 이미 재미가 붙어버린 선우는 그런 현이의 몸짓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현이의 볼을 만져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울 태세를 갖추는 현이를 보면서 선재는 이 사실을 외면하기로 결심했다. ...선재는 이래봬도 바쁜 사람이었고, 이 나이에 고집 센 선우와 같이 맞붙어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아름다운 우애야.” 라면서 울고 있는 현이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미연의 모습도 선재는 보지 못한 거였다. “이 바보, 또 우네?” 라면서 토닥토닥 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 선우의 모습을 뒤로 하면서 선재는 아버지의 호출에 따라 방을 나섰다. 오늘은 귀여운 막내의 5번째 생일날이다. 집안 모든 식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막내는 예상대로 결좋게 찰랑거리는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흰 피부를 가진 귀여운 모습으로 착실하게 커나가고 있었다. “어허, 정말 귀여운데?” 그런 현이의 모습에 음흉하게 눈을 빛내며 박 의원님이 이리 온 아가야~, 라는 식의 말을 내뱉자 아버지가 의원님을 이끌고 서재로 들어갔다. 비록 아버지의 친우 중 하나지만 역시 박 의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선재는 그 뒤를 따랐다. 박 중철 의원님은 현재 야당의 중진 의원으로서 그 자리를 탄탄이 굳히고 계셨다. 겉으로 드러나게 활동하는 분은 아니었지만 설득력있는 어투와 치밀한 머리를 가지고 과감히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 내에서의 신뢰도는 상당히 높았다. 더불어 박 의원님의 뒤에 버티고 있다는 어떤 거물의 존재가 거론되기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적으로 돌리기에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분이다. ...라고 알고 있었다. 선재는 이때 사람은 대외적인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때문에 박 의원님이 아버지를 상대로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현이와 내 자식이랑 같이 결혼을 시키자 이거지.” “...” “어허, 왜 말이 없나? 이사람, 설마 아깝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으흠, 꼭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그 녀석도 정말 잘 생기고 또 머리도 영특하고, 몸도 건강하다네. 게다가 날 닮아서 성격도 좋지. 어떤가? 현이라면...“ “... 자네는 아들만 셋인 걸로 알고 있었다만?” 그랬다. 박 의원은 현재 아들 3명을 두고 있는 걸로 선재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그런데?” 아버지의 반문에 박 의원이 씩 웃었다. “ 현이가 지금 5살이니까 그 녀석이랑 동갑이군. 민준이 녀석은 지금 미국에 가 있지만 나중에 한국으로 불러올 생각이니 대면은 그 때 하면 되겠군.” 결혼식은 역시 서양식이 낫겠지 라면서 하객들은 누구를 부를까 꼽아보고 있는 박 의원에게 아버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이를 갈았다. “ 자네, 현이가 남자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 박의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남, 남자아이였던가?” 끄덕. 네, 그런데요. 라는 표정으로 선재가 아버지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박의원을 쳐다보자 박의원은 땀을 삐질 흘리더니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아이들 마음이지.” ...이보세요? 지금 박 의원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애타는 눈빛으로 박 의원을 바라보는 두 명의 시선을 박 의원은 깨끗이 무시했다. “ 허허, 자기들이 좋다고 한다면 부모 된 입장에서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다행히 현이도 막내고, 또 민준이도 막내니 대가 끊긴다는 식의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래,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빌어주는 법, 이라면서 아득한 눈을 하는 박 의원에게 결국 아버지는 노호성을 질렀다. “당장 나가~! 자네 다시 그 따위 말을 꺼내기만 하면...” 박 의원은 서재를 나가면서 아버지에게 손을 흔드는 여유도 보였다. “그럼 나중에 보게, 사돈.” “크아악~!” 그날 선재는 눈앞에서 아버지가 망가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아버지는 그 후 어린 현이를 붙잡아다 철저히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현이가 혹여라도 박 의원의 마수에 걸리거나, 또는 이상한 이들에게 걸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똑부러지는 현이’를 만들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때문에 현이의 어리광을 애써 무시하시고는 홀로 방 안에서 현이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는 아버지의 모습을 선재는 괴로워하며 목격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현이는 쌀쌀하고 냉정맞은 성격이 아니라 둔하고 착해빠진 아이로 자라났으니... ...그런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선재였다. 선재의 입장에서는 힘들어하는 현이를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태산같았다. 하지만 선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방법이 효과가 없다고 알려줄 수 없었듯이 현이에게도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현이가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외국에 갔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때도 선재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실 어머니는 극성맞은 선호와 앙칼진 미연이를 기른 후 육아에 진절머리를 내시면서 탈출을 꿈꿔 오셨다는 사실을 선재는 차마 현이에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현이 앞에서는 자신이 현이의 어머니라도 된 듯 다정하게 웃는 미연이를 보면서 눈을 빛내는 현이를 보면 더욱 그랬다. 선재는 미연이 얼마 전에도 미연에게 추근대던 남자의 팔뼈를 부러뜨려서 병원에 입원시켰다든가, 선우가 운동 사범이 자신에게 건방지게 굴었다고 2층에서 병을 사범의 머리에 던지게 아이들을 시킨 것 같다던가 하는 사실도 마음 한 구석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래서 선재는 선우와 미연이가 다른 이들이 현이를 보는 것도 싫어해서 집 밖으로 잘 내보내지도 않는다든가, 다른 이들의 집안 출입을 통제했다든가 하는 사실도 말해 줄 수 없었다. 가정교사에게 현이가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선우가 가정교사의 정강이를 피멍이 들도록 발로 찼다던가, 아버지가 가정 교사를 곧바로 해고한 후, 미연이가 타 준 특별 배양한 대장균이 듬뿍 들어간 음료를 마신 후 나간 가정교사가 그 후 행방 불명이 되었다는 것도 선재는 묵인했다. 그저 선재는 현이 앞에서 어른인 척 얌전하게 구는 미연이와 어떻게든 무게 있어 보이려고 애쓰는 아버지, 그리고 현이의 존경과 관심을 얻고 싶어 어린 꼬맹이를 앞에 두고 갖은 욕설과 싸움법을 가르쳐주는 선우의 모습만 알 뿐이었다. 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보호자로 참가하는 자격을 두고 아버지와 선우, 미연이가 엄청난 혈투를 벌였었다는 것 또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남몰래 미연이와 선우가 사람들이 현이를 건드리지 않도록 경고하고 다닌다는 것도 선재는 모른 척 했다. 사실 명성은 같은 상류층 자제들만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고, 한 다리 건너면 누구나 인사 한 번 해본 사이였다. 뭐, 현이가 이렇게 무사히 자라나는 데에는 사실 현이의 외모도 한 몫을 했다. 아버지의 교육은 성격이 아니라 외모에서 성과를 얻은 것인지 현이는 일견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분위기를 품고 있어서 다른 이들이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이는 밖에 나가면 수줍음 때문에 현저하게 말 수가 줄곤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않은 녀석들도 있었지. 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외교부에서 근무하시는 이 정무장관의 둘째 아들 녀석이 현이 주변에서 얼쩡거린다는 소식을 들은 선우는 미연과 쑥덕거리면서 의논을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선재는 그 녀석들의 행방을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클대로 큰 녀석들이 그 길로 정무 장관 댁을 방문해 현이와 같은 학년이라는 그 아들과 길고 긴 면담을 나눴다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또 그 녀석이 고집 세게 계속해서 현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 어떤 깡패 녀석들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했다. 당찬 눈빛을 하고 병실에 누워있는 그 녀석에게 병문안을 핑계로 바쁜 시간을 쪼개 방문한 후에도, 선재는 애써 승호라는 그 녀석이 입원하기 전 선우가 전화통을 붙잡고 누군가에게 바쁘게 명령을 내렸지, 같은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미연이 사채업자의 큰 손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정무장관님의 친척인 이 해정 여사님의 외동딸을 만나 오랜 대화를 나눴다고 보고 받았을 때에도 선재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런가, 하고 대답했을 뿐이다. 재호 이모부가 한국으로 발령이 나서 저택에 묵었을 때에도 선재는 그저 그렇군, 했을 뿐이다. 이모부가 오신후 이틀이 지난 후 밤에 바쁘신 아버지를 대신해 이모부가 집을 떠나시기 전 인사라도 드릴 겸 선재는 저택에 들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까지 고개를 흔들며 포기해야만 했던 패악스런 선우의 고함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놀란 얼굴로 서 있는 선재를 보며 집안에서 오래 근무해 오셔서 이제는 가족과 같으신 해원 아저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재범 도련님께서 현이 도련님 침대에서 같이 주무시고 계셔서...” 해원 아저씨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선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고이 자고 있는 막내의 잠자리를 정돈해 준다는 이유로 현이의 방에 숨어 들어간 선우가 그 광경을 목격한 후 저 난리가 일어난 것일 거다. “ 허허, 이 집은 여전하군. ” 어느새 선재의 등 뒤에 서서 태연하게 말하는 이모부를 선재는 차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서 선우에게 맞고 있는 걸로 추정되고 있는 낯선 신음소리는 이모부 아들인 걸로 추정되는 데요? 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이면서 선재는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질문이 선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이모부는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뭐,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선재군,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 잔 어떤가? 매형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다른 가족들은 어떤지 그간 사정을 듣고 싶군.” “...죽지는 않겠지만...” 그 비슷한 정도까지는 갈 것 같은데요. 라는 말 역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뭐, 정 걱정되면 자네가 말려보던가. 나는 선우군이 6살 때 귀엽다고 머리를 만져주다가 포크로 손등을 찍힌 후 기운이 예전같지 않다네. ” 허허, 늙었어 , 라면서 웃는 이모부를 선재는 암담하게 바라보았지만 선재 역시 선우를 말리러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선재는 아직 얼굴도 못본 사촌에게 지금 미연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는 짧은 인사말을 속으로 고하고 이모부와 같이 타격음과 신음소리가 가득 찬 저택을 떠났다. ...그에게도 두 동생은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건드리면 안되는 지뢰밭이자 화산 지대였다. 게다가 장남이란 때로는 가족을 위해 사실을 외면하며 현실을 지탱해 나가야 되는 의무를 지고 있는 법이다. 비록 그 사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9- 기차에 올라 탄 후 그제서야 목적지를 살펴보자 광주라고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아픈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잠도 오지 않는다. 그저 창 밖을 바라보자 창문에 슬며시 나의 얼굴이 비쳤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못생겼다. 얼굴선이 여기저기 흐트러지고 뭉개져서 창문에 비치는 것을 보자 미경 선배도, 또 다른 이들도 나를 싫어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카트에 음식을 실은 역무원이 객실을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기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 이것 저것 생각을 하다가 나는 결국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고 났을 때에도 기차는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듬성듬성 앉아 있었고 모두 자고 있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나 광주에 가서 뭐하지? 이제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것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허억, 그러고 보니 난 정말 바보였단 말인가! 광주까지 가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무등산. 무등산을 보러 가는 거다. 가서 산의 경치도 음미하고, 좋은 공기도 쐬고, 또 안 좋았던 일들을 모두 잊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해 낸 나 자신이 뿌듯해서 점차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기차는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람이....많다. 누가 감히 지방을 깔보는 발언을 했던가? 서울 못지 않게 북적거리는 광주 시내 안에서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저~기 보이는 저 산이 무등산이 맞을까? 여긴 광주니까 광주에 있는 산은 분명 무등산이겠지? 하지만 틀리면? 우리나라의 특성상 앞 뒷집 사이에 동네 뒷산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으윽, 고민 돼. 역시 물어볼까?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까,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그만 물어보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에구, 내 팔자야. 그래, 믿을 건 내 두 다리 뿐이다. 저 산에 도착해서 혹시 무등산이 아니라면 그 때 다시 생각하면 되지. ...힘들다. 위로, 또는 도피성 여행의 형식을 띄고 있었던 당초의 목적과는 다르게 나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산은 저 멀리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광주 시내에 도착한 후 멀리 보이는 산을 보며 이대로 산까지 걸어가겠다고 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체 왜 시내에서 산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기만 하면 산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어진다. 길이란 쭉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걷는 도중 길 사이사이에 커다란 벽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는다든지, 주택가가 길게 형성되어 있다든지 하는 모습에 의욕이 푸쉬식 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하게 저물어 있었고, 머리 위에는 푸르스름한 일그러진 반달까지 떠 있었다. 좀... 쉴까? 아프다 못해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를 부여잡고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2층 건물들이 즐비해 있는 상점가로 보이는 곳이다. 언뜻 고개를 들자 속셈 학원이라고 2층 건물에 달려있는 간판이 보였다. 노랗게 빛나는 형광등에 끌려 나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계단에 기대 좀 쉬다가 나갈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1층 현관 쪽은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었기에 2층 계단 쪽으로 올라가는데 2층 복도 구석에 버려진 옷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옷장은 매우 컸고, 또 아직 깨끗했다. 순간, 대체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무척이나 피곤해서가 아니였을까 싶다. 나는 옷장 문을 열고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커다란 옷장은 165가 훨씬 넘는 나의 체구를 무리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옷장 문을 닫자 곧 어둠이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옷장 안에서 나는 불편한 자세로 서서 반쯤 졸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이상한 공기의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눈감고 있어~! 라는 본능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천천히 눈을 뜨자 한 청년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얼굴이 너무 놀란 빛을 띄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굳어서 그 청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청년은 경직된 자세로 천천히 옷장 문을 닫았다. 나는 옷장 안에서 그저 눈만 깜박거리면서 서 있었다. 밖에서 아이들이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라는 등의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 미루어 청년의 정체는 속셈학원 선생님인 것 같다, 라고 멍한 머리가 추론한 사실을 보내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사실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청년이 한 여인과 같이 돌아와 다시 옷장 문을 열었던 것이다. 여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청년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여유있는 표정이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인사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썰렁한 분위기가 주위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옷장 문을 닫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옷장 안에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머릿 속 생각은 아까부터 잔뜩 엉켜서 사용 불가능의 신호만 보내고 있었다. 살며시 옷장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자 다행히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틈에 튀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그 건물을 빠져나왔다. 겨우 달리는 것을 멈춘 것은 그 건물이 있던 상점가를 한참은 지난 어떤 골목길에서였다. 헉헉대며 거칠게 나오는 숨을 고르며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당초 내가 왜 편한 집을 나온 걸까? 이제는 심하게 배가 고팠다. 아까 일로 인한 무안함, 배고픔, 피로 등이 한꺼 번에 밀려오자 자연스럽게 분노의 화살은 선우 형에게 돌려졌다. 그래, 애당초 원흉은 선우 형인 거다. 이제 나는 선우 형과는 절대 아는 척도 안 할 거다. 이대로 나는 삐뚤어져서 자라게 되겠지. 그 때가 되서 선우 형이 날 찾아와 용서해 달라고 해도 나는 무시하고 비웃을 거다. 그럼 선우 형이 무릎을 꿇고... 엥? 선우 형이 무릎을 꿇는 것은 패스. 그런건 전혀 상상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것을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선우 형을 한 대 제대로 때리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면서 선우 형을 어떻게 때리면 될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 때였다. “호오~, 여기서 대체 뭐 하냐?” ...여기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린데? 이상하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역시 보이는 것은 선우 형이다. -10- 형은 차가운 밤 공기에도 불고하고 얇은 푸른색 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가장 윗 단추는 풀러진 상태였고, 평소와는 다르게 셔츠 여기저기가 구겨져 있었다. 놀라서 눈만 땡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형이 얼굴을 찌푸렸다. “ 으휴, 궁상맞게시리.” 평소와 다름없이 날 구박하는 형의 모습에 그제서야 이것이 현실이라는 인식이 들었다. 헉, 그러고 보니 이 인간, 벌써 잊은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형의 얼굴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 후우, 꼬맹아.” 형은 그런 내 모습에 화가 났는지 목소리를 약간 낮게 깔았다. 대체 뭐야, 정작 화가 난 건 나라고~! 속으로 꿍얼대는데 형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면서 나는 고개가 형 쪽으로 저절로 돌아가려는 것을 최대한 참고 있었다. “ 미연누나하고 선재 형이 이 근처에 와 있어.” 뭐? 누나랑 형이? 선우 형의 말에 나는 다짐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리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런 내 모습에 선우 형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렇게 누나랑 선재 형이 좋으냐? 나보다 더 좋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걸까. 나는 눈 앞의 인간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참에 확실히 해둬야지 싶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젠장.” 헉,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속 좁은 선우 형은 그 말 한 마디에 삐쳤는지 엄청난 기세로 옆의 벽을 주먹으로 쳤다. 지, 진정해. 형. 그런다고 내가 감정을 속일 것 같아? “너 정말이냐?” “아, 아니. 선우 형이 제일 좋아.” 살벌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선우 형을 보고 나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벽을 친 왼쪽 손에서 피를 흘리면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저 모습을 보고 어찌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그래.” 여, 역시 단순한 인간. 선우 형은 그 말 한 마디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더욱 공포스러워진 나는 선우 형 몰래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있으면 여차할 때 방패막으로 쓸 수 있지 않나 싶어서... 하지만 골목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고, 불행히도 내 앞의 탈출로는 선우 형이 온 몸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 자, 어서 가자.” 선우 형은 태연히 내 손을 붙잡고 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왜? 형하고 누나가 있는 곳 여기서 별로 안 멀어. 무척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차를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어.” 선우 형은 이런 소리나 해대면서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인간아, 지금이 그런 소리를 할 때야? 나는 허겁지겁 가방을 뒤졌다. 분명 여기다 넣어 뒀었는데? 아, 맞다. 아까 걸으면서 땀을 닦는다고 꺼냈다가 주머니에 넣어 뒀었지.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차곡차곡 접은 후 형의 왼 손을 잡았다. 역시나 무식하게 벽을 친 여파로 손등이 까져서 아직도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선우 형이니 이 정도로 끝난 거다. 보통 사람이 그 기세로 벽과 부딪혔다면 분명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텐데. 역시 형은 인간이 아니었던 게야,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손수건으로 형의 손을 일단 대충 감아 주었다. 조금 땀냄새가 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는것보단 낫겠지. “ 나중에 가서 꼭 치료받아, 알았지?” 한숨을 폭 쉬며 말하자, 아무 대답이 없다. 으응? 하고 고개를 들자 선우 형이 눈을 반짝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혀엉?” 불길해, 불길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커다란 손이 볼을 잡고 쫘악 늘렸다. “우리 바보는 대체 누가 데려갈까? 이러다가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야?” 허억, 그런 악담을~! 그리고 아파, 아프다고~! 온몸을 뒤틀며 반항을 하는데도, 역시나 선우 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조금 후에 도착한 곳은 선우 형의 말대로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커다란 건물의 지하로 들어가자 까만 정장을 입은 덩치 큰 아저씨들이 입구에 서 있었다. “ 어딨지?” 툭하고 내뱉는 형의 말에 아저씨들은 기분도 상하지 않은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연환(衍喚)실에 계세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누나가 서 있었다. 갈색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섬세하게 치장되어 비녀로 틀어 올려져 있다.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거슬려 보이지 않는 묘한 느낌의 미녀였다. 길다랗고 섬세한 속눈썹이 커다란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그 아래 새빨간 입술이 도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누나는 몸에 달라붙는 차이나 식 드레스를 입고 길다란 담뱃대를 들고 도도히 서 있었다. 왠지 퇴폐적이면서 쓸쓸해 보이는 분위기에 넋이 나가 멍하니 바라보는데 선우 형은 누나가 예뻐 보이지도 않는 듯 했다. “ 알았어.” 무성의하게 내뱉고는 선우 형은 그대로 입구를 통과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형이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던 터라 나도 형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애써 알려 준 누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나는 끌려가면서도 누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누나의 눈이 의외라는 듯이 크게 떠지더니 처음으로 살풋이 웃었다. “대체 인사는 왜 하고 그래?” 선우 형은 내가 누나에게 고개를 숙인 것을 눈치 챈 듯 걸어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이 인간은 등뒤에 눈이 달렸나? 어느 사이에 그걸 또 본 거야? “ 앞으로 볼 필요 없는 족속들이니까, 이곳은 잊어버려.” 단호히 말하는 선우형의 말에도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아, 애당초 여기서 만나자고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 다시 중얼대는 선우 형을 무시하고 연환(衍喚)이라고 써진 문을 열자 그 안에 미연 누나와 선재 형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의 앞에는 술병이 여러 병 놓여 있었다. “누나~!” 오랜만에 보는 미연 누나의 모습이 나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형에게는 인사 안 하냐?” 하고 웃는 선재 형의 모습에 그제서야 나는 “큰 형도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선재 형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인지 역시 나에게 조금 어려운 상대였다. 미연 누나의 옆자리에 앉아서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보통 술자리에 있다고 하는 노래방 기계들은 이 곳에 없었고 대신 정면에 커다란 스크린이 한 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푹신하게 몸을 받아들이는 고급스런 느낌의 소파와 섬세한 세공의 탁자, 은은한 조명이 은연중에 품격을 드러내는 듯 하다. “흥, 왜 피곤한 애를 데리고 시비야, 시비는?” 시비는 지금 선우 형이 걸고 있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오랜만에 미연 누나를 봤는데, 선우 형과 싸우면서 시간을 보낼수는 없지 않은가. “ 현아, 오늘 학교에서 조퇴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놀러 와 있을 줄은 몰랐네. 누나랑 형들도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이 곳에 왔었는데, 선우가 길에서 널 봤다고 하지 뭐야. 깜짝 놀라서 선우에게 너랑 같이 이 곳에 와서 좀 만나고 가자고 불렀지.” 나근나근 말하며 마무리로 생긋 웃는 미연 누나의 모습에 나는 그제서야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선우 형이 나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왜인지 옆에서 선재 형이 술을 마시다 말고 갑자기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 어머, 선재 오빠. 천천히 마시지 그랬어. 기왕이면 나도 좀 주고. 참, 현이가 나한테 좀 따라 줄래?“ 나는 미연 누나의 말대로 앞에 놓여 있는 술병 중 하나를 골라 미연 누나의 잔에 따라 주고 덤으로 선우 형의 잔에도 따라 주었다. 그러자 미연 누나가 생긋 웃으면서 내 앞에도 잔을 놓고 술을 따라 주었다. 그 전에도 선우 형이 주는 대로 몇 번 술을 마셔 본적은 있지만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앞 서 미연 누나가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면서 말했다. “자, 그럼 우리 한 번 건배나 해 볼까?” 그 웃음에 홀려 나는 잔을 들고 건배를 한 후 술을 들이켰다. “어, 맛있네?” “그래? 다행이다. 현이 그럼 한 번 더 먹어볼래?” 미연 누나는 곧 내 술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톡 쏘는 듯한 달달한 맛에 이끌려 나는 미연 누나가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 “흐윽, 그래서...” “그래, 우리 현이 많이 억울했구나. 그리고?” 누가 자꾸 이렇게 칭얼대는 거야? 시끄러워, 시끄럽단 말이야. 계속해서 짜증을 냈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누구야, 이 녀석은? 짜증을 내며 눈을 뜨려는데 뭔가 시야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까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듯도 하다. 그럼 지금 칭얼대고 있는 목소리는 설마 나? 에이, 설마.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리다 못해 이제는 여러 색이 공중에서 섞이기 시작했다. “예뻐...” “현아?” “으음...” 어느 순간 정신을 잃듯이 나는 잠에 빠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형과 누나들은 이미 오래 전에 정신을 차리고 단정한 차림으로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바쁜 선재 형은 이미 회사로 돌아가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연 누나가 주는 꿀물을 받아 마시고, 연환(衍喚)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세면실에 가 간단하게 씻고 나왔다. 내가 씻는 사이에 어느새 다녀간 건지 탁자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현아, 어서 와서 밥 먹자.” 미연 누나의 말에 다소곳이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자 선우 형이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다. “으응?” 그 모습에 입 안에 가득 들었던 음식물을 황급히 삼키고 형을 바라보자 대답은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현아, 혹시 홀로 서기라는 것에 대해서 아니?” 미연 누나의 갑작스런 말에 나는 젓가락을 손에 들고 그저 미연 누나를 바라보았다. “ 사람이란 누구나 홀로 서기 마련이지. 빠르든 늦든 말이다.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려면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 “ 하지만 말이다. 홀로 서게 되는 날을 미리 준비하고 또 그 때를 대비해서 꿋꿋이 산다면 그것처럼 멋있는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단다. 가끔씩 사람들은 홀로 다니는 이들을 보고, 가엾다느니 이상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면 정말 매력있는 삶이 아닐까? 나약한 인간일수록 여럿이서 뭉쳐서 있어야만 안심하는 경향이 있단다. 집단이란 것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안심을 느끼는 부류들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친. 구. 라는 것이지.” ...정말 그런가? 뭔가 이상해하면서도 미연 누나의 말에 내 마음은 슬며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친구라는 것은 인생에서 한 두명쯤은 있어도 좋은 것이지. 다만 진정한 친구라면 말이다. 진정한 친구라는 것은 무척이나 귀하고 얻기 힘든 것이어서 억지로 조급해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란다. 현이 너가 진. 정. 한. 친구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진짜 친구들이 나타날 거야.” “하지만...” 되살아나는 쓰린 기억에 선우 형을 노려보면서 내가 반박을 하려 하자 미연 누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선우가 너에게 잘못을 했다는 애기는 들었어. 그것 때문에 현이가 슬퍼했다는 것도. 하지만, 현아. 선우는 다만 동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란다. 그 아이도 너를 금방 떠났잖아? 아직 현이의 진정한 친구는 나타나지 않은 거야. 선우는 현이의 진짜 친구가 나타날 때를 위해 현이가 아파 할 걸 알면서도 눈물을 참고 일부러 그 아이를 떠나게 한 거야. 알겠지? “ 이럴 수가... 어느새 선우 형은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순교자가 되어 있었다. 감격스런 눈으로 미연 누나를 보는 선우 형의 모습에 나는 다소 의심스러워졌다. “...정말? 그럼 내 진정한 친구는 언제 나타나는데?” “아아, 그건 나중에 현이가 어른이 되면 누나가 찾아서 데려와 줄게.” 나 믿지? 하면서 미연 누나는 길다란 검은색 생머리를 살며시 뒤로 넘겼다. 그런 미연 누나에게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물론 누나는 믿지만, 그렇지만... “ 지금 나타나면 안 돼?” 미연 누나에게 투정부리듯이 묻자 누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 현이는 아직 너무 어리단다. 진정한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지키는 법도 배워야지.” 하지만 나는 지금도 약하지 않아. 공부도 얼마나 잘 한다고. “아니, 지금의 현이는 아직 부족하단다. 우선 지키는 법을 알려면 자기 자신부터 강해져야 하는 법이야.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단다. 사람은 약하지 않아. 여간해선 상처받지 않는 동물이 인간이니까,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현아, 누나가 전부 가르쳐 줄게. 홀로 서기의 모든 것을.” 나는 시선을 선우 형에게 주었다가 다시 미연 누나를 바라보았다. “ 그래, 이제 현이도 곧 혼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게 될거야.” 지금 왠지 닭살이 오도독 돋는 것은 씩 웃고 있는 선우 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거다. 암, 그럴거야. ...그런데 왜 앞을 바라보기가 싫어지지? -내 나이 14살, 홀로서기를 전수받다.- -11- 미연 누나는 훌륭한 스승이었고, 역시나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아, 홀로 서기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나는 정말 몰랐다.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다는 것은 정말로 멋있는 것이었고, 때문에 나는 미연 누나의 가르침을 철저히 습득했다. 그 때 광주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 학교에서는 다행히 내가 무단 결석을 했던 것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고 묵인해주었다. 내가 모범생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 후로도 여전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점차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는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 편하고 좋은 지경에까지 도달했다. ...이것은 미연 누나가 말하던 바로 그 득음의 경지? 그런데 미연 누나는 이 말을 듣고 거의 최고의 경지까지 도달했으나, 아직은 조금 모자란다고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나는 아직 모자랐다. 그래, 내가 완벽한,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거다. 나는 중학교 3학년 과정이 끝난 후 다시 예전의 모교, 명성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변함 없었다. 육중한 자태로 위협하는 건물들도, 잘 꾸며진 화단도, 넝쿨로 문을 감싸고 있는 정원도. 다만 예전과는 달리 구석에 위치한 고등학교 건물에 다니게 된 것 만이 달랐다. 명성 고등학교는 기본적으로 기숙사제이다. 이유는 학생들의 학업 능력을 신장시키고 적극적이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학생들에게 관대한 명성 고등학교는 강제로 기숙사 입사를 시키는 입장은 아니었다. 성적이 특별히 우수하다거나, 아니면 엄청난 무언가가 있다고 하면 충. 분. 히 기숙사에 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 예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 볼수 있다. 바로 선우 형, 나어린 나보다 등교시간이 빠른 것처럼 느껴지곤 했던 형은 내가 알기로 조퇴, 지각, 결석 상습범이었지만 전혀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 나도 기숙사에 꼭 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숙사 신청란에 서명을 하고 접수했다. 내 이런 결정에 대해 선우 형은 무척이나 화를 냈다. 그런 형에게, 혼자 있어서 심심하면 동물이라도 하나 키워서 놀던가~! 하고 소리쳤다가 오히려 볼 늘리기 형벌을 당했다. 게다가 미연 누나마저 아버지와 같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설득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미연 누나에게 나의 진지한 포부를 설명해주었다. 미연 누나의 말마따마 나는 혼자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만났던 이들을 만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하자 미연 누나와 아버지, 선우 형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내가 집을 떠나 있는 것이 필수 적이다, 집에 있으면서 내가 가족들에게 기대고 어리광만 부리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라고 말하자 누나와 형의 얼굴이 괴상하게 변했고, 아버지는 땀을 흘리시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우신가? 아직 초봄인데, 하면서 아버지에게 슬쩍 손수건을 건네 드리고 나는 설명을 계속했다. 기숙사에 혼자 머물면서 내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대목에 이르르자 선우 형이 갑자기 격렬하게 기침을 터뜨렸다. 미연 누나도 왜인지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무, 물론 현이 네 말도 맞아. 하지만 말이야...” 그 뒤로 거절의 말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나는 이제까지 갖은 강요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짓을 했다. 두 손 모아잡고 눈 반짝반짝 빛내기를 하면서 간절히 바라보았다. “꼬~옥 다니고 싶어요, 제발요, 네?” 마무리는 아버지 볼에 쪼~옥. 그리고 형과 누나에게 시선을 돌려 “ 제발, 응?” 하면서 역시 볼에 입맞추었다. 선우 형의 경우 조금 망설여지긴 했으나 나는 그만큼 간절했다. 그런데 그 때 문이 열리더니 선재 형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재 형은 선우 형 볼에 내가 입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돌처럼 굳어졌다. “ 형, 오셨어요?” 일단 인사해야지. 선재 형에게 말하자 선재 형은 갑자기 비호처럼 선우 형에게 달려왔다. “너, 이녀석.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현이는 네 동생이야~!” ...누가 뭐랬나. 내가 선우 형이 싫다고 아무리 말해도 선우 형 동생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 선재 형은 아무도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되풀이해서 그 말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 퍼억. 지,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연 누나가 손을 뻗어서 선재형 배를 걷어 찬 것 같은데? 환상인가.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미연 누나가 다시 나를 보면서 상냥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미연 누나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그런 이상한 환상을 보다니, 미연 누나에게는 절대 말 못할 일이다. ...선재 형은 이상한 말을 계속 하더니 지쳤나 보다. 저렇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 그래, 현아. 기숙사에 다니는 것도 좋지. 게다가 명성은 누나가 다녀 봐서 아는데 시설도 괜찮고,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 많단다. ” “미, 미연아.” “누나.” “단, 현이를 보내고 나면 누나는 무척 걱정이 될 것 같아. 현이도 책임감 없는 사람은 싫지? 그러니까 누나가 하는 몇 가지 부탁만 들어줬으면 해.” 미연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가 말을 이었다. “ 우선 핸드폰. 이제까지 현이 핸드폰 귀찮다고 안 가지고 다녔지? 그렇지만 기숙사에 가면 연락 수단은 핸드폰밖에 없으니까 언제나 갖고 다녀. 그리고 기숙사 통금 시간 엄수. 기숙사에 가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태반의 학생들이 통금 시간을 지키지 않거든? 하지만 현이의 통금 시간은 누나랑 형이 계속 살펴볼 테니까 절대 늦으면 안 돼. 알았지?” 그 정도야 뭐. 끄덕끄덕 하면서 긍정했다. “ 그리고 기숙사에 가면 식사 문제, 세탁 문제, 청소 문제 등 귀찮은 것이 많단다. 그런 것을 가지고 불평하기 없기. 그리고 누나는 현이가 설마 나쁜 아이들을 만날까봐 무척이나 걱정이 돼. 혹시라도 이상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거나, 학교를 무단으로 결석한다던가, 또는...” ...헉, 1시간이 지났다. 누나는 계속해서 금지 사항들을 말했으며, 간간이 아버지와 선우 형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도 하고 있었다. 선재 형은 누운 김에 잠에 든 건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으면 현이도 아쉽지만 집으로 돌아와야 된단다. 누나는 현이가 책임감 있는 사람일 거라고 믿어. 그렇지?” 하는 누나에게 나는 손가락을 걸고 굳은 약속을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선재 형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선재 형 머리 부근에서 흘러 나오는 저것, 설마 피는 아니겠지? 겁에 질려서 바라보는 데 미연 누나가 나긋나긋 선우 형에게 말했다. “선우야, 구급차 부르렴. 선재 오빠는 너무 몸이 허약해서 걱정이라니까.“ “아아, 알았어. 쳇 귀찮게. 저 정도로 호들갑은.” 선우 형은 투덜대면서도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바삐 일어나시더니 회사에 일이 있다면서 먼저 나가셨다. ...선재 형은 구급차로 실려가서 2주일간 입원 조치에 취해졌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역시 미연 누나 말대로 선재 형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슬슬 조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선우 형은 선재 형 때문에 일이 늘어났다고 연신 투덜거렸다. 그래도 내 고등학교 입학식에는 따라오고 말겠다는 선우 형을 말리느라 나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했다. 겨우 선우 형을 떼놓는데 성공하고 나는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입학식이 시작되는 커다란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모든 것이 시작이었다. -12- 강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귓가에 꽂혀 있는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듣기 위해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한 쪽 구석에 남아있는 의자에 태연스레 앉은 후 꺼낸 것은 소설책 한 권. 미연 누나가 알려 준 혼자서도 잘 산다~! 비법 중 하나이다. 이것의 효과는 매우 좋아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고 있는 나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 이제까지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서도 그 시간을 잘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가무잡잡한 얼굴과 훤칠한 키, 결좋은 까만 머리카락. 외꺼풀의 눈이 나를 향해 싱긋 웃는다. 나는 천천히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저기, 혹시... 윤 현 아니야?” 내가 윤 현 인건 맞다. 나도 눈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 괴상했던 자랑쟁이 녀석,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주위에서 얼쩡거리던... “맞아.” “아아, 역시. 반갑다. 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 너랑 같은 초등학교 동창이거든.” 넌 혹시 기억하냐? 강당 안에 있는 학생들 중 90% 이상이 나랑 초등학교 동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랑 같은 반이었었어. 김민현이라고, 옆에 앉았었는데... 아마 잘 기억 안나겠지만 말이야.” 기억하다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겠냐. 하지만 나는 왠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저 민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하하, 어쨌든 반갑고,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다. 네가 졸업하고 갑자기 다른 중학교로 가버려서 아이들이 너 많이 보고 싶어했거든.” 다른 아이들은 날 기억도 못 했을 것 같은데? 이상한 기분. 나야 김민현을 기억하고 있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지만 설마 녀석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 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예전과는 다르게 이렇게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친한 척 말을 걸어 올 줄은... 아, 혹시 어쩌면 나... 기쁜 건가? 가슴속 한 구석이 간지러워진다. “그, 그리고 나도 너 많이 보고 싶었어...”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해, 이상해. 이런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닌데? 내가 고등학교에 와도 예전 녀석들은 아무도 나를 기억하고 있지 못할 줄 알았다. 딱히 녀석들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다 라던가 하는 그런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나는 알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홀로 설수 있는 존재인가를. 과거 못 견디게 나를 흔들어 놓았던 이들을 만나서도 담담할 수 있는 나이기를 바랬다.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상상 속에서 언제나 초등학교 때의 녀석들은 싸늘한 모습을 하고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위험해, 이런 것 익숙하지 않아. 김민현은 점점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옛날처럼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옆자리에 앉은 아이와 말을 속닥 거리더니 그 자리에 털썩 앉는 것이 아닌가. 내 시선에 다시 넉살좋게 웃는다. “하하, 저 녀석이 다른 곳에 친구가 앉아 있다고 해서. ” 녀석은 그 후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내내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편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자 시선들이 휙휙 돌려진다. 응? 방금 뭔가 위화감이... 하다가 나는 발견했다.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너 두고 보자의 주인공, 심술이 가득했던 녀석. 녀석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저 녀석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건가? 저 녀석의 경우, 그렇게 나를 괴롭혀댔으니 잊어버릴 수가 없는 거겠지. 친숙한 얼굴, 친숙했던 장소. “혹시, 현이 너도 기숙사야?”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순간 누구를 부르는 건지 헷갈렸다. 이 곳에서 이렇게 나를 부르는 이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김민현은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할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짧게 대답하자 얼굴이 환해진다. “그래? 잘됐다. 나도 기숙사거든.” ...너 공부 못했니? 집은 잘 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기숙사 면제 혜택을 못 받았다니. 나야 특별한 사정이 있었지만 말이다. “방이 가까웠으면 좋겠다. 몇호실이야?” 그러고 보니 방 번호가 뭐였더라? 듣긴 들었는데.... 아, 맞다. “ 128호실.” 툭 내뱉고는 예의상 민현에게도 물어봐 주었다. “너는 몇 호실인데?” 그러자 갑자기 김민현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그게.... 아하하, 실은 호실 번호가 잘 기억이 안 나.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줄게.“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수상쩍었지만, 나는 호실 번호도 잊어버린 김민현의 무안함을 생각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중에 꼬~옥 말해 줄게. 반은 어느 반이야?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이 녀석이 이런 놈이었던가? 내 기억속의 김민현이 바이바이~ 하면서 손을 흔들고 사라지고 있었다. 분명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바꿔치기? 녀석을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김민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털이 복슬복슬한 대형견이 연상되는게... “...9반.” “그래?” “너는?” 다시 김민현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하하, 그게.... 잊어버렸어.” ...녀석은 바보였다. 지루한 입학식이 끝나고 배정된 반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김민현이 조심스레 내 팔을 잡았다. “그, 그럼 먼저 들어가. 나중에 보자~!” ...이제 나는 김민현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어렸을 때에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한 카리스마 하던 녀석이 저렇게 변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녀석을 뒤로 하고 교실로 들어간 나는 역시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앞쪽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도 자리에 모두 앉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앞문이 열렸다. “ 아아, 모두들 왔습니까? 그럼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더부룩한 머리를 한 땅딸막한 키의 선생님이 들어와 담임이라고 자신을 소개 한 후 출석을 부르자 아이들이 조용해진다. 호명하는 것이 모두 끝난 후 담임 선생님은 시간표를 나눠 준후 학교의 중요 규칙들을 설명하고 하교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가방을 들고 나오려는데 순간 멈칫했다. 문 앞에 기대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다. -13- “ 오랜만이다.” 툭하니 내뱉는 녀석의 말에 그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 너 생각했던 거랑 똑같구나? 예전이랑 변한 게 없어.” 아니, 이게~! 오랜만에 만났다면서 지금 시비 거는 거냐? 나의 변한 모습을 녀석에게 구구절절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대신 입을 꼬옥 다물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아, 나쁜 뜻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만 인상 풀지?” ...나도 머리가 있는데 네 놈 말을 들을 것 같냐? “어쨌든, 나가서 애기하자? 여기서 다른 녀석들 구경 거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차, 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역시나 녀석과 내가 앞문을 차지하고 있어서 밖에 나가지 못한 탓인지 반 아이들이 모두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휙휙 돌리기는 했지만. 할 수 없이 나는 승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만 했다. 녀석의 등을 보자 뭔가 기분이 묘해진다. 지금 3년간 내 키도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승호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것 같다. 지금 내 키가 176이니까 저 녀석은 180이 넘는다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까 김민현 그 녀석도 나를 볼때 시선이 아래를 향했던 기억이 났다. 왠지 분해져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승호가 발을 멈춘 곳은 장미 정원이었다. 예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는 그 곳에 서서 승호는 나를 돌아보았다. 여유있는 그 모습에 왠지 화가 났다. “너 키 몇이야?” 다짜고짜 묻자 승호가 의아한 듯 대답했다. “ 183. 왜?” 으아악~! 분해, 분하다고~! 저 녀석에게 지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다. 빌어먹을 녀석, 대체 얼마나 먹어댔으면, 하고 꿍얼대면서 녀석을 보는데 승호가 왠지 이상했다. “ 너 그거 아냐? 지금 이게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보이는 관심이라는 걸?” ...이건 또 무슨 말이다냐. 뭐가 그리 좋은지 만면에 웃음을 가득 지은 녀석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녀석은 저렇게 말하지만 나는 녀석에게 관심이 아~주 많았었다. 다만 그 관심이라는 것이 안 좋은 쪽에 치우쳐서 그렇지. 매일 집에 와서 이불을 부여잡고 저 녀석을 어떻게 하면 몰래 죽일 수 있을까, 효과적으로 고문하는 방법 100가지 등등을 생각하곤 했던 과거가 다시 새록새록 피어났다. 녀석에 대한 과거의 원한과 함께. 살벌하게 굳어지는 내 표정에도 승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 너 아직도 차로 통학하냐?” “...기숙사다.” “뭐? 용케도...” 경악한 얼굴을 하더니 승호는 뭔가를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내 눈치를 보면서 표정을 싸악 바꿨다. “...뭐냐?” “하하, 아니 우연이라고. 마침 나도 기숙사거든.” 이럴수가, 내 어릴 적 인연 있는 녀석들은 수업 시간에 꿈(夢) 개론학에 심취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머리가 나쁜 녀석들만 내 주위에 있었다는 말인가. 경악스런 눈길로 승호를 바라보는데도, 녀석은 뻔뻔스럽게도 능글맞게 웃고만 있었다. “몇 호실?” 게다가 방 호실까지 묻는다. 녀석의 오만한 태도에 울컥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연히 말한다. “뭐야, 현이 너 설마 삐진 거냐?”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삐진 거라니, 삐지다니 대체, 누가, 어떻게? “ 아하하, 설마 어렸을 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너처럼 머리가 나쁜 줄 아냐? 그 처절했던 과거를 잊어버리게? “그 때는 나도 어렸었거든. 이것저것 거슬리는 것도 많았고, 또 내 감정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말이야. 미안해. “ 녀석의 말에도 나는 절대로 승호를 용서한다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면 법이 왜 필요해~!라고 속으로 선우 형의 말을 부르짖으며 침묵하자 녀석이 다시 씩 웃는다. “ 뭐, 너는 모두 잊어버렸겠지만 말이야. 설. 마 지금까지 속. 좁. 게 그런 일을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다고 믿어.” ...나는 속 좁은 놈이었다. 승호와 있으면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열받는다. 본격적으로 화를 낼 준비를 하고 녀석을 바라보는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이 평소와는 달리 유달리 진지한 빛을 띄고 있는 것을 알았다. 뭔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듯도 한, 아픈 빛을 띄고 있는 그 눈빛에 박력에 그만 기가 죽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쯤은 속 넓은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하, 역시. 그럼 내가 방까지 바래다 줄게.” 녀석은 잽싸게 다시 예전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돌아와 싫다는 나를 데리고 기숙사로 향했다. ...이게 기숙사? 호텔이 아니라? 내가 들었었던 기숙사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대화실이라는 명목으로 꾸며진 화려한 방을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복도에 서서 바라보면서 나는 정말 의아해졌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푹신한 까펫,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환한 조명. 넓은 복도 곳곳에는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있었다. 1층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서서 나는 녀석을 돌아보았다. “흐음, 128호실이라.” 승호는 내 방 앞까지 끈질기게 따라와 있었다. 작은 초록색 명패에 선명하게 쓰여진 128이라는 숫자를 보고 나는 녀석을 떠밀었다. “이제 가라.” 이제까지 나를 따라오면서 초등학교 동창이고, 가깝게 지냈던(대체 누가?) 사이이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는 녀석에게 나는 충분히 질려 있었다. “뭐, 좋아. 오늘은 이만 갈게. 내 방도 이 근처 일 것 같거든?” 녀석의 의미심장한 말을 뒤로 하고 나는 방문을 쾅 닫았다. 겨우 이제 막 오후가 되었을 뿐인데, 몸은 정신적 충격으로 피곤하기 그지 없었다. 이대로 씻고 그대로 자고 싶다, 라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휙휙 둘러본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눈 앞의 풍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손을 들어 눈을 휙휙 비비는데도 역시 변화는 없었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나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투명한 덮개가 하늘거리는 침대의 이불과 베개는 레이스가 가득 붙어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것까지는 그나마 나았다. 그저 기숙사에 대한 모든 것을 선우 형과 누나에게 맡긴 내 자신을 원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침대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엄청난 장미 꽃다발은 대체 뭐란 말인가? 떨리는 손으로 꽃다발을 이리저리 쿡쿡 찔러 보았다. 혹시라도 장미꽃이 변신 또는 합체를 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런 나의 손길에도 장미꽃은 굴하지 않고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 그 한 구석에 고이 꽂혀 있는 흰 카드를 나는 살며시 잡아 뺐다. [좋은 꿈 꾸렴. 현이를 사랑하는 우리가.] 이 말투는 설마... ...그저 내가 죽일 놈이었다. 엄청난 크기로 날 위협하는 장미 꽃다발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은 후 나는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물론 장미 몇 송이는 눈물을 머금고 빼내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나중에 미연 누나가 이 일을 잊어버릴 때쯤 해서 기필코 갖다 버려야지. 자고는 싶은데 정작 잠이 오지 않아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결국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실은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변해 있는 듯했다. 나의 기억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들이 어색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내가 변화했듯이 내 기억속의 존재들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 것이다. 10대의 3년이라는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 자신도 계속해서 변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힘들게 받아들였다. -내 나이 17, 고등학교 입학식 날 시간의 위력에 대해 깨닫다.- -14- -부제 : 선우의 육아일기- “이집트로 갈 거예요.”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없는 거야, 당신? 현이를 봐서라도 제발.” 그의 간곡한 말에 성미래 여사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 씨발, 그 새끼들 죽여버리겠어.” 씩씩대며 방망이를 들고 나가는 선우의 모습에 거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선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쓱하고 한번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방망이를 꽉 움켜 쥐고 주저없이 나갔다. 그런 선우의 뒤에서 미연은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죽이지는 말고, 무엇보다 꼬투리 안 잡히게 조심하는 거 알지?” “알아, 내가 어린 애야?”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황급히 달려오는 고용인들을 무시하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는 선우의 모습에 성 여사는 마음을 굳혔다. “갈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이제는 저도 못다한 제 꿈을 이룰 때가 됐다구요.” “허억, 그럼 나는 어쩌라구?” 윤성일 회장이 체통도 잊어버리고 성 여사에서 매달리자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미연이 깔깔대며 웃었다. “아버지, 이럴 때는 알아서 허락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예요? 솔직히 엄마도 오죽 밤이 외로웠으면 이랬겠어요?” 쯧쯧, 얼마나 부실했으면, 하고 윤 회장을 가엾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미연의 모습을 뒤로 하고 성 여사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모두 잘 있거라.” 하고 여행 가방을 끌면서 나가는 성 여사의 뒤에서 윤 회장은 눈물을 흩뿌려야 했다. “그래서 어쩌라구?” “어쩌긴, 어머니가 집을 나갔으니 막내를 돌볼 사람이 없어진 거지.” 태연히 말하는 미연을 선우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귀엽지 않은 녀석 , 이라고 혀를 차면서 미연은 싱긋 웃었다. “우리집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야? 열심히 해. 혹시 어딘가에 버려버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혹시라도 날 귀찮게 한다면 각오해야 할 거다, 라는 뜻을 전하면서 미연은 태연히 돌아섰다. “이, 이걸 돌봐...?” 경악스런 눈으로 선우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생물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약하게 보이는 괴생물체. 그 괴물은 선우가 자신을 바라보자 까르르 웃었다. 그것을 보고 선우는 직감했다. 앞으로 이 녀석이 자신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대체 왜 우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선우의 뒤에서 해원 아저씨는 안절 부절 못하고 있었다. “ 씨발, 우유도 싫고, 뭔가 싼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냐구~!” 선우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동생이라는 조그마한 물체는 그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지 아까부터 악을 써대면서 울고 있었다. 깊은 한 밤중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 선우는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 썅~!” 거칠게 내뱉으면서 선우는 아기를 번쩍 들었다. 단순히 이 녀석을 땅바닥에 내팽개쳐서 기절시키면 조용해지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순간 울음소리가 그쳤다. “...어?” 뒤에서 연신 선우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를 온 몸으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해원 아저씨를 무시한채 선우는 시끄러운 소음이 그친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래, 녀석도 울다 보니 지쳤겠지. 다행스러운 기분으로 아기를 내려놓자 다시 터져나오는 빼애액~ 거리는 울음 소리. “대체 왜 이래?” 이제는 소리 칠 기운도 없어서 멍하니 묻자 해원 아저씨가 잽싸게 와서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런데도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저, 선우 도련님, 한번 현 도련님을 안아 주시면...” 선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해원이 아니더라도 선우는 아기의 울음을 그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선우가 아기를 받아들자 다시 울음소리가 그쳤다. 아기는 너무 격하게 울음을 터뜨려서인지 켁켁 대면서도 선우를 향해 방긋 웃으며 침이 묻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왜, 왜 이래?” 선우는 이제 이 괴생물체가 무서워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 괴생물은 이제까지 다른 녀석들에게 했던 것처럼 때려서 해결 되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상한 행동을 일삼으며 커다란 울음 소리를 무기로 가지고 있었다. “선우 도련님이 좋으신가 봅니다. 손을 잡아 보세요.” 해원 아저씨의 말에 따라 선우는 아기의 손을 살짝 잡았다. 침이 묻어 매끈매끈한 손가락은 정말 작고 부드러웠다. “뭐야, 이거?” 선우는 작게 되뇌였다. 이 이상한 생물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어째서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여태 몰랐을까? 선우가 혹시라도 아이를 던지기라도 할까봐 옆에서 초긴장 상태로 지켜보고 있던 해원 아저씨는 선우의 부드러운 표정에 다소 마음을 풀었다. “ 현 도련님이십니다. 선우 도련님 동생이요.” 선우는 자신의 동생이라는 녀석이 정말 신기했다. 녀석은 사소한 일에도 쉴새 없이 울음을 터뜨렸으며, 선우가 관심을 가져주면 방실거리며 웃었다. 조그만 주제에 녀석이 얼마나 많이 먹는지도 알게 되었고, 의외로 고집이 세서 한번 울게 되면 선우가 와서 안아줄때까지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호오, 아직도 무사하네?” 신기한 듯 현이에게 다가와 말하는 미연을 보고 왜 갑자기 화가 나는지 선우는 잘 알 수 없었다. 이 조그만 녀석을 보게 된 후로 선우는 예전과는 달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유익했지만 이런 감정은 기분이 나빴다. “아니, 네 성격에 분명히 아이가 운다고 베개로 누르거나, 또는 어디에 던져 놓는다든가 하는 일이 생길 줄 알았거든.”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선우에게 아기를 맡겼단 말인가. 선우는 다소 기가 막혀서 미연을 사납게 쳐다보았지만 역시나 미연은 선우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오라, 이것 봐라?” 미연을 향해 현이가 방긋방긋 웃자 미연이 신기한 듯 현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 이것이 아니라 현이야.” 선우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미연의 행동이 순간 멈췄다. “뭐?” “내. 동.생.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찌르는 행동은 그만하지?” 사납게 으르렁대는 선우의 모습에 미연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내가 뭘 잘못들은 것도 같아서.” 너무 웃어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미연이 묻자 선우는 얼굴을 붉히면서 천장만 쳐다보았다. "으아아앙~!“ 시작됐다, 공포의 울음소리.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또는 방 안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울기 시작하는 현을 선우는 잽싸게 안아들었다. “그래, 그래. 울지마, 착하지.” 현을 토닥거리면서 연신 말하는 선우의 뒤에서 미연은 다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방바닥을 긁으면서 뒹굴고 있었다. 현은 머리가 굵어지면서 왜인지 선우를 피하기 시작했다. 선우는 정말 억울했다. 그저 녀석이 너무 귀여워서 같이 놀아 주었을 뿐인데 현이가 화를 내는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명칭만 해도 그렇다. 그저 녀석이 어렸을 때 많이 먹었던 기억이 있어, 돼지라고 불렀을 뿐인데. 게다가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는 깜찍한 모습에 바보라고 할 뿐인데 현이는 선우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것뿐이면 괜찮았다. 현이를 키운 것은 선우 자신인데, 현은 그 마녀같은 미연을 더 따르는 것이 아닌가. 선우는 마치 남편에게 버림받은 본처의 심정이 된 듯 했다. 그렇다고 투기를 내세워 미연을 상대하기에는 선우라고 해도 후환이 두려웠다. 그래서 선우는 눈물을 머금고 미연과 같이 공동 전선을 펼치기로 했다. 미안하다, 현아. 이 마녀를 없애지 못하는 나를 원망해라. 선우는 대신 현이에게 몰려드는 수많은 벌레들을 퇴치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이대로 곱게 키워서 자기 손으로 결혼을 시키고 옆에서 데리고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주제에 보는 눈들은 있어서 녀석들은 안심할 만하면 나타났고, 선우는 그런 벌레들을 찾아가 약간의 회유와 협박을 가해 주었다. 물론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녀석들은 주저하지 않고 친히 몸을 사용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우의 걱정은 현이였다. 역시 그 가정교사가 원인이었어, 하면서 선우는 분노로 주먹을 쥐었다. 어렸을 때 감히 현이에게 손을 댔던 가정교사는 실력도 없었는지 어린 아이에게 책 외우기를 시킨 것이다. 현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의 말을 대부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 바로 이 주입식 교육의 폐단 때문이라고 선우는 생각하고 있었다. 현이가 머리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날고 기는 녀석들이 모인 명성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다만 선우는 현이가 수학 문제집을 펼치고 문제와 식을 외우던 광경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을 뿐이었다. 현이의 여자친구라고 뻔뻔스럽게 찾아온 여자를 보고 선우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현이의 형이며, xx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자 단번에 변하는 여자의 얼굴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굳이 집안의 배경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후광에 다른 이들이 불나방처럼 날아오곤 하는 것도 익숙했다. 그래서 선우는 더욱 화가 났다. 이런 평범한, 속물같은 여자가 그 순진한 녀석을 어떻게 꼬신건지. ...설마 선을 넘은 건 아니겠지? 하다가 더 이상 생각을 했다가는 스스로를 못 참을 것 같은 기분에 선우는 현이를 올려보낸 후 여자를 쳐다보았다.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은근슬쩍 다리를 드러내 유혹하는 여자의 모습에 선우는 차갑게 웃었다. ...그 일로 현이의 미움을 살 줄 알았다면 어쩌면 선우는 좀더 다른 방식으로 일을 처리 할지도 몰랐다. 선우는 정녕 몰랐다. 아직 어린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감싸고 돌기에만 급급했지, 현이가 설마 친구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을 줄이야. 사람들을 풀어 현이가 없어진 지 거의 10시간 만에 현이의 소재를 파악해 헐레 벌떡 달려가면서도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미연의 꼬임에 넘어가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술술술 부는 현이의 옆에서 선우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남몰래 울어야만 했다. 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냐~. 서운해하면서도 선우는 현이가 힘들어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술잔을 부여잡고 훌쩍거리는 선우의 모습에 선재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드디어 헛것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사라졌다. 옆에서 같이 훌쩍거리면서 손수건을 건네주는 미연에게 현이를 맡기고 선우는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냐?”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으르렁거리는 선우에게 복도에 기대 있던 차이나 드레스의 여자가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저 분이 그 아끼신다는 동생 분이신가요? 뭐랄까, 생각과는 굉장히 틀린 분이시네요.” “꺼져.” 더 이상 눈 앞의 여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선우는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그러나 그녀, ‘카나하라 유키’ 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유키의 손은 선우의 셔츠를 풀고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소중한 동생분이 있으신 곳에서는 싫으신가요?” 자조적인 어조로 선우의 귓가에 대고 말하면서 유키는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하지만 이 곳은 생각과는 다른 것 같네요.” 어느새 선우의 바지 버클을 푼 유키의 손은 어느새 나른한 동작으로 선우의 중심을 애무하고 있었다. “씨발.” 선우는 냉정한 눈길로 유키를 응시하며 거침없이 손을 휘둘렀다. 퍼~억. 거친 타격음과 동시에 유키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흥.” 고개를 쳐든 유키의 눈속에 애써 감춰진 독기를 선우는 그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입안이 터졌는지 유키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소중한 동생에게 내가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 화사하게 웃으며 유키는 이를 갈았다. “당신도 바닥에서 기면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일까? 소중한 이에게 처참히 버림받았을 때의 기분을 당신은 평생 못느끼게 할 줄 알았는데-. ” 유키는 말을 차마 끝맺지 못했다. 선우는 유키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췄다. 애써 시선을 피하는 유키의 눈에 선우의 손에 어설프게 감긴 푸른 손수건이 비췄다. 주인의 향기를 뿜어내듯 손수건은 군데군데 .피가 묻었음에도 깨끗하고 정갈하게 보였다. ...나는 절대로 저런 모습이 되지 못하겠지. 유키는 아까 본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자리잡은 하얀 얼굴과, 까만 머리카락과 너무 예뻐서 시리게 빛나던 눈동자. 굳이 소년을 소중하게 감싸는 선우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소년의 주위에 후광처럼 풍기는 고아하고 단아한, 청량한 정취는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마치 너희들과는 혈통이 다르다고 말하는 듯한 아름다운 소년, 그리고... 다시금 습관처럼 까만 어둠이 유키의 눈 속에 내려앉았다. 선우는 그런 유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독아를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그럴 경우 충분한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처절하게 깨닫게 될 테니까. 만약 현이, 내 동생에게 접근이라도 한다면-.“ 선우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진득한 살기에 유키는 저절로 떨리는 몸을 애써 다잡았다. “이미 밑바닥까지 추락한 나에게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를 갈며 말하는 유키의 뺨에 선우는 망설임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절망의 밑바닥 밑에 뭐가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지.” 휘청거리는 유키의 턱을 놓으며 선우는 소중히 손수건을 만졌다. 이제 선우의 관심은 확연히 유키에게서 떠나 있었고, 선우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15- ...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녀석들이 여기에 있는 거지? 조금 전 내가 녀석들에게 힘겹게 그 사실을 묻자 녀석들은 경쾌하게 “ 당연히 이 반으로 배정됐으니까.”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너네 어제는 없었잖아? 경악해서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호와 민현은 서로 눈싸움을 하는 데 여념없었다. 서로 같은 반이 됐다는 게 무척이나 반가웠나 보다. 하긴 중학교 3년 동안 같은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싫어도 친해지기 마련이겠지. 다시금 녀석들과 나의 차이를 깨닫는 듯 해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녀석들이 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더 친밀한 대화를 나누도록 해 주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양 옆에서 손들이 동시에 턱하고 나와서 내 옷자락을 잡는 것이 아닌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승호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너. 대체 어디 가는 거야? 설마...” “내가 피해 줄 테니까 둘이 같이 앉아서 애기 나누라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서로에게 애타는 눈빛만 보내지 말고, 라고 덧붙이자 승호와 민현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끔찍한 것이라도 보는 것 마냥 갑자기 시선을 서로의 반대쪽으로 두는 것이다. 쑥스러워하나? 고개를 갸웃하며 아직도 내 옷을 바라보고 있는 손을 바라보자 승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여기 앉아. 나 저녀석이랑 하. 나. 도 안 친해.” “맞아, 그러니까 현아, 여기 앉아.” “..현이?” “그럼?” 아아, 다시금 민현과 승호는 서로를 열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기, 너네 다른 아이들이 이쪽만 보고 있는 거 알고 있냐? 그리고...왠만하면 내 옷은 놓아주면 안 될까? 수업시간은 악몽이었다. 김민현 그 녀석은 어릴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산만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쪽을 보면서 헤실거리며 웃곤 했다. 승호가 앉은 쪽에서 불타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승호와 서로 웃어주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또 민현은 나에게 이 펜이 잘 써진다며 고급스런 만년필을 쥐어 주기도 했다. 녀석, 아직도 잘난 척 하는 버릇은 버리지 못했나 보다. 반면 승호 쪽은 어지간히 민현과 앉고 싶었는지 계속해서 뚫어지게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까 내가 비킨다고 할 때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지. 점심시간에도 나는 두 녀석에게 이끌려 식당에 갔다 와야만 했다. 점심 시간의 식당 메뉴 중에서 내가 고른 것은 새우 튀김 우동이었다. “흐음, 현이는 면류를 좋아하나 보네?” 서글서글 웃으면서 민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 옆에서 승호가 아무 말 없이 식권을 사서 나 대신 내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 설마 신종 괴롭힘인가 싶어 나는 승호의 눈치를 살피며 “저기, 식권...” 하고 말을 꺼냈지만 승호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가쓰오 우동을 시켜서 자리에 앉았다. “괜찮으니까 그냥 먹어.” 괜찮지 않아, 너한테 신세지는 것은 싫다구~! “ 우동 다 분다.” 승호의 냉정한 한 마디에 나는 냉큼 승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 민현도 음식을 받아 내 옆에 앉았다. 민현이 들고 있는 음식을 보니 해물라면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 앞으로 숟가락이 쓱 내밀어졌다. 우묵한 숟가락에는 통통한 우동 가락이 가득 얹어져 있었다. “맛있어. 멋어봐.” ...이 녀석이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경악해서 바라보는데도 승호는 내밀고 있는 손을 그대로 꿋꿋이 유지하고 있었다. 앞에 내밀어진 숟가락의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이제는 차라리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옆에서 민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현이가 싫. 다. 잖. 아? 그만 하지 그래?” ...그래, 저렇게 너를 좋아하는 민현이에게나 주란 말이다. 하지만 승호는 그런 민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윽, 역시 저 녀석이 식권을 사 줄 때부터 알아봤어.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히다니. 괴로운 마음을 참으며 승호를 애타게 바라봤지만 승호는 그저 말없이 나를 보기만 한다. 할 수 없이 나는 내밀어진 숟가락을 받아 담겨진 우동을 되도록 빨리 후루룩 먹었다. “맛있어?” 나를 보며 묻는 녀석에게 차마 체할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 현아, 이것도 맛있어. 한 번 먹어 봐.” 옆에서 불쑥 내밀어진 숟가락에는 해물과 같이 얹어진 라면 가닥이 있었다. 제발 날 혼자 내버려 둬.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나는 우동을 반도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역시 미연 누나의 말대로 혼자서 있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다. 교실로 들어가 책을 펼치자 뒤늦게 승호와 민현이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점심 먹고 운동 같은 건 안해?” 어서 나가라는 뜻을 매우 우회적으로 돌려서 묻자, 민현의 눈이 반짝했다. “왜? 나가고 싶어?” 아니, 네가 나가는 걸 보고 싶어.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민현이 씩 웃었다. “그렇지? 하긴 너는 예전부터 움직이는 건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하고는 또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현아, 뭐라도 사다 줄까?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또 나는 이미 아까 전 승호의 일로 인해 남이 나에게 무언가를 사준다는 것이 상당히 무서웠다. 고개를 젓자 민현은 그대로 앉아서 수업시간에 했던 그대로 날 보며 미소짓기를 계속했다.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단 하나만을 간절히 생각했다. 내일은 반드시 일찍 와서 나 혼자 앉아야겠다. 그러면 민현과 승호는 그렇게 바라 마지 않던 둘이 같이 앉기를 할 수 있겠지. 수업이 끝나서 기숙사로 가기 위해 교실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문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 이 반 대표가 누구지? ” 일단의 무리가 우루루 들어오더니 교탁 앞에 서서 말하자,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이, 그런데 이봐? 왜 내 쪽을 보는 거지? 아아, 아니구나. 내 옆에서 민현이 벌떡 일어났다. 과연, 이 녀석이 반장이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민현은 어렸을 때에도 반의 중심이 되는 녀석이었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망가졌지만 말이다. “선배들, 지금 이렇게 오시면 곤란합니다. 그 녀석이 학기 초부터 성실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거라고는 설마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 그러자 앞에선 선배들은 서로 웅성거리더니 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 정도 일은 이미 알고 있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거다. 그 녀석 사촌이 이 반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자 갑자기 승호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쓸데없는 일로 소란을 피우실 정도로 심심하시다면 제가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선배들이 조용해진다. “너와는 상관없잖아? 언제부터 네가 그 녀석 편을 들었지?” 아까 말했던 선배가 나서서 말하자 승호는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왠지 육식 동물이 먹이를 노리기 전의 동작처럼 긴장감이 넘쳤다. “ 앞으로도 그 녀석 편을 들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헛소문을 다시 입에 올리시면 그 때는 저도 제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에 선배들은 가만히 승호를 노려보다가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다. " 너와 연관되지 않게 주의시켜.“ 민현이 승호를 노려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하자, 승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현이 나에게 고개를 돌려 예의 사근사근한 웃음을 지었다. “ 현아, 기숙사로 안 갈 거야?” 아까 승호에게 말할 때의 살벌한 모습에서 갑자기 변화한 그 모습에 놀라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오자 승호와 민현이 내 뒤를 나란히 따라나왔다. “그래서 이게 너네 방이라고?” 이럴 수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처음 민현과 승호가 기숙사로 같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 생각 없었다. 녀석들이 기숙사라는 것은 저번에 들은 사실이니까. 녀석들이 나와 같은 1층 오른쪽 복도로 걸어올 때는 혹시나 했다. 그런데 녀석들은 경악스럽게도 내 옆방에서 멈춰서서 나를 보고 씩 웃는 것이다. “응. 참 신기한 우연이네.” 민현의 말에 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당황스럽다. “내 방은 126호니까 언제든지 놀러와.” 승호의 말에 민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 난 127호야. 심심할 때 놀러가도 돼지?” 민현이 어째서 이겼다~, 라는 표정으로 승호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잘 알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는 듯한 교감이 파바박 오고간 듯한 느낌이 든다. 민현의 말에 승호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놀러오지 마.”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사생활 까지 방해받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내 말에 승호는 주먹을 피면서 씩 웃었다. 그리고 민현은 갑자기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가끔씩도 안 돼?” 그건...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승호 녀석이 옆에서 다급히 말했다. “나도 가봐도 돼?” 넌 오지마, 라고 말했을 때의 녀석의 반응이 궁금해졌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들어서자 새삼 피곤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간단하게 씻고 나오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의아해져서 문을 열자 승호와 민현이 서 있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불렀지.” 하아? 너희들과 또 같이 밥을 먹자고? 울고 싶다. 미연 누나의 말대로 기숙사 생활은 과연 험난하고 힘들었다. -16- 매일 두 녀석 때문에 잠을 설쳐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다. 애초에 가끔씩 놀러오기로 했던 걸로 아는데 녀석들은 거의 매일 밤마다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내가 어렸던 시절 나에게 이렇게 대했다면 그 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지금와서 녀석들이 나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거기다가 밤마다 전화해서 온갖 것을 다 물어보는 선우 형도 내 피곤함에 한 몫 했다. 세상에, 어떻게 통화를 2시간이 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몇시에 화장실을 간 것까지 말을 해야 했다. 개학 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점점 더 드는 피곤함에 기숙사에 돌아오면 그대로 쓰러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아침 8시까지 교실에 등교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우리 학교는 보충 수업은 하지 않았지만 자율학습이라는 명목으로 8시 등교를 자. 율. 적. 으. 로 권하고 있었다. 물론 8시에서 늦게 도착할 경우 합당한 벌이 가해지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풀리지 않는 피곤함에 매일 학교의 가운데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며 이를 득득 갈 수밖에 없었다. 명성 고등학교는 교실에서 지각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교문에서 아이들을 잡는다. 선두부들이 일려로 쭉 늘어서서 손에 펜과 종이를 들고 지각생을 잡는데,이 때 선도부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그 시계였다. 매 시 정각이 될 때마다 시계에서는 한 쪽 발을 든 발레리나가 빙그르르 돌면서 나와 “오 솔레미오~”를 부르면서 들어간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것이 학생들을 고문하기 위한 학교측의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역시 진위는 확인 불가능했다. 학생들은 원념을 담아 이 발레리나를 ‘루치아노 빠가로티’ 로 부르고 있었다. 애당초 일찍 학교에 와서 승호와 민현이 녀석들을 피해 앉아야지, 했던 것은 나의 섣부른 생각이었다. 헐레벌떡 시간에 쫓기면서 기숙사의 방문을 열면 승호와 민현은 내 방문 앞에서 빙그레 웃으며 서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아~! 하고 절규하다가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중요한 것은 내가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가면 된다는 거지. 교실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녀석들을 이번에야말로 떼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그 공포스러운 식사 타임도 없앨 수 있게 되겠지.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피곤함으로 축축 늘어지고 있는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무리라는 거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했다. 내가 일찍 갈 수 없다면 시간을 늦추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잠도 조금이나마 더 잘 수 있겠지.(실은 이것에 더 끌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후훗 웃으면서 기숙사 책상에 앉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아, 아련하게 루치아노 빠가로티가 8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 올 때 하늘에 밝은 해는 비치인다.] 루치아노 빠가로티는 열심히 자신의 노래실력을 뽐냈다. 참아야 되느니~, 하면서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오 나의 나의 해님 찬란하게 비치인다.] 딱 여기까지 참았다. 그 뒤에 루치아노 빠가로티의 반복되는 후렴구를 들으며 나는 미친 듯이 서랍을 뒤졌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봤는데. 옷장 서랍 속에서 상자를 꺼내고 그것을 열어 본 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얼마 전 이 상자를 슬쩍 열어 보고서 잘 못 본 거겠지, 하고 뚜껑을 닫았었는데 역시나 내용물은 그 때와 똑같았다. 튼튼해 보이는 굵은 밧줄과 각종 드라이버들, 묵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망치와 스패너, 커다란 대못과 급기야는 전기 충격기까지 발견하고 그저 손끝을 떨고만 있는데 종이 쪽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현아, 위급할 때 사용하렴.] ...이런 것들을 사용할 위급한 경우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뭐,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나는 밧줄과 드라이버들을 손에 들고 흐흐흐 웃었다. 저 놈의 시계를 내가 가만 두나 봐라! 빼꼼히 기숙사 문을 열고 혹시 민현이나 승호가 있을까봐 주위를 살핀 후 나는 옷 속에 연장(?)들을 감추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들키면 안 되나니. 조심조심 학교까지 걸어가서 사사삭 계단을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놀라서 벽에 몸을 붙인 후 그 쪽을 살펴보니 3학년 학생들인 것 같았다. 고 3이 대체 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지? 라면서 나는 잠시 궁금해 하다가 선우 형은 어디까지나 특이 경우라는 것을 떠올렸다. 불쌍한 고 3들, 하면서 잠시 묵념하다가 저들의 모습이 나의 미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자 암울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지금 내 모습에 대한 회의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서 있는 거지? 물론 막무가내로 뛰쳐나올 때야 나름대로 열에 받쳐서 그랬지만 지금 이 곳에 도착하고 보니 무척이나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혹여나 이 사실이 전교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창피함에 이 나라를 떠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대로 돌아갈까 하면서 망설이고 있는데 고 3 선배들이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펴 보았다. 한 손에 든 밧줄과 다른 손에 든 망치, 그리고 앞쪽 셔츠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각종 드라이버. 왠지 훌륭한 도씨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은가. 선배들과 마주친 후 “전기 수리하러 왔는데요.” 라는 식의 말이라도 해 볼까 망설이고 있는데 선배들 중 한 명이 낯이 익은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 반에 들어와서 승호와 이상한 말을 주고받았던 선배였다. ...설마 나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겠지. 이성은 그럴 리 없다고 하는데도 어느새 나는 살금살금 물러나고 있었다. 점점 좁혀 지는 거리를 공포에 질려서 쳐다보다가 나는 결국 계단을 후다닥 뛰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뛰면서도 나는 혹시나 선배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날 쫓아올까봐 겁이 나 발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멈춘 것은 제일 꼭대기, 학교 옥상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헉, 허억.”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잠시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차린 나는 내 눈앞의 회색 철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럴리 없겠지만 철문이 나에게 ‘이리와, 이리’ 하면서 손짓을 하는 것 같다. 에잇, 여기서 조금만 쉬다 가자. 철푸덕 주저앉는데 기분이 근질근질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는 것은 아까워~, 라는 소리가 귀 주위를 맴돈다. 아아, 그래서 나는 넘치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하지 못해 평생 후회하게 되는 일을 하고야 말았다. 끼익~. 철문의 손잡이를 두근대는 마음으로 잡을 때도 설마, 하는 심정이 있었다. 설마 문이 열릴까, 하는. 그런데 그런 내가 무색하게 철문은 약간의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면서 쉽게 열렸다. 두근두근 대는 마음으로 혹시 하면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어두운 밤 하늘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길다란 소형 후레쉬를 꺼내 옥상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옥상으로 들어갔다. 옥상에는 물탱크가 한 구석에 설치되어 있었고, 한 쪽에는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버려진 담배꽁초와 과자 껍질도 간간히 눈에 띈다. 터벅터벅 옥상 난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 망할 시계가 있는 곳을 눈대중으로 가름해 보니 이 정도는 충분히 올라 올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둘둘 말려 있는 밧줄을 풀어서 옥상 물탱크 쪽에 걸어갔다. 밧줄 길이가 길어서 다행이다. 밧줄의 한쪽 끝을 물탱크의 사다리 쪽에 단단히 묶고 밧줄을 끌고 시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나는 손에 밧줄을 단단히 감고 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반사적으로 밧줄을 힘껏 잡고 미끄러질 뻔한 몸을 애써 추수려 벽돌 사이에 발을 끼어 넣었다. 헉, 무척이나 힘들다. 게다가 이렇게 밧줄에 매달려서 시계를 보니 시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족히 1m는 될 것 같은 시계의 위용에 나는 시계를 들고 옥상에 올라간다는 계획을 저 멀리로 날려버려야 했다. 다시 끙끙대며 밧줄을 타고 올라간 후 나는 두 번째 작전을 시도했다. 최대한 몸을 뻗쳐 시계의 윗부분에 밧줄을 묶고 끌어 올리는 것이다. 몇 번의 투신 자살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겨우 시계 윗부분에 밧줄을 묶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접착제로 붙여 놓기라도 했는지, 아무리 당겨도 시계는 요지부동도 하지 않았다. “헉, 허헉.”‘ 입에서 가쁜 숨이 뿜어나왔지만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제 오기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승부다. 있는 힘을 다하자 뒤에서 누군가가 내 허리를 붙잡고 쑥 잡아당겼다. [드르륵]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시계가 옥상으로 끌어올려졌다. “허억, 헉, 고마워.” 나는 조력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망할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꽉 붙잡고 살피자, 시계의 등 뒤가 나사로 꽉꽉 조여진 것이 보인다. 후훗, 이럴 줄 알고 드라이버를 가져오길 잘했군. 나는 다양한 드라이버 스페셜 세트를 꺼내서 나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건지 물어봐도 돼?” “시계 분해.” “그건 보면 알겠어. 좀 더 정확히 왜 시계를 분해하는지 궁금한데?” 나는 옆에서 자꾸 시끄럽게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후레쉬를 찾아서 시계를 비췄다. 후우, 이제 조금 잘 보이는군. 열심히 시계를 분해 한 후 떨리는 손으로 시계의 태엽을 조심히 감았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아침 시간이 10분만 연장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소박한 소망이다. “후우~.” 일을 끝낸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완벽한 뒤처리를 위해 나는 열심히 시계의 등 뒤를 나사로 조여주기 시작했다. “응? 나사가...” 나사 하나가 모자라는 듯 해 후레쉬로 옥상 바닥을 비추면서 손으로 더듬자, 커다란 손이 옆에서 불쑥 내밀어졌다. “ 이거 찾아?” “아, 응. 고마...” 무심코 말하며 상대를 올려다보다가 나는 그만 굳어 버렸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한 남자가 그런 나를 보고 즐겁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러자 10분 늦게 돌려진 시계에서 루치아노 빠가로티가 나와서 9시를 알리며 열연을 하기 시작했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신이시여~! 대체 왜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내 인생에서는 지금 막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17- 몸을 굳힌 채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 남자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긴장하고 있던 상태여서, 그 웃음 소리에 나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을 늦춰서 어쩌려는 건지 궁금한데?” 내가 그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천천히 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가 그것을 입에 물고 찰칵 하고 불을 붙이는 모습에 그것이 담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에 물린 담뱃불은 기괴한 음영을 만들며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것은 갑자기 확연히 변한 남자의 살벌하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후우, 내가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말야. 이 곳 명성의 재단 이사장이 현 야당 총리인 손종길 의원의 처갓집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 나는 몰랐다. 내가 박력에 밀려 고개를 젓자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 뭐,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아무리 그 상대가 학생이라고 해도 그런 사정을 봐주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게다가 현 재단 이사장인 천 회장님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이거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가차없으신 분이지. 혈육에게도 잔인하신 분이니까.” 허억, 그런 애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건데? “뭐, 나도 설마 시계 하나 훼손했다고 학생을 건드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 시계가 영국인 장인의 손에 의해 특별 제작된 거라고 해도, 회장님의 개인적인 사연이 어려 있는 거라고 해도 그러기야 하겠어?” “...” “게다가 윤 현 너네 집도 가만 있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라고 남자는 가벼운 목소리로 날씨이야기를 하듯이 이야기했다. “대신 이사장으로서 퇴학 정도 시키고 말겠지,뭘.” 빙글 몸을 돌리며 척척척 걸어나가는 녀석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다다다 뛰어가서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데도 나는 차마 남자의 팔을 놓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바빠.” 남자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 나는 안 나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냈다. 이미 나의 머릿속은 오래전에 자체 파업에 들어가 있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가는 귀가 먹어서, 라고 지껄이는 남자에게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며 다시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글쎄? 그걸 지금 나한테 강요할 입장은 아니잖아?” 남자는 오만하게 나를 흩어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이 남자가 지금 내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엄습하는 수치심에 나는 뺨을 붉혔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남자가 담뱃재를 손끝으로 툭툭 털더니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대체 시계는 왜 돌려 놓은 건데?” “...” “간다.” 주저없이 다시 몸을 돌리는 남자를 보고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 아침에!” “...” 빤히 나를 바라보며 말을 재촉하는 남자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학교에 늦게 나오고 싶어서.” “...십분?”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손에서 담배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앗~! 이것은? 잽싸게 발을 가져가 불이 붙어 있는 담배를 꾹꾹 눌러주었다. 혹시 불이라도 나면 그것까지 뒤집어쓸지 모른다. “...꽤나...” 그런 내 모습에 남자는 멍하니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혹시나 용서해준다는 말이라도 있을까봐 귀를 곤두세웠지만 그 말은 곧 끊겼다. “뭐, 나도 별로 말 할 생각은 없어.” 그, 그럼? 눈을 반짝이며 남자를 열렬하게 쳐다보자 남자는 한순간 주춤하더니 갑자기 내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유혹하는 걸로 보이는데.” “....?”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는 곧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유혹하는 거 맞아.” 맞다. 이것은 유혹이었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흠칫했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진다. “...그래?” 화가 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 앞의 이 남자는 갑자기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눈초리에 몸이 묶인 듯 손가락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소원대로 해 주지.” 비웃듯이 말하고는 그는 내 몸을 거칠게 끌어안고 얼굴을 갖다대었다. 상황 파악을 아직도 하지 못해, 어버버 하고 있다가 서로의 입술이 부딪혔을 때에야 나는 격렬히 반항을 시도했다. 두 팔로 그의 몸을 거세게 밀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팔로 내 손목을 모아 쥐고 벽 쪽으로 밀어 붙였다. 콰당,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부딪친 등판이 얼얼하게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남자의 한쪽 손이 그대로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더니 머리가 뽑힐 듯이 뒤로 젖혀졌다. “흐읍” 아픔에 고개를 젖히며 신음 소리를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 속에 혀가 밀려들어왔다. 불쾌하다. 기분나빠. 움직일 수 없는 몸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빠져 나오려 발버둥쳤지만 소용 없었다. 오히려 내 몸이 지칠 뿐이다. 점차 숨이 막혀와 눈 앞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내 사정을 모르는 듯 남자의 혀는 내 입속 여기저기를 핥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지막 힘을 모아 왼쪽 다리로 남자의 정강이를 찬 후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18- 다시 눈을 뜬 것은 기절하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그림자에 의해 윤곽만 확실히 보이는 그 남자의 모습이다. 제길, 하고 생각했다. 콜록거리면서도 나는 최대한 남자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추슬러 세웠다. 그런 내 모습을 남자는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의 광포한 분위기가 마치 거짓말인 양 어느새 남자는 점잖은 신사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에게 손까지 내밀어 주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당당히 일어나 주려고 하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이대로 바닥에 부딪치겠군, 하면서 눈만은 보호하자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자 커다란 손이 내 몸을 지탱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고맙다는 생각보다 그 손이 나에게 닿는 것이 싫다. 화들짝 몸을 떼려는데 녀석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너, 처음이냐?” ...뭐가? 시계 분해한 거? 눈을 멍하니 굴리다가 뒤늦게 녀석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자 녀석이 순순히 팔을 풀었다. “ 혹시... 아까 유혹한다고 했던 말이 무슨 말이야?” 유혹이라는 그 말을 녀석이 다시 하자 나는 기절하기 전까지의 상황이 다시 눈앞에서 리플레이 되는 것을 느꼈다. 퇴로를 찾아 눈을 굴리며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기자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 시계는 천 회장님이 유달리 아끼시는 것이었지. 아아, 천 회장님이 2년 전에 내 앞에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어떤 사람에게 골프채를 휘둘러 멀쩡한 견갑골을 부러뜨렸던 게 생각나는군.” 움찔. 그, 그래도 저 녀석은 위험하다, 라는 확신에 따라 나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옥상 문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 그런데 윤 회장님은 잘 계셔? 가엾게도, 막내 아들이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는 것을 아시면 충격 좀 받으실 텐데.” 우리 아버지를 알아? 아니, 떠올려 보면 저 녀석은 아까도 분명히 내 이름을 불렀었다. 아니, 아니, 아버지가 내가 퇴학 당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시는 것을 느끼며 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원해?” 최대한의 평정을 가장하고 녀석에게 묻자 녀석이 태연히 말했다. “ 아까 한 그 말이 무슨 뜻이지?” ...크아아악~! 정말로 끈질긴 놈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순순히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언가를 미끼로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행위.” “....?” “유혹이란 그게 아니었던가? 그래서 네 녀석이 원한다면...”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이 더욱 내 긴장감을 높여주었다. 절대로 이러고 싶지 않았건만,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사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 르메르트의 [연극 인상기] 초판본을 빌려 줄 수도 있어.” 녀석은 대꾸 하나 없이 조용했다. 하다 못해 움직이지도 않았다. 에잇~, 쪼잔한 녀석 같으니! “아, 알았어. 그냥 줄게.” 눈물을 머금고 말하는데도 역시 반응이 없다. 아니, 이런 날강도를 봤나, 그건 무려 고전적(古典籍)이라고~! 환상의 도서라고 불리는 그 책을 갖기 위해 내가 선우 형에게 마음에도 없는 아양을 얼마나 부렸는지 녀석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 그래. 정 원한다면 내 F.페트라르카나의 서도 줄 수 있어, 아하하.” “....” “흑, DNYZ의 SC시리즈 3호인 손목 시계도 얹어 줄 수 있어.” “...” “... 로스 와이저의 체스판도 줄게.” “....” “...물론 체스 말도 당...연히 줘야지.” “....” “....” 저, 저녀석은 대체 얼마나 갖기를 원하는 걸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나의 보물 목록은 이미 그 끝의 여백만을 팔랑거리고 있었다. “크큭, 푸하하하.”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일종의 섬뜩함마저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 보물 목록이 마음에 들었으니 저렇게 기뻐하는 거겠지. 아끼고 아꼈던 보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냉정해지기로 했다. “큭, 그런 건 필요 없고. 다만...” “다만 뭐?” 설마 현금을 원하는 걸까? 만약 돈을 원하는 거면 차라리 카드로 준다고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하며 의심쩍은 목소리로 되묻자 녀석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필. 요. 로 할 때마다 말이야” “...알았어.” 솔직히 나에게 도움을 받으면 얼마나 받겠는가.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순진하게 나에게 그런 것만 요구하고 마는 녀석이 불쌍해졌지만, 나는 아까의 괴씸한 일도 있고 해서 녀석에게는 절대 그 사실을 알려주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 “그럼 말 안 하는 거지?” “그래. 네가 약속을 지.키.는 한은.” 녀석의 말에 안심한 내가 옥상을 나가려 하자 녀석이 내 팔을 턱하고 붙잡았다. 나는 순간 반사적으로 팔을 세게 휘둘러 녀석의 손을 떨궈냈다. ...뭐지? ...녀석이 내 손을 꽉 잡은 순간 갑자기 아까의 기억이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갑작스런 나의 반응에 내가 더 놀라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녀석 이 이 일 때문에 삐져서 딴 소리를 하면 나만 곤란해진다. “아아, 저 시계는 저대로 두고 갈 거야?” “...” 맞다, 시계~! 잊고 있었던 시계는 옥상 바닥에 외로이 누워 있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나사도 하나 껴야 하는데. 한탄하며 다가가 건전지가 다 되가는지 깜박거리는 후레쉬를 들고 겨우 나사를 끼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루치아노 빠가로티가 나와서 빙글빙글 돌면서 열심히 ‘오 솔레미오’를 들려주었다. ...나는 평생 이탈리아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시계를 벽에 다시 거는 작업은 들어올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시계를 벽에 거는 동안 녀석은 거들어 줄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얄미운 녀석 같으니. 지친 몸을 이끌고 옥상을 나가서 기숙사로 향하는데 뒤에서 녀석이 졸래졸래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같아서는 멈춰서서 녀석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미 기숙사 점호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기숙사에 도착한 후 점호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엄청난 기세로 누군가가 다다다 달려왔다. “현이,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아니, 그리고 지금 모습이...혹시...” 나를 보고 하얗게 질린 민현을 보고 대답하기도 귀찮아진 나는 다만 고개를 흔들고 걸음을 옮겼다. “너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느새 달려온 승호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아아, 난 지금 어서 쉬고 싶다고. 그런데 내 앞에 커다란 손이 나오더니 내 몸을 뒤로 잡아끌었다. “오랜만이다. 이승호. 그리고 김민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있었다. 이 녀석은 대체 왜 기숙사까지 따라온 걸까? 설마 녀석도 기숙사생? “네가 여긴 웬일이지, 박민준?” 눈동자에 확연한 경계의 빛을 띄우면서 승호가 녀석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아는 사이? 버둥거리자 녀석의 팔이 더 큰 힘을 가지고 내 몸을 옥죄었다. “아아, 실은 현이는 나와 만나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느라고 늦은 거거든. 뭐,여기에 왜 왔냐고 묻는다면 현이와 앞으로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고 대답해주지.” 뭐시라? 나와 같은 방을 써? 경악해서 버둥거리는 것도 잊고 있는데 민현이 소리를 빽 지른다. “현아, 설마 이제까지 저 박민준 녀석과 같이 있었던 건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냐? “훗,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보냈지.” 느끼하게 말하는 녀석의 말에 승호와 민현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 아무에게도 말 못할 시간을 가진 건 확실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그래서 지금 현이 몸이 많이 안 좋거든. 들어가서 쉬었으면 하는데 이만 비켜주지 않겠어?” 녀석의 말에 승호와 민현이 비칠비칠 물러선다. 이제라도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냉큼 내 방을 향해 들어가자 녀석도 따라 들어왔다. “넌 왜 여기 들어오는 건데?” 나는 박민준이라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아까 어두운 곳에서는 그저 덩치 큰 녀석, 이라고 밖에 인식되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밝은 불빛에서 본 녀석의 외모는 상당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염색이라도 한 건지 적갈색을 띄고 있는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남자다운 굵은 눈매와 보기좋은 선을 그리는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187정도 되 보이는 키가 아니더라도 딱 벌어진 어깨와 보기좋게 자리잡은 근육은 든든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아, 실은 내가 묵을 데가 없거든. 설마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나를 내쫓지는 않겠지?” ...아무리 내가 바보 같다고 해도 명성에 다니는 아이가 잘 곳이 없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믿을 수 없어~!를 부르지으며 민준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나는 신경쓰지도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참 강렬한 취향이구나. 뭐, 특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러고서는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저 말의 의미는 대체 뭘까?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기분이 나빠진다. “내가 꾸민게 아니야.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준 거라고.” 그러니까 절대 나랑은 상관없어~! 라는 의미를 팍팍 실어서 말했지만 역시나 녀석은 내 말을 무시한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녀석을 노려보자 되돌아 오는 것은 능청맞은 미소. “하하, 아무리 내가 인내심이 강해도 그렇게 쳐다보면 참기 힘들어.” 나도 참기 힘들어, 이것아~! 당장 녀석을 들어 창문 밖으로 내던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 때 올린 벨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서 녀석을 던지는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했을 것이다. [띠리리 띠 띠~] 헉, 선우 형~! 그러고 보니 전화할 때가 되긴 했지. 황급히 책상 위에 놓고 나갔던 핸드폰을 집는데 커다란 손이 나를 제지한다. “ 너 나에 관한 일은 선우 형에게 비밀로 해라.” “...왜?” “개인적인 비~밀 이라고 해야 할까? 후후, 뭐,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나도 천 회장님과...” 아아악~! 치사한 놈, 좀팽이 같은 놈.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신호음이 11번이나 울렸는데.” ...신호음을 다 세고 있었단 말인가. 난감함에 입만 달싹이자 민준이 옆에서 자는 시늉을 한다. 아, 그렇지! “자, 자고 있었어.” “...흐음? 왜 갑자기 말은 더듬는 거지?” “허억~!그, 그게...아하하, 잡음이 들리는 거겠지. 오늘 전화기 상태가 별로 안 좋네.” 나는 차마 “잘 안들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못한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럴 경우 선우 형은 기숙사로 찾아올 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뭔가 수상한데? 너 무슨 일 있지?” 허억, 이렇게 예리할 수가! “ 아...하하,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었어. 자다 일어나서 그래. ” “...내가 내일 학교 앞으로 갈까?” 갑자기 형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면서 말한다. 나보고 대체 어쩌라구~! 겨우 형을 달래서 전화를 끊자 옆에서 민준이 눈을 빛내면서 날 쳐다본다. “...너 안 갈래?” “어허, 설마 길 잃은 어린 양을 내 쫓을 생각은 아니겠지?” ...어린 양구이를 만들어줄 생각은 충분히 있다만. “아아, 그러고 보니 너도 어서 자야 하지 않아? 뭐, 지금 안 자도 되려나? 내일 아침에 10 분.이.나 더 잘 수 있으니까 말이야.” 크아악~!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걸까? “됐다.”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틀비틀 욕실로 걸어갔다. 더 이상 녀석과 말다툼할 기력도 없었다. 무엇보다 아까 세게 부딪친 등이 아프다 못해 찌릿한 통증만을 보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후우~.” 물을 틀고 한숨을 내쉬며 욕실에 붙은 거울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입술은 외계인마냥 퉁퉁 부어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멍 자국~! “야, 너~!” 소리를 지르며 욕실 문을 발로 차고 나오자 민준이 날 보고 씩 웃었다. “왜?” “이, 이 모습이 대체 뭐야~!” “흐음, 이제야 알아챈 거야? 뭐, 생각보다 늦었네. 아까 그 녀석들이 오해하는 모습을 보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아까 일을 잊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래? 하면서 흐응, 웃는 녀석을 보고 나는 열에 받쳐서 소리쳤다. “ 사람들이 내가 불량배인 줄 오해하면 어쩌라고 그래?!” “...뭐?” “내가 싸우다 온 줄 알 거 아냐?” “아, 아니... 지금 그 모습은 싸운 것 보다도...” 그러고 보니 승호랑 민현, 그 두 녀석이 놀래더라니. 허억~, 그러고 보니 기숙사에 사는 다른 아이들도 이런 내 모습을 목격했을 것 아닌가. “ 앞으로 깡패들이 싸움 걸어오면 네가 책임져.” 나는 음산하게 민준이 녀석에게 경고했다. 원흉은 너~, 라는 눈빛으로 압박감을 팍팍 주자 녀석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그래, 너도 사람이면 미안하긴 하겠지. 팔짱을 끼고 고뇌하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녀석이 침대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으하하핫, 허, 허억, 제발 나 좀 살려줘, 으하핫.” ...너무 심하게 다그쳤나? -19- -부제 :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민현에게는 언제나 모든 것이 쉬웠다. 아버지는 국제적인 피아니스트셨고, 어머니는 연극 배우로 호평을 받고 있는 분이셨다. 때문에 민현은 어렸을 때부터 관심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다른 이를 대하는 것도 너무나 쉬웠다. 그저 상냥한 미소를 입에 걸고 친근하게 말을 걸면 사람들은 혼자 착각 속에 빠져서 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곤 했다. 시시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부유함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민현은 불평하지 않았다. 명성에 들어간 후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만그만한 아이들, 이른 바 영재교육을 받았다는 아이들이 모여서 비슷비슷한 수준의 재력들을 서로 과시하고, 힘이 센 자에게 붙어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저울질하고 깎아 내렸다. 여기서도 민현은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2학년이 되어 반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단정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아이였다. 그 아이, 윤 현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부모들이 집에서 그 아이에게 거슬리지 말라고 당부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의 소문난 형제나,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윤 현에게는 왠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에 맞닿게 되면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윤 현은 언제나 혼자 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홀로 빛을 뿜고 있는 보석같은 존재. 그것이 윤 현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윤 현의 정보를 얻기 위해 경쟁했고, 현에게 특별한 그 어떤 존재도 생기지 않기를 원했다. 그것이 민현은 거슬렸다. 저렇게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새까만 눈동자를 한 주제에, 자신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민현은 일부러 귀찮은 반장 자리를 맡았다. 툭하면 징징대는 어린 녀석들 앞에서 상냥하게 웃으며 윤 현 앞에서 보란듯이 그들을 조종했다. ...그렇지만 윤 현은 그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민현은 초조해졌다. 자신이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이 더욱 싫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떡하면?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방과후에 민현에게 국어 문제지 채점을 시킨 것이다. 급한 회의가 있다며 미안한 얼굴을 하는 담임 선생님에게 민현은 습관적인 미소를 지었다. “ 민현이는 아이같지 않아서, 안심이 되는구나.” 담임 선생님이 서둘러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민현은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계획성 없이 일을 처리하니 그렇지, 쯧 . 민현은 담임의 무성의한 일처리를 탓하며 아이들의 답안지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이번 국어 시험은 난이도 최상의 문제가 여러 개 있어 민현으로서도 쉽지 않았다. 평균 점수60대인 아이들의 시험지를 제치고 민현은 자신의 시험지에 93이라는 숫자를 써 넣었다. 그 밑에 있는 시험지를 보고 민현은 가슴이 덜컥했다. 단정한 글씨로 선명히 써 있는 윤 현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단지 답안지일 뿐인데, 왜 이 시험지를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겠는지 민현은 알 수 없었다. 이 아이의 성적은 어떨까? 설마 90점을 넘지는 않겠지. 민현은 윤 현의 답안지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문법을 묻는 함정이 섞인 문제에도 어김없이 동그라미가 쳐졌다. 민현 자신은 해석조차 할 수 없었던 고전 문제도 윤 현은 대수롭지 않게 맞추었다. 민현은 시험지를 뒤집어 채점을 계속했다. 아마 이대로 윤현이 만점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최상급의 문제를 모두 맞췄으면서 다른 문제를 틀릴 리는 없는 거다. 그런데 뒷 페이지 중간에 있는 서비스 문제에서 민현의 손이 멈췄다. 이번 시험문제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에 선생님이 특별히 낸 점수주기 문제였다. [다음 문장을 읽고 바르게 답을 쓰시오.] =나지금갈게.= 아아, 얼마나 쉬운 문제인가? 민현은 이제까지 이 문제를 틀린 아이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답은 [나 지금 갈게.]였다. ...그런데 윤현은 거기에 수려한 글씨로 적어 놓았다. [그럼 이따 봐.] 그 뒤로 민현은 윤 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윤 현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민현과 마찬가지로 윤 현을 훔쳐보는 아이들이 많아서 윤 현이 민현의 눈길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미술 시간이었다. 미술실로 이동해서 자리를 앉을 때 민현은 슬쩍 윤 현의 옆에 가서 앉았다. 물론 앉는 과정에서 몇몇의 아이들과 험악한 눈길로 팔 밀어젖히기를 해야 했지만 중요한 것은 민현이 승자로서 윤 현의 옆에 앉았다는 것이다. “ 자, 여러분. 오늘의 주제는 자신의 좋아하는 것 그리기예요.”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주제를 쓰면서 아이들에게 말하자 곧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윤 현은 어떤 것은 그리고 있을까? 민현은 슬쩍 윤 현의 스케치북을 넘겨다 보았다. 그리고 경악스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윤 현은 까만색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을 온통 색칠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것은 선생님에 대한 반항? 선생님도 이것을 본 것인지 윤 현의 옆에 와서 서서 땀을 삐질거리면서 질문했다. “어머, 현아. 지금 뭘 그리는지 물어봐도 돼니?” 그러자 윤 현이 선생님을 올려다보고는 대답했다. “김이요.” “...” 오늘 기분이 좋은지 윤현은 친절하게 스케치북 사이사이의 까맣게 칠해지지 않은 빈 공간을 가르쳤다. “이건 소금이요. 구웠거든요.” 그뒤 민현은 한동안 담임 선생님의 책상 위에서 ‘아동 심리학- 그 병적인 증세’, ‘행동으로 나타나는 심리’ 등의 책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미술시간에도 민현은 윤 현의 옆에 앉는 것에 성공했다. 오늘 미술시간의 주제는 ‘어머니의 모습’ 이었다. 민현은 자신의 그림은 대충 그려서 끝내고 윤 현의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윤 현은 저번 시간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북 안에서는 마치 그림 책에 나오는 것 같은 여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감탄해서 정신없이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다가왔다. “어머, 현이 정말 그림을 잘 그리네. 혹시 미술을 배웠었니? 어머니가 염색을 하셨나 보구나. 빨간색으로 하셨니? 빛의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을 잘 나타냈어.” 정말로 그림 속의 윤 현의 어머니는 갈색, 고동색, 붉은 색등으로 절묘하게 칠해진 머리카락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의 말에 윤 현은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그 시선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자 윤 현의 나지막한 말이 들렸다. “염색 안 하셨는데요. 검은색 크레파스를 다 써서요.” “내가 너 옆에 앉아도 돼?”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민현은 며칠 동안 거울을 보며 연습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윤 현의 앞에 서면 그만 몸이 굳어 버려서 번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곤 했다. 벼르고 별러서 겨우 떨지 않고 말을 한 후 민현은 가슴을 조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기뻤던지, 미적거리며 윤 현의 옆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녀석을 눈빛으로 위협해 쫓아내고 얼른 그 자리에 앉았다. 윤 현은 단순한 변덕으로 민현에게 대답해 준 것인지 그 뒤로 민현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민현은 좋았다. 학교에 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민현의 옆에 몰려와서 혹시 윤 현이 자신들을 바라봐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얼쩡거리는 모습은 짜증났지만 민현은 참았다. 다른 녀석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지 상관 없었지만 윤 현이 민현은 싸가지 없는 녀석,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윤 현도 아이들이 곁에서 윤현의 관심을 끌고자 떠드는 모습에는 짜증이 난 듯했다. 간간히 민현을 노려보곤 하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반 아이들 중 한 명이 봉지 가득 벌을 잡아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벌을 처음 본 다른 아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자, 그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아무도 이 벌 손대지 마. 앞으로 이건 내가 키울 거야. 이걸로 꿀도 얻을 거라고.” 민현은 벌 열 댓 마리를 가져와봤자, 절대 꿀을 얻지는 못할 거라고 지적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때 윤 현이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방과 후 민현은 선생님의 업무를 도와드리느라 아이들을 집에 보낸 후 잠깐 교무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교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의아해하며 창문으로 들여다보자, 윤 현이 교실 뒤에 고고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윤 현의 볼을 간질이고 있는 모습을 민현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기서 소리라도 냈다가는 저 고요한 분위기가 깨질 것만 같았다. 윤 현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연한 움직임으로 청소 도구 함을 뒤지더니 살충제를 꺼냈다. ‘대체 뭐 하는 거지?’ 궁금해하며 지켜보자 윤현은 부시럭 거리더니 벌이 든 봉지를 들고 봉지를 열어서 살충제를 치익 뿌렸다. 그리고는 묘하게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깜짝 놀란 민현이 벽의 기둥 뒤에 몸을 숨기자 윤 현은 태연히 교실을 걸어나갔다. ‘대체...뭐지?’ 민현은 윤 현이라는 인물을 점점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봉지 속에서 죽어 있는 벌들을 발견하고 벌의 주인인 아이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이야~! 이건 내가 기르기로 한 건데! 갖고 싶었으면 말로 할 것이지, 왜 죽이고 그래!“ 민현은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윤 현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 현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애완용 파리였던가?” 다음 날 벌을 키우고자 했던 아이의 책상 서랍에서는 사죄의 말이 적힌 신원 불명의 쪽지가 나왔다. 초록색 황홀한 광채를 뽐내고 있는 왕파리 이십 여 마리가 들어있는 봉지와 함께. 왜인지 윤 현은 민현을 탐탁치 않아 했다. 그래도 민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민현의 고민은 따로 있었다. 매일 밤마다 윤 현에게 할 말들을 구상하고,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하고 학교를 가건만, 정작 윤 현 앞에만 서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연기 연습이라도 배워야 할까, 민현은 나날이 고민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부모님이 민현을 불렀다. 늘 바쁜 부모님이시기에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요즘 학교 생활은 재밌니?” 다정한 듯 말을 꺼내는 아버지도 민현에게는 귀찮았지만 민현은 습관화된 미소를 지었다. “네,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버지는 머뭇거리시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말씀하셨다. “커흠, 그 너네 반에 윤성일 회장님 막내 아들이 다니고 있다고 들었는데, 흠, 그게...” “윤 현이요?” 민현은 그제야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현군과 말이다. 흠, 현군은 조용한 걸 좋아하니까, 시끄럽게 주위에서 돌아다녀서 현 군이 불편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거라. 알았니?”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스러워진 민현이 아버지를 보고만 있자 민현의 아버지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확인 차 물어보자 아버지의 얼굴이 굳어지시더니 이내 결심하신 듯 말씀하셨다. “ 흠, 성진 그룹이 기획사 쪽에도 관심을 두고 있어서 그 것에 대한 계획을 추진 중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이건 네 어머니에게도 중요한 문제야. 현재 네 어머니와 다른 배우의 이름이 이번 가을 공연의 주인공으로 거론되고 있는 중에 계획 책임자인 미연 양의 심기를 거슬리면 무척 곤란한 일이 벌어지게 되겠지. 너를 믿고 하는 말이다만, 미연 양이 특별히 현군에 대해 부.탁. 하셔서 말이다.” ...비록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다고는 하지만 민현은 포기할 수 없었다. “ 민현아, 부탁한다.” ...어머니가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시면서 말씀하신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공연 일정이 갑자기 취소된다거나, 어머니의 CF제의가 백지화되자 민현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윤 현의 모습에 민현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민현은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뀐 후 다른 아이들이 윤 현에게 접근하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후회스러웠다.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설사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윤 현에게는 특별한 그 누구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민현을 비웃듯 갑자기 윤 현이 사라졌다. 다른 이들도 이구동성 이 일을 궁금해 했지만 차마 대놓고 윤 현의 행방을 찾을 만큼 대담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중학교는 지독하게 재미가 없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아서 밤 거리를 돌아다니며 충동에 몸을 맡겨보기도 했지만 모두 순간일 뿐이다. 마음은 비뚤어지고, 무엇에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민현은 아직 어렸다. 초등학교의 그 때보다 몸은 커져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를 지킬 힘도, 하다못해 보고 싶은 이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의 이 감정은 질리도록 소중하다. 민현은 결심했다. 이제까지 윤 현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대단한 식구들을 직접 찾아가 대면할 사람이 아이들 중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식구들이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리도 없었다. 그래서 민현은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람이 없는 폐가에 들어가 인근에서 전깃줄을 끌어다 연결한 후 민현은 며칠동안 컴퓨터 몇 대를 설치했다. 혹시나 역 추적이 들어올까봐 민현 자신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해킹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 중요 정보를 빼내려는 것이 아니다. 민현은 고고학자로서 이집트에 가 계시다는 윤 현의 어머니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고고학자로 대학에서 일하시는 분이신 만큼 다니시는 대학 내에 개인적인 기록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윤 현에 대한 정보도 적혀 있겠지. 민현은 신중히 해킹을 시작했다. 각종 wall들을 뚫고 흔적을 지우면서 겨우 Sung Mi-Rae 라고 적힌 파일을 찾을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이름을 클릭하자 화면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뭐, 뭐지?” 설마 들켰단 말인가? 놀라서 화면을 응시하자 빨간색으로 된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 DROP A BUMB] 그리고 이상하게 꾸물대는 형상들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컴퓨터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났다. 하드가 타 버린 것이다. “허억~!” 민현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민현은 무작정 폐가를 나와 골목에 몸을 숨겼다. 폐가 앞에 연이어 도착한 경찰차에서 경찰들이 속속 쏟아져 나왔다. 언제부터 대한민국 경찰들의 행동력이 저렇게 빨라졌는지 의심하며 민현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멀리서 헬리콥터가 ‘타타타’ 거리면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집 주변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졌고 헬리콥터에서 내려온 무장한 경찰들이 조심스레 주위를 확인하면서 폐가 안에 뛰어 들어갔다. 주민들이 놀라 주위에서 웅성 거리자 경찰들이 주민들을 통제했다. “뭐래요?” “무장공비라도 숨어 있었나 봐.” “뭐? 난 살인범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서로 수근대는 가운데 안으로 들어갔던 경찰들이 민현이 설치한 컴퓨터를 가지고 나왔다. “범인은 벌써 도주한 것 같습니다. 구역을 폐쇄하기로 하지요.” “그래? 지금 연락하지.” “네, 이건 증거물입니다.” 소중히 경찰차에 실려지는 컴퓨터들을 민현은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민현은 15살 중학생이 관심이 가는 한 아이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해킹을 한 것이 그렇게 흉악한 짓이었는지 정말 억울했다. 이 어린 나이에 사람 열 댓은 죽인 살인범 취급을 받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 민현은 지금 저 컴퓨터에 자신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있었던가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더욱 비참했다. ...민현은 아직 힘도, 경험도 무척이나 부족했다. -소년, 15살에 인생의 부조리를 깨닫다.- -20- 10분이 늘어난 아침임에도 나의 하루는 여전했다. 내 방에 눌러앉은 그 녀석은 5반에서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며 놀라고 있는데, 녀석은 태연히 담임 선생님에게 “ 반이 낯설어서 적응이 안돼요.”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자신과 친한 친구로 나를 지목했다. 결국 민준에 의해 자리를 빼앗긴 승호는 분노에 차서 민준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녀석은 뻔뻔했다. 아아, 갑자기 승호가 불쌍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 “선생님께 호출.” “흐음, 알았어.” 내 말에 민준은 다시 핸드폰으로 통화를 계속했다. 내가 녀석과 같이 있으면서 알게 된 것은 녀석은 누군가와 같이 자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희한한 잠버릇의 소유자라는 것, 그리고 핸드폰 중독증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민준의 핸드폰은 시시때때로 울렸고 가끔씩 슬쩍 보이는 핸드폰 수신 메시지에는 [오빠~ 언제 놀러올 거야? 나 계속 기다리고 있어.] [그 날 즐거웠어. 다음 밤은 언제?] 등의 글자가 찍혀 있었다. 지랄맞은 녀석, 그렇게 오라는 사람이 많은데 왜 귀찮게 내 방에서 머물고 있는 건지. 고민하다가 민준이에게 너한테 와 달라는 사람에게 가서 묵으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가 오히려, 질투하는 거냐? 하면서 훗 하고 웃는 녀석의 모습을 봐야 했다. ...못 볼 걸 봤다, 라고 생각했다. 민준 녀석은 뻔뻔하게 경악에 차서 서 있는 나를 보며 예의 내 방에서 묶어야 할 개인적인 사정을 운운했다. 마지막은 천 회장님에 대한 언급으로 상큼한 마무리. 아아, 내 생애 이렇게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선우 형 다음으로 나타날 줄이야. 민준아, 기뻐하거라, 너는 언젠가 선우 형을 제치고 랭킹 1위의 영광을 차지할지도 몰라. 그나저나 저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뭘까? 지금 민준이 내 앞에서 얼굴 가죽을 벗으면서 사실 나는 지구인이 아니었나벼~!라고 해도 나는 담담한 얼굴로 그렇군, 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놈이었었지, 하며 한숨을 푹 내쉬고 나는 교실을 나섰다. 아까 승호는 어떤 여자의 호출에 마지못한 얼굴로 교실을 나갔고, 민현 역시 선배와 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요즘 이상하게 녀석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고, 마치 어미새를 따라다니는 오리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녔기에 지금 안 보이는 것이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교무실에 올라가 담임 선생님이 앉은 곳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인사를 하고 담임 선생님께 용건을 물었다. 교무실에 오래 있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흐음, 윤현군. 저, 물어 볼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담임 선생님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혹시 재범 군과는 연락이 가능한가?” ...뭐? 낯익은 이름에 얼굴을 굳히자 급히 말한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재범 군이 학기 초부터 계속 학교를 안 나와서. 이대로라면 출석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흠, 모른다면 됐네. 미안하군.”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밖에 나오자 갑자기 머릿 속이 핑하고 돌았다. 순간 휘청하는 몸을 다잡고 나는 창문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도 있었지. 어린 시절 한 순간 친구의 이름을 가졌던 존재. 이대로 교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수업 시간은 한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대로 들어가서 수업을 하기에는 머리가 아팠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나는 학교 뒷산 쪽으로 향했다. 화창한 봄 날씨에 점점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코에 와 닿는 향기가 싱그럽다. 발 밑에서 서걱대는 풀의 감촉도 마음에 들었다. 나지막한 산을 거의 다 올라와 가는데 한 인영이 나무에 기대어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섬광처럼 깨달았다. 아아, 너구나. 햇빛에 갈색 빛을 뿜어내는 검은 머리, 얼굴 선은 좀 더 굵어졌지만 섬세한 이목구비는 그대로다. 예전의 뿔테 안경도 없어졌고 귀에는 푸른 피어스를 하고 있는 커다란 덩치로 변해 있었지만 그래도 그 주변에 머물러 있는 화사한 느낌은 여전했다. 정신 없이 재범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덧 나는 재범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가까워진다. ...가까워져? 이 사실에 경악하고 있는데 어느 새 재범은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너...” 묘하게 쉰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재범은 손을 들어 내 얼굴에 가져갔다. “너 누구냐?” 순간 내 무릎이 휘청거린 것은 결코 내 탓이 아니었다. 니 사촌이다~! 웬수야. 이 녀석은 눈이 삐었단 말인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데 녀석이 더 빨랐다. “윤 현? 아냐, 그 녀석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재범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갑자기 녀석이 비웃는 듯한 조소를 띄었다. “꿈인가?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 그 말의 내용보다도 나는 그 조소가 마음에 걸렸다. 이런 것은 재범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애당초 나를 외면했던 것은 너잖아. 그런데도 재범이는 마치 나를 탓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간절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나를 끌어안았다. 놀래서 바둥거리자 손이 달래듯이 등 뒤를 쓰다듬는다. “ 어차피 꿈일 테니까, 꿈에서만이라도 제발 가만히 있어. ”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 ...제발, 돌아와 줘.” ...지금 누구에게 말 하는 거냐? 네가 이렇게 간절히 부르고 있는 상대는 누구지? 녀석을 차마 밀어내지 못한 것은 어느새 내 어깨가 축축히 젖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울다가 쓰러지듯 잠이 든 녀석을 내 무릎에 눕히고 한참동안 재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내가 모르는 3년간 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거였냐? 재범이의 지난 과거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깼냐?” 눈을 뜨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짐짓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까지 무슨 말을 할까 열심히 고르고 있다가 심사 숙고 끝에 간택의 영광을 입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재범이는 처절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아직 잠이 덜 깼나? 혹시라도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친절하게 다시 말해 주었다. “깼.냐?” 이번에는 잘 들리도록 악센트도 넣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곧 살벌하게 굳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세에 눌려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저기, 야? ...소리가 너무 컸나? 그렇다고 해도 내가 무릎베개도 해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녀석을 바라보자, 재범은 그보다 더 한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너.” ...아까 말 안 했냐? 여기서 너의 사촌이며 옛날에 이틀간 친구였던 인물이고, 또 너가 우리집에서 묶었었다는 것도 다 말해야 하냐? 고민하다가 나는 무난하게 나가기로 했다. “윤 현.” “씨발, 지금 날 놀리는 거야? 하~! 아주 잘 나셨군. ” 거칠게 말하는 녀석의 태도에 나 역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물고 녀석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 손은 무엇이다냐? 재범은 내 어깨를 거칠게 획 잡아끌었다.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대체 뭐야?” ...이유? 뭐라고 해야 할까. 난감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는 그저 바닥만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이 녀석이 이렇게 유별나게 반응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21- “그거야, 현이 마음 아니겠어? 굳이 아무 상.관.없.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보는데.” 훗, 하면서 나타난 박 민준의 모습이 반갑게 느껴지다니 몸이 허해진 모양이다. 무서운 표정으로 민준을 노려보는 재범의 모습에 민준이 씩 웃었다. “그런 사랑스런 눈길로 보면 곤란해. 이래봬도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아아, 역시나 민준이 녀석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저런 썩을 놈, 지금 누굴 보면서 베실대는겨? “...넌 누구냐?” “글쎄, 공주님을 구하러 온 정의의 기사-, 라고 하면 화 낼거잖아?” 응, 그리고 너는 이따가 한 대 맞을 줄 알아라. 알면서 그 딴 소리를 지껄이냐? 어느새 나는 재범이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고오오~ 불타오르면서 민준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 민준 녀석, 고개를 모로 꼬더니 말한다. “뭐, 개인적으로는 공주를 구하러 왔다가 마녀와 눈이 맞아 열렬한 밤을 보낸 후 재산 털어서 도망가는 악당이 더 마음에 들지만 말이야.” ...너무 리얼하다. 그 생생함에 할 말을 잃고 있는데 재범이도 역시 그런 듯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죽일 듯이 민준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면. “어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나를 바라보면 내가 민망하지?” 그게 민망한 얼굴이냐? 왜 볼에 홍조는 띄는데? 저 녀석 혹시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변태스러운 민준이 녀석이라니 너무 잘 어울리잖아~! 속으로 절규하다가 나는 그만 생각해내고 말았다. 갑자기 스물스물 떠올르는 이 옛 기억은... 어렸던 시절, 선우 형이 나를 붙잡고 [바보, 너 학교나, 또는 다른 곳에서 변태들을 만나면 즉시 나한테 말해. 안 그러면 혼날 줄 알아~!] 라고 말했던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순진했던 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날 학교 정원을 뒤져 변태 과정을 거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 번데기를 찾아 가져왔다. 선우 형은 선물이라는 말에 웃으며 좋아하다가, 그 것을 받고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내는 것이다. 왜 선우 현이 화내는 지 알 수 없었던 나는, 단순히 양이 적어서 그런가, 라고 생각하고 며칠에 걸쳐서 온갖 번데기를 잡아 왔더란다. 그 채집을 위해 구석진 학교 화장실까지 다녀왔으니... 나는 추가로 애벌레도 넣어서 선우 형에게 갖다주면서 해맑게 웃으며 “형은 곤충이 그렇게 좋아?” 라고 했다가 그 날 하루 종일 선우 형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옆에서 그것을 본 미연 누나는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계속해서 선우 형을 보면서 웃었었다. 나는 미연 누나가 나에게 그렇게 웃어준다면 참 행복할 것 같은데도, 선우 형은 얼굴을 찌푸리며 계속 씨발, 씨발, 소리만 연발했다. 옛날 생각을 하느라 멍해 있는데 민준이가 볼멘 소리로 말한다. “농담을 했으면 반응을 해 줘야 할 것 아니야?” ....방금 농담이었냐? 난 진심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의 경악한 눈초리에 민준이 훗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모습에 갑자기 팔뚝에 닭살이 오도독 돋는다. “뭐, 어쨌든 가자?” 손을 내미는 녀석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민준이 또 히죽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시계 소리는 참 아름다웠지.” “...” ...언젠가 나는 살인을 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인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게 되거나. 아아, 왜 나는 그 때 저 녀석과 마주쳤을까? 뭐, 시계를 돌린 건 그래도 아직 후회되지 않는다. 시계가 늦춰진 그 날로부터 며칠 후에 아이들은 시간이 늦어진 것을 눈치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도부조차 이것을 묵인했으며, 선생님들도 사실을 외면한 채였다. 때문에 우리 학교 내의 시간은 언제나 10분 늦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허, 천 회장님 연락처가...” ...간다, 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자리를 떠나려는데 그 순간이었다. [퍼어억~!] 재범이가 주먹을 민준에게 휘두른 것이다. 민준은 잽싸게 얼굴을 돌렸다. 그 광경에 놀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 어느새 녀석들은 손과 발을 이용해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것은 또 무슨 상황인 거야? ...말려야 돼나? 아니, 그것보다 저 녀석들은 왜 또 싸우는 거야? 어헉, 혹시 이것은 교내 폭력의 현장? 하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까의 대화에 주목하자. 그러면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겠지. 나는 머릿 속으로 아까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민준이 녀석은 충분히 맞을 만하다. 도와 줄 가치가 없는 녀석, 하고 나는 싸움을 말릴 생각을 깨끗이 접었다. 물론 애당초 싸움은커녕 누구를 제대로 때려 본 적도 없는 내가 저 것을 말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주섬주섬 앉아서 구경하려다가, 나는 문득 며칠 전 부딪쳤던 등짝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에휴, 하면서 민준이 녀석을 한 번 노려보고, 재범이를 말 없이 응원해 준 후 나는 주섬주섬 조끼를 벗었다. 봄이라지만 벌써 날씨는 많이 풀려 있었고, 그래서 나는 마의가 없이 셔츠와 조끼, 넥타이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교복 셔츠의 단추도 하나 둘 다 푸르는데, 세 번째 단추가 잘 풀리지 않는다. 낑낑대다가 겨우 성공, 뿌듯함에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고, 다른 단추도 마저 풀었다. 이제는 등에 붙일 파스를 꺼내야지, 하다가 문득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드디어 민준이 녀석이 죽은 것인가? 오옷~! 하면서 바라보다가 나는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녀석을 보고 놀랐다. 어느 새 싸우는 것을 멈춘 듯 민준은 얼굴에 멍자국을 달고 입술은 터져 있으면서도 나를 보고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저 표정은 선우 형이 맛있는 것을 앞에 뒀을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데? 뭔가 이상한 느낌에 재범을 보자, 녀석은 나를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재범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따라가 바라보자, 멈춘 곳은 작은 멍이 들어 있는 내 목가였다. 헉, 이게 어때서?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당한 거라고~! 내가 누굴 때릴 사람으로 보이냐? 속으로 외치면서 나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원흉인 네가 책임져~!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눈동자를 별처럼 반짝거리며 헤죽 웃는다. 옆에서 들리는 으드득 거리며 이를 가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범을 바라보자 재범의 눈길이 더욱 흉흉해져 있었다. 그 눈 앞에 나는 찜구이가 된 오리의 심정을 체감하고 있었으니...솔직히, 저 녀석도 방금 내 앞에서 싸우는 장면을 보였으면서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건지, 물론 사촌인 내가 불량배가 돼서 나타났다고 생각해, 부끄럽고 싫어서 그런다고 해도 저것은 심하지 않은가. “너...지금 뭐하는 거냐?” 음산하게 말하는 재범이의 모습에 나는 셔츠를 완전히 벗어 등판을 안 보여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등판마저 봤다면 나를 어떻게 봤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도 끔찍하다. “그게...몸이 안 좋아서.” 아파서, 라고 말 하려다가 그러면 나를 약한 놈, 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나는 말을 신중히 했다. 그러니까 네가 파스 좀 붙여주지 않을래? 라고 친한 척 다시 말을 걸어 볼까 고민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파스를 꺼내려고 하는데 민준이 녀석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많이 아프냐? 미안, 현아. 그 날 밤은 나도 처음이어서 그만 참지를 못했어. ” 라면서 싱그럽게 웃는 민준을 나는 미친 녀석 보듯이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프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매일 밤 내가 파스를 붙이고 있으면 파스 냄새 난다고, 화장실 가서 붙이라고 구박한 게 누군데? 게다가 뭐가 처음이냐? 날 때린거? 당연히 그날 처음 봤으니 때린 것도 처음이겠지. 민준은 나에게 다가와 나를 덥썩 껴안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 즈음 나의 머릿 속은 공황 상태였다. 아아, 왜 나는 지금 어디 가면 좋은 식칼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뭐, 사람이 완전히 썩으려면 몇 년이 걸리더라? 생각하면서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까지 도달해 있는 나를 억누르려고 애쓰는데, 갑자기 억눌린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하하, 그런 거였냐? 그래서 날 피한 거였어? 날 비웃으려고 생각했던 거라면, 축하해 주지, 윤현.” ...쉰 듯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음험함을 품고 있다. 재범의 말에 놀라서 나는 재범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민준이 나를 꽉 껴안고서 놔 주지 않는다. 얼굴이 민준의 가슴에 파 묻혀서 아등바등 거리고 있는데,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다시는 너를 생각하지 않겠어.”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한, 죽어가는 목소리. 비통에 잠겨 있는, 거칠은 음성. 그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멀어져갔다. “후훗, 뭐 그 때는 이렇게까지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면서 민준은 내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죽일까라는 고민을 접어두고 나는 녀석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주머니에서 파스를 꺼내 녀석에게 들이밀었다. “허억~!” 순식간에 나를 놓고 떨어진 녀석.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소리친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야~! “젠장, 내 이 완벽한 스타일에 파스 같은 꾸질꾸질한 냄새가 배면 어쩌려고?” ...너의 그 말은 나 같은 구질한 스타일은 꾸질꾸질한 냄새를 달고 다녀도 괜찮다는 걸로 들린다? 미간을 찌푸리며 민준을 노려보자 내 분위기를 눈치챈 듯 녀석이 비굴하게 웃었다. “ 어허, 그러고 보니 왜 시계소리가 안 들리지?” ...눈치챈 게 아니었구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랬단 말인가. 허무함에 몸을 떨면서 나는 민준에게 말했다. “일어나, 양호실이나 가자.” 녀석도 나도, 일단은 환자이니 양호실에 갈 자격은 충분히 있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걸려서 한 말인데 녀석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허, 허억, 양....양호실?” ....왜 저러지? 갑자기 말을 더듬는 모습에 의심쩍게 쳐다보았다. “다쳤으니까 치료를 해야지.” 그러자 민준이 애써 내 시선을 피하더니, 곧 힘차게 외쳤다. “그, 그러지 말고 그냥 네가 치료해주면 안돼?” ...내가 미쳤냐, 널 치료해 주게? “안 돼.” 단호히 말하자, 민준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허, 시계의 정겨운 노래가 듣고 싶구나.” ...이젠 지겹다, 이것아~! “잔말 말고 따라와.” 챙겨주는데도 궁시렁 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 단호히 말하자, 녀석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아, 아하하, 사실 별로 안 아파.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안 낀다고.”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가서 약만 바르고 가.”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죽상이 된다. 어허, 이것 봐라? 하면서 녀석을 쳐다보자, 떫게 웃으며 시선을 돌린다. 그 모습에 나는 살풋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혹시, 하면서 의심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봐. ” “뭐, 뭘?” 어서, 이실직고 하지 못해~? 라는 눈빛으로 팍팍 압력을 가하면서 목소리를 깔자 녀석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려진다. “대체 얼마나 뜯어먹었냐?” “...뭐?” “아니면 정녕 사기를 친 거냐? 양호 선생님한테?” “아, 아니야~! 당한 것은 오히려 나라고~!” 처절하게 외친 녀석은 갑자기 내 눈치를 슬쩍 보고는 에휴~, 한숨을 내쉰다. “...네가 사기 당했다고?” 어헉, 이럴수가, 양호 선생님의 정체는 대체 무엇? 놀라서 굳어 있자, 민준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 그래. 그렇다고 해 두자. 어쨌든 너도 양호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게 좋을 거다. 아니, 앞으로 그 쪽은 보지도 마. 독 같은 사람이어서, 어울리면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저 뺀질이 녀석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아아,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런데 나도 하나만 묻자. 아까 왜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고 요염한 포즈로 단추를 푼 거냐?” ...요염한 포즈? 뭐지? 비유인가? “등이 아파서...” “그래서?” “파스 붙이려고.” 그러자 갑자기 민준이 허망한 듯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는 내 등 뒤 멀리를 응시하며 작게 말한다. “불쌍한 녀석...” 저건 나를 동정하는 소린가? 하며 멀뚱히 녀석을 쳐다보자, 또 한숨을 포옥 내쉰다. “에휴, 너랑 같이 있으면 늘어나는 건 한숨밖에 없는 것 같다. 뭐, 그만큼 재미는 있지만. 게다가 달라붙는 것들 놀리는 재미도 쏠쏠하고. ” ...나도 너랑 있은 후 늘어나는 건 한숨밖에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너랑 있는 거 재미없어~! 절규하며 민준을 쳐다보자 민준이 피식 웃었다. “뭐, 됐어. 어쨌든 돌아가자.” 민준의 말에 나는 작게 흠칫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아. 라고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듯 쳐다보는 민준을 외면하고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재범이 서 있던 곳의 나무 가지가 엉성하게 꺽여서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꺾여진 가지 주변에 군데 군데 묻혀진 핏자국을 보며 나는 아까 절규를 하던 재범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죽어 가는 듯한 지친 음성과, 묵직한 발걸음도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 속 깊이 절망과 슬픔을 담고, 애써 분노로 그것을 포장하고 있던 녀석의 눈동자가 마음 한 구석에 머무른다. 녀석은 나에게 왜 이곳에 왔냐고 물었지만, 정작 녀석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나였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 변한 거지? 왜 그렇게 아파하고 있는 거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의문을 가슴 속에 묻으며 나는 민준과 같이 그 자리를 떠났다. -내 나이 17, 따뜻한 봄날에 지나간 과거의 존재를 알다.- -22- 다음날 왠지 모를 망설임에 머뭇거리며 교실에 들어간 내 눈에 재범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 날도 결국 들어오지 않은 녀석은 그 후 4일이 지난 후에야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반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상처 자국이 여기 저기 나 있었고, 손에 감은 붕대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머뭇거리며 녀석을 외면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될지, 다시는 나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녀석의 말만이 내 귓가에서 맴돌며 발걸음을 잡아채었다. 그런 내 모습에 민준은 핸드폰으로 문자 놀이를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허, 이 화창한 봄에 왜 그렇게 우거지상이냐? ” “신경쓰지마.” “나 말고 다른 녀석이 내 옆에서 땅을 파고 있으면 패주고 싶어진단 말이다.” 혹시라도 녀석이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지만, 녀석의 말은 정말 역시나였다. “괜히 현이에게 시비 걸지 말고 너나 잘해, 박 민준.” 톡하고 내 쏜 후 내 눈치를 살피는 민현이 녀석. 대체 왜 날 보는 거지?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배시시 웃는다. ...이게 춘곤증으로 졸리다 못해 미쳤나? 그런데 이럴 때 민현이 녀석을 옹호 해 줄 승호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저 녀석이 왜 저러지? 어이, 너랑 친한 민현이가 말을 하는데 안 도와 줄거냐? 승호는 내가 재범이를 만난 날 여자와 같이 나갔다가 돌아온 후로 계속 기분이 안 좋아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땅을 바라보며 틈만 나면 멍해 있는 녀석의 상태에 다른 녀석들은 그러려니~, 하고 있는 눈치였고,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괜찮아?” 그래도 동창의 의리가 뭐였는지, 어색하게 묻자 승호의 어깨가 잠시 움찔하더니 녀석이 고개를 책상에 묻은 채 중얼거렸다. “으응, 신경 쓰지마.” “그래, 현아. 신경쓰지마.”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신경 써주면 귀찮아할 걸?” 민현, 민준이 승호의 말에 차례로 맞장구를 치자, 다시 승호의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허억, 내가 귀찮게 한 거였냐, 지금? 왠지 모를 억울함에 나는 울컥해서 승호를 외면하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준이 옆에서 나를 탁탁 쳤다. “어이, 다른 사람 신경쓸 정도로 심심하면 핸드폰이나 가지고 놀지 그래? 너도 핸드폰 있잖아?” 있기야 있지. 거의 사용 안하긴 하지만. “현아, 핸드폰 있어?”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는 민현의 눈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이 환해진다. “번호 좀 가르쳐 줘. 내 것도 가르쳐 줄게.” “안 돼.” 단호히 말하자 민현의 눈길이 애처로와졌다. 제발~, 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길을 외면하자 민준이 옆에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번호 절대 안 가르쳐 주니까, 애원하지 마라. 나한테도 안 말해 줬어.” “...너 한테 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야? 지금 네 악명을 몰라서 말하는 거냐? ” 싸늘하게 내뱉는 민현의 기세에 놀라 바라보자 민준이 민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민준이 차갑게 말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민준은 분위기를 시시때때로 바꿀 수 있는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녀석이다. “내 악명? 무슨 소린지? 그보다 너의 이중인격이나 고치는 게 어때?” “글쎄, 저질 바람둥이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둘의 팽팽한 분위기에 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움이 일어났을 때 탈출로는 어디가 좋을까 살펴보는데 반 아이들이 모두 자고 있는 건지, 대부분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있었다. 예외는 지금 싸우고 있는 이 두 녀석과 나, 그리고 재범이 뿐. 재범이는 고개를 들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어,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윗 단추가 풀린 셔츠 너머로 붕대가 언뜻 보이는 듯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네 조용히 못하겠냐?” 승호가 고개를 들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민준과 민현의 시선이 동시에 승호를 향했다. “...너는 계속 누워 있어.” “신경쓰지 않아 줄 테니까 계속 누워 있어, 그렇지, 현아?” 싸늘한 민현과, 이죽거리는 민준의 말에 승호는 나를 스윽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눈꼬리가 추욱 쳐졌다. ...어울리지 않아, 어울리지 않는다고~! 속으로 절규하면서도 나는 녀석을 애써 이해해 주고 있었다. 그래, 네 맘 다 알지. “그래, 넌 계속 누워 있어.” 나는 승호가 부담갖지 않게 되도록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승호는 갑자기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억울한 얼굴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콰당] 그 때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학생들이 떼지어 들어왔다. 아앗, 이 익숙한 상황은 혹시? 이제는 어지간히 낯이 익은 3학년 선배가 무리의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재범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나오셨군. 너, 설마 다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씹듯이 내뱉는 그 말에도 재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아, 언제까지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보지. ” 3학년 선배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재범이 눈을 천천히 떴다. “꺼져.” 간단한 그 말에 선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고, 그 뒤에 서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 지금 아무도 없다고 날뛰고 있는 중인가 본데, 소식 들었어? 앞으로 한 달 후면 그가 돌아온다고.” 선배의 말에 재범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두근, 하고 갑자기 심장이 고동쳤다. 혼란과, 그리고 왠지 모를 증오를 담고 나를 보는 그 시선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차가운 음성으로 살벌하게 말한다. 그 모습에 내 어린 시절 재범이가 떠오른다. 내밀었던 손을 밀치고 달려가던 뒷 모습. 홀로 화장실에 숨어 울어야만 했던 그 때의 심정까지. “이만 가시죠? 시끄럽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거친 음성에 내 상상이 파삭 하고 흩어졌다. 승호는 무척이나 화가 난 얼굴로 선배들을, 아니 재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방해되는군요.” “너, 이승호~! 대체 무슨 속셈이냐? 설마 너희 둘이 손을 잡기라도 한 건가?” 3학년 선배의 당황한 음성에 승호가 비웃듯이 말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잊으셨습니까? 역시 생긴 대로 머리가 나쁘군요.” ...자기도 머리가 나빠서 기숙사에 들어온 주제에, 그런 말을 태연히 지껄이고 있는 승호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콰당] 갑자기 책상이 나뒹굴었다. 놀라서 시선을 돌리자 재범이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책상을 쓰러뜨리면서 거칠게 일어난 그 모습에 3학년 선배 무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3학년 선배가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무시한 채 재범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말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내 존재를 외면하고 있는 눈빛. 어째서 저 녀석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이는 걸까? 아아, 그리고 이제는 홀로 서겠다고, 과거를 청산하고 싶다고 온 나는 왜 아직도 녀석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얽매여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나는 재범이를 외면했다. “ 씨발.” 욕설을 내뱉고 재범이는 그대로 문을 열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굉장한 기세로 벽에 쾅 소리를 내며 부딪친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잠시 흔들거렸다. “저, 저 새끼~!” “저거 그대로 놔 둬도 되는 거야?” 웅성이는 3학년 무리들을 제지하고 선배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반 아이들은 모두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이 소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재범이 새끼 사촌이 대체 누구야?” 그, 그건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쭈볏 거리며 손을 들려고 하는데, 승호가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우스워 보였나보군.” ...누가 널 비웃기라도 했냐?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내뱉더니 승호는 3학년 선배에게 건방지게 까딱, 하고 손짓을 했다. “이 곳에서 창피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나오는 게 좋을 걸? 내가 쓸데없는 말 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이 기회에 확실히 가르쳐주지.” 선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긴, 그럴만하다. 승호는 어느새 반말을 하면서,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자기보다 낮은 이를 바라보는 지배하는 것에 길들어진 자의 시선이다. 오만하고, 그만큼 솔직한 눈빛. “너, 이승호~!”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는 선배를 승호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따라와.” 그러자 선배가 이를 빠드득 갈더니 승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서 우루루 몰려나가는 다른 선배들. 어억,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나라지만, 저렇게 나간 이들이 서로 사이 좋게 소꿉장난이라도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23- “흐응, 아무튼 열혈이라니까.” 귀찮아, 라면서 민준은 심드렁하게 말하더니 삐삑, 요란한 메시지 착신음을 내고 있는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난 먼저 갈란다. 열심히 수업 들어.” 무슨 변덕인지 이렇게 말하고는 민준은 그대로 교실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어허, 이것 봐라? 하면서 옆을 보자 민현이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넌 안가?” 떨떠름하게 묻자 민현의 얼굴이 상큼하게 빛난다. “어딜?” 어디긴 어디냐, 당연히 승호를 구하러지~! 민현의 냉정한 태도에 나는 조금 상처를 받았더랬다. 너희들의 빛나는 우정은 겨우 이 정도? “승호한테.” “왜? 개는 혼자서도 잘 할 걸. 현아, 그러니까 절.대. 신경쓰지 마. ” 아아, 미안하다. 그래,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우정이구나. 나는 민현이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이 무조건적인 믿음이 담긴 말, 얼마나 멋진가? 여기서 손을 교차시키며 노을을 배경으로 쓸쓸히 서 있는 두 명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고 있었으니... “현이 너와 둘이 있는 거 오랜만이다.” “...응? 지금 뭐라고?” 상상을 하다가 민현의 말을 놓쳐서 민현을 바라보고 물어보자 민현이 얼굴을 수줍게 붉힌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러니? 나는 애써 민현의 붉어진 볼에서 시선을 외면했다. 한 동안 저 모습을 안 보인다 했더니...하긴 민현이 녀석도 많이 쑥스럽겠지. 승호에 대한 그 굳건한 믿음을 나에게 말했으니...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나는 민현에게 말 해 주었다. 순전히, 녀석의 그 굳건한 마음이 부러워서였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좋겠다.” 나름대로 돌려 말한 화법에 민현의 얼굴이 갑자기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헉, 이것도 너무 직설적인 말이었던가? 민망함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민현의 눈동자가 샛별처럼 빛났다. 동시에 주위에서 머리들이 불쑥불쑥 튀어오른다. 이제까지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자고 있던 반 녀석들이 갑자기 머리를 들더니 내 쪽을 쳐다본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알아서 조용히 입을 다물어 주었다. ...조금 떠들었다고 저렇게 쳐다보다니~! 크억, 정말 너무 하지 않은가?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나는 조용히 책을 꺼내서 책상에 펼쳤다. 그런데 민현이 옆에서 머뭇거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 저기, 현아... ” 조용히 못하겠냐? 아이들의 점점 더 강렬해지는 눈초리에 나는 속으로만 되뇌이며 민현을 바라보았다. 너는 저 시선이 안 느껴지냐? 더 떠들면 가만 안 있겠다는 듯 흉흉하게 변하는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민현은 입술을 꼬옥, 깨물더니 겨우 말을 꺼냈다. “현아,나....좋아해.” “알고 있어.” 너와 승호의 우정은 알고 있다마다, 그렇게 매일 열렬한 시선을 보냈었는데 내가 어찌 모르겠냐? 하는 심정으로 간략하게 대꾸하자 민현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긴, 당연히... “그냥 그래.” 부럽다고 솔직히 말하기에는 배가 아팠기에 퉁명스럽게 내뱉자, 갑자기 민현의 얼굴이 새하애졌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정말 언제까지 크지 않는 녀석, 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승호와의 사이를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충격받은 얼굴이 되다니. 녀석은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나에게 자꾸 자랑을 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걸까? 이제는 손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 그냥 부럽다고 말 해 줄 걸 그랬나? 앞으로 녀석이 다시 나에게 무언가를 자랑하면 그냥 맞장구치면서 부럽다고 말해줘야지, 하고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미안, 나 몸이...조금 안 좋아서.” 비실비실 밖으로 나가는 녀석을 보자 정말로 미안해져서 나는 녀석을 부축해주었다. “내가 양호실까지 데려다 줄게.” 말하면서 민현의 손을 잡자 민현이 확, 하고 내 손을 뿌리쳤다. ...많이 화가 났나보다. 역시 이상한 녀석, 하면서 민현을 바라보자, 민현은 미안했던지 아까보다 더 시퍼래진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미,미안...나 혼자 갈게. 괜찮아.” 그 모습을 보고 절대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내 뒤에서 느껴지는 불타는 시선들이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미안하다, 애들아. 나는 이만 나갈테니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 하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는 싫다는 민현을 데리고, 억지로 양호실로 가기 시작했다. 교실 문 앞 복도에 왜인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담임 선생님이 보여서 양호실에 간다고 했더니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중얼거리더니, 나중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던 민현은 1층 구석의 양호실 문 앞까지 오자 퍼뜩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응? 여긴?” 하면서 바라보는 녀석에게 나는 친절히 알려주었다. “양호실.” 그 말에 또다시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민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양호실에 대해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 난 괜찮으니까, 그냥 가자. 현아.” 응?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쳐다보는 내 시선을 민현이 이리저리 피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라? 이 반응도 어디서 봤던 건데? ...그래, 며칠 전에 누군가에게서...허억, 그러고 보니~! 그 뺀질한 민준이 녀석이 당황한 얼굴을 하게 했던 사람, 그 이름하여~! “어머, 너희 여기서 뭐하니? 어디가 아픈 거야? 자, 어서 들어가자.” ...양호 선생님이 아니었던가. 뒤에서 들리는 발랄하고 여린 듯한 음성에 나는 천천히 절망해야 했다. 보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는 마음을 무시하고 천천히 몸을 돌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라? 그렇다면 내가 들은 것은 환청?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밑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너, 혹시 네가 그 소문의 아이니? 어머,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까 실물이 더 낫구나. 아, 미안. 혹시 어디 아파서 온 거니? 자, 들어와. 선생님이 다.정.하.게 진찰 해 줄게.” 고개를 밑으로 내리자 보이는 것은 화려한 금색 빛 도는 적갈색의 예쁘게 컬해진 머리카락과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 길다란 속눈썹이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살풋이 덮고 있었고, 하얗고 작은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떠 있다. 키가 작은데도 늘씬하고 예쁘게 가꿔진 몸매가 몸에 붙는 하얀 가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만 하시죠, 선생님. 어디가 아파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민현이 잽싸게 말하자 선생님의 눈이 민현을 향했다. “어머, 민현군. 오랜만이야. 선생님은 너무 서운했어. 모두들 날 찾아오지도 않고 얼마나 심심했다고” 손을 뺨에 대고 호~ 하고 한숨까지 내쉬면서 말하는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다소 미심쩍어졌다. 이 모습 어디에 녀석들이 벌벌 떨만한 것이 숨어 있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는 민준 녀석의 말만 듣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듯 하다. “저기, 윤 현군, 맞지?” 푸른 색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묻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훗~, 좋았어. 그럼 들어가자?” ...응?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콧소리 비슷한, 닭살이 돋게 하는 소리였던듯... 하면서 다소 의심쩍게 양호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여인을 바라보자, 나를 보면서 생긋, 웃는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듯한 그 귀여운 미소에 나는 다소 미심쩍어졌다. 뭔가 굉장히 의심스럽고, 그러면서도 뭐가 의심스러운지는 딱히 말하지 못하겠는 이 기분. 양호 선생님은 양호실 문을 달칵 열고 들어갔다.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며 우리를 재촉하는 양호 선생님의 앞쪽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은 너도 만나게 되는구나.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던 아이. 다른 아이들을 턱끝으로 부려먹던 여왕님. 예전과는 달리 길다란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양호실 책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오만하게 앉아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가득 담기며, 소녀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정말 오랜만이다. 슬비야. -24- 부제 :성장기 1 박 중철 의원은 대담하고 활동력 넘치는 정치가, 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박 의원의 뱀 같은 혀 끝과, 그의 끝없는 생명력을 두려워했지만, 정작 민준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작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은 재미가 없으면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라는 것이 박 의원의 신조였고,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철저히 그렇게 가르쳤다. 자유스런 마음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극도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난 위의 두 형이 박 의원과 비슷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민준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민준은 절대 저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인 아버지만은 닮고 싶지 않았던 순진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민준은 무엇이든 열심히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민준이 눈에 거슬린 듯, 어느 날 미국을 찾아와 민준을 방문한 아버지는 민준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님?” 깍듯이 예의를 차려 말하자 박 의원의 눈가가 더욱 찌푸려졌다. “그 애늙은이 말투는 대체 뭐냐? 나한테 반항하는 거냐?” 민준은 그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눈가에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세우면서 그러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에휴, 재미없는 녀석.” 박 의원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후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씩 웃으면서 민준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자신의 분위기를 바꾸는 아버지의 모습을 민준은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이렇게 재미없는 너라도 받아준다는 곳이 있으니.”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에게 박 의원은 씩 웃었다. “네 나이 11살, 이제야 비밀을 털어 놓을 때가 되었다. 사실대로 말하마.” 표정을 다시 확 바꾸어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며 박 의원은 나직이 말했다. “사실 너는 홀 몸이 아니다.” “...네?” 민준은 그저 멍하니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지금 이건 무슨 소리? 민준의 시선에도 아버지는 꿋꿋했다. 먼 곳을 보는 듯한 아련한 눈을 하고 말한다. “아아, 보고 싶구나. 우리 귀여운 현이. 크읔, 생각 같아서는 현이 상대로는 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 녀석들이 그럴 경우 가만히 있지 않겠지. 잔혹한 운명이 우리를 갈라 놓는구나. ” 민준은 그런 아버지에게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민준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박 의원. 민준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잘 부탁한다, 아들아. 네가 현이 마음을 꽉 붙들어서...” “...” “...현이와 결혼하는 거다.” 허억, 이것은 대체? 민준은 입만 뻐끔뻐끔 거리면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재미없고, 모자란 녀석을 현이에게 준다는 것이 심히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 결혼은 상대방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보고 하는 거니까.” 그렇다면 현이와 너의 결혼은 문제 없으니 너는 지금부터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기다리거라, 라고 말하는 박 의원에게 겨우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 민준은 처절히 외쳤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현이라는 여자와 제가 결혼해야 된다는 말인가요?” “아니.”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박 의원을 민준은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쳐다보았다. 그래, 이것은 그저 질 나쁜 농담일 뿐이겠지. “현이는 성진 그룹 막내 아들이다. 즉, 남자지.” “...농담이시죠?” “아닌데? 이미 약혼까지 시키고 왔으니, 민준아, 너는 걱정할 것 없단다. 자, 그럼 가서 팩이라도 하면서 미모를 가꿔 보렴. 이대로는 현이한테 네가 너무 밀리겠다.” “...저보고 지금 남자를 아내로 맞아서 살라는 말씀이세요?” 나보고 호모새끼가 되라고 말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민준은 겨우 참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민준에게 박 의원은 상큼하게 웃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민준이 너는. 내가 설마 너에게 남자를 아내로 맞아서 살라고 하겠냐?” 지금 그러셨잖아요~!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은 민준은 박 의원을 노려보며 뒷 말을 재촉했다. “허허, 당연히 네가 아내지. 시집 가서 시부모님에게 이쁨 받거라. 뭐, 시형제들이 좀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네 남편의 마음을 꽉 잡아 놓는다면 모두 괜찮을 거다.”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다고~! 절규하며 민준이 폭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콰당, 하고 열렸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창백한 얼굴로 소리치시는 어머니를 보며 민준은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그래, 나에게는 저 구제 불능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계셨지. “무슨 소리긴. 성진 그룹 며느리 자리가 어디 쉽게 나는 자린지 알아?” 박 의원의 태연한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머니, 힘내서 더 해주세요~! 제발 절 이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세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민준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성진 그룹 며느리면 대체 혼수를 얼마나 해 가야 하는 거예요? 가뜩이나 집안 살림이 모 자라 죽겠는데!?” “어허, 설마 대(大 ) 성진 그룹에서 며느리 혼수를 탓하겠어?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지지.” 허허허 웃으며 말하는 박 의원에게 어머니가 다소 안심이 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 “민준아?” “허허, 녀석 정말 좋은가보군. 아무말도 못하고 몸을 떨고 있는 걸 보니.” 민준은 그 날 난 더 이상 이 집에서 안 살아~! 라고 외치면서 뛰쳐나와 버렸다. 그리하여 그 후 민준은 미국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타락하고 말았으니... -소년, 11세에 반항기에 돌입하다.- “대체 뭐가 문제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박 의원을 바라보며, 민준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글쎄요, 굳이 말한다면 살아 있다는 것이랄까?” “후우, 긴 말 하기 싫다. 한국으로 가거라.” 순간 민준의 팔이 움찔했다. “....왜요?” “어허, 한국에 가서 네 정혼자를 만나봐야 할 것 아니냐?” 쯔쯧, 거리면서 애교도 없는 녀석을 주게 되서 미안하다, 현아~, 라면서 울먹거리는 아버지를 민준은 살벌하게 노려봤다.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 그 녀석과 결혼 안 합니다.” “나도 몇 번이고 묻는 것이다만, 대체 현이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냐?” ...글쎄, 현인지, 뭔지는 난 한 번도 못 봤다고~! 절규하면서 민준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전 여자가 좋아요.” “괜찮다. 취향은 변하기 마련이야.” “절. 대. 로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하하, 설마 부끄러워 하는 거냐?” 짜식, 미안하다. 내가 눈치가 없어서, 라면서 해맑게 웃는 박 의원을 민준은 날이 선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박 의원이 갑자기 생각에 잠긴 눈빛이 되었다. “알 수 없구나, 정말 알 수가 없어. 대체 네 주제에 뭘 믿고 그렇게 튕기는 거냐? 현이가 얼마나 귀엽고 예쁜...” “아, 글쎄~! 현인지 뭔지 전 알지도 못한다고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소리치는 민준의 모습에 박 의원이 씩 웃었다. “그래, 미안하다. 아들아. 정혼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너의 소망을 내가 이제까지 무시해 오다니, 진작 말 하지 그랬니?” ...내가 언제? 그 딴 건 듣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도 분노로 몸이 떨려와 민준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 만남은 그래, 현이가 4살 때였지.” 박 의원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성진 그룹 회장의 사택에 들어갔다. 다른 이에게 위압감을 주는 육중한 집을 둘러보면서, 박 의원은 소문이 자자한 윤 회장의 막내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형제들이 막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싸고 도는지, 막내 아들은 아직까지 공식 선상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 막내 아들을 보고 싶다는 조심스런 제의가 칼 같이 거절된 후로, 다른 이들의 쑥덕공론은 더욱 심화되어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조심스럽게 막내 아들이 회복 불가능한 기형아라서 일부러 감추고 있는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맞선 의견인, 단지 머리가 모자라서 그러는 것일 거라는 것에 더 점수를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아들 이름이 뭐였지?’ 박 의원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오랜 친우라는 인연을 이용해서 어렵게 저택에 들어왔으니, 소문이 자자한 막내를 보고는 가야 할 텐데.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박 의원은 곧 고민을 끝내버렸다. ‘나중에 생각이 나겠지.’ 태연하게 저택에 들어간 박 의원은 저녁 때가 되자,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입맛에 맞으셨는지 모르겠군요.” 박 의원을 보며 말하는 선우의 모습에 박 의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내 구경은커녕 박 의원은 선우에게 이끌려 지금까지 저택을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럴수는 없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박 의원은 굳게 결심했으니. ...잠시 후 박 의원은 선우가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으응? 무슨 소리가?” 스파이를 방불케하는 모습으로 저택을 헤매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잽싸게 모습을 감추던 박 의원은 한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다른 이들은 듣지도 못할 미세한 소리를 순간적으로 잡아낸 박 의원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여기군.” 동물의 육감으로 중얼거리면서 박 의원은 아름답게 세공된 원목 문을 천천히 열었다. “허억.” 안의 광경을 보고 놀란 박 의원. 방 안에는 한 꼬마가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문과 등지고 TV가 놓여 있었기에 박 의원은 이어폰을 끼고 TV에 열중해 있는 꼬마의 얼굴을 잘 볼수 있었다. 아아, 그런데 그 귀여움과 깜찍함이란... “정말 대단했지.” 황홀한 듯 중얼거리는 박 의원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고자 발버둥치는 민준을 박 의원은 꽉 붙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지.” 박 의원은 궁금했다. 볼에 젖살이 통통한 어린 꼬마가 저렇게 진지하게 보고 있는 TV프로는 대체 뭘까? 순간 연상되는 ‘뽀X뽀’라든가 ‘텔XX비’ 등을 생각하며 박 의원은 웃었더랬다. 디즈니 명작 만화도 좋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박 의원은 화면에 푹 빠져 있어 아직도 박 의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꼬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후훗, 정말 귀여워.’ 라면서 즐겁게 다가가는 박 의원의 눈에 커다란 TV화면이 가득 들어왔다. TV에서는 씨름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정말 놀랬지.” “그,그건 단순히 이상한 녀석이잖아요!” 당황한 얼굴로 소리치는 민준을 박 의원은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걸로 끝이 아니란다.” 잠시 후 선우에게 붙잡혀 얌전히 객실에 처박히게 된 박 의원은 밤을 새며 고민을 해야 했다. 이대로 윤 회장의 사택을 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무엇보다도 박 의원은 확신이 있었다. 윤 회장의 막내 아들이 자신을 굉장히 재밌게 해 줄 것 같다는. 그래서 박 의원은 낡이 밝기 전에 다시 탈출을 감행했다. 저택 내를 배회하던 박 의원의 눈에 누군가가 다시 포착되었으니... 아아, 저 뽀얗고 통통한 얼굴고 결좋은 까만 머리카락, 깜찍하기 그지없는 커다란 눈동자는 어제 봤던 꼬마가 아닌가? 박 의원은 조용히 꼬마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건 범죄 아닙니까?” “어허, 잘 들어 보라니까.” 그런데 꼬마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후다닥 돌려서 뒤를 살핀다. 그리고는 안심을 한 듯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몇 걸음 가다가 다시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저 모습은 마치 어딘가에 몰래 가는 듯한 모습이 아닌가. 더욱더 흥미가 생겨버린 박 의원은 꼬마의 뒤를 따라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박 의원은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눈을 씻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 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으니. 꼬마가 살금살금 온실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박 의원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온실로 들어간 꼬마는 어느 곳으로 걸어가더니 곧 한 가득 무언가를 품에 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박 의원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꼬마가 걸어갔던 곳으로 걸어가보았다. 온실 한 구석의 호박밭에 서서 박 의원은 무참하게 꽃이 잘려져 있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라는 얼굴로 빈정대는 민준을 박 의원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잘 들어 보라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객실로 돌아오는데 성공한 박 의원은 선우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고민을 했더랬다. 그 꼬마는 왜 호박꽃을 꺾어 갔을까? 선우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는데 윤씨 가문의 집사로 오랜 시간 일해온 해원이 황급히 무언가를 치우면서 시중을 드는 하녀들에게 거칠게 말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선우에게 해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됐어, 무슨 일이야?” “그게...” 머뭇거리면서 해원이 박 의원을 살펴보자, 선우가 더욱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 기색을 눈치챈 해원이 황급히 말했다. “요 며칠 새 누군가가 요강을 자꾸 식탁 위에 올려놓아서 말입니다. ” 이런 불상사가 생기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뒤이어 말하는 해원을 무시한 채 박 의원은 황급히 하인들이 들고 나가는 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진 요강을 열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강에는 노란색 호박꽃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혹시 바보인가요?” 민준은 진지하게 물었다. 그 의심섞인 눈초리에 박 의원이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윤 현이라는 것을 알고 현이에게 물어보았단다. 왜 호박꽃을 꽂아 놓았냐고. 그러니까...” “...”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을 바라보며 박 의원은 다시 그 때를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네 아버지랑 친한 사이란다.” “정말?” 머뭇머뭇 소파 뒤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현이에게 박 의원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아이가 넘어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뇌물용 과자까지 숨겨가지고 왔건만, 아이는 수줍어하던 처음과는 달리 박 의원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빼꼼히 자신을 쳐다보면서 배시시 웃는다. 그 모습에 그만 황홀해진 박 의원, 이성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아이를 부르자 소파 뒤에서 커다란 눈이 깜박깜박거리면서 수줍게 고개가 소파 뒤로 사라졌다. 박 의원은 선우가 돌아오기 전에 일(?)이 끝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리 와봐라, 착한 아이지, 현이는? 자, 아저씨가 과자 줄게.” 먹을 것으로 아이를 꼬셔서 겨우 손에 넣은 박 의원은 아이와 놀아 주다가 지나가는 말로 그 일에 대해서 물었더랬다. 그랬더니... “아침 식탁 위에 황금색 꽃이 꽂혀 놓여 있으면 무척이나 예쁠 것 같았대.” “...그런 이상한 녀석과 저를 결혼시키려고 했단 말인가요?” 무뚝뚝하게 말하는 민준에게 드디어 화가 난 박 의원은 입가를 굳게 다물고 말없이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육중한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박 의원을 보는 민준에게 박 의원은 조용히 선언했다. “이번 달 비행기표를 끊어놨다. 어쨌든 너는 가야만 돼. 그리고 네가 현이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 “...집에서 너에게 주는 원조는 앞으로 한 푼도 없을 줄 알아라. 참고로 다른 식구들에게 손 벌릴 생각 마라. 다른 식구들은 모두 이 말에 찬성했다.” “...가족 맞아요?” “너는 내 아들 맞냐?” 싸늘한 아버지의 말에 민준은 방문을 걷어차고 뛰쳐나가 버렸다. 그 뒤에 남겨진 박 의원은 민준에게 차마 말 못했던 꼬마의 말을 마저 기억해냈다. “그리고 거기서 꽃이 피면 갖다가 팔 거야.” “팔아?” “응. 그렇게 노랗고 이쁜 것이 굉장히 비싸대. 그러니까 가장 크고 노랗고 예쁜 꽃을 화병에 길러서 팔 거야.” 그리고 선우 형이랑, 미연 누나랑, 선재 형이랑, 아버지랑, 어머니랑, 해원 아저씨, 나중에는 집 모든 식구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그걸로 맛있는 것을 사 줄거라고 의가양양하게 말하는 꼬마를 박 의원은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박 의원은 조용히 외면했다. 이미 그에게는 자격이 없었고, 아이는 과거와 연관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그, 그런데 그 노랗고 이쁜 것은 혹시 금이라고 듣지 않았냐?” “응, 책에서 노란게 주렁주렁 열린다고 그랬어.” “...그 책 이름이 뭔지 혹시 기억나니, 현아?” “ 으, 으응?” “ 책 앞표지에 쓰여 있던 것 기억나니?” “신기한 도깨비 나라.” -25- “어머, 슬비 양, 언제 돌아온거니?” 살풋이 웃으며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말에도 슬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을 머릿속에 저장시키기라도 하듯이, 구석구석 나를 살펴보는 그 시선에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우훗, 그래도 짐이 없어서 오기 쉬웠었나 보네.” 연이은 양호 선생님의 말에 슬비가 그제서야 양호 선생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민현이 갑자기 나를 잡아당겼다. 흠칫 놀라며 민현을 바라보자, 민현은 어딘가 슬픈 듯한, 그러면서도 안심한 눈빛을 하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설마 누구 부탁인데 그냥 왔겠어요? 캐비넷 안에 넣어 뒀어요.” “아아, 슬비 양, 설마 오해한 건 아니겠지? 난 단지 슬비 양이 한국에 온 것이 기뻐서 말 한 것 뿐인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리는 양호 선생님의 모습에 슬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요. 그러면 전 현이와 같이 나가볼게요.” “어라? 하지만 윤 현군은 오랜만의 내 손님인걸.” 눈에 눈물을 매달고 애처롭게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민준의 말을 삭제시켜버렸다. 역시 그 녀석은 사기꾼이었던 게야. 괘씸한 녀석 같으니, 저 모습 어디에 민준이 치를 떨게 할 만한 저력이 숨어 있다는 건지. 나중에 방에 가서 민준이 녀석이 기어들어오면 녀석을 조용히 다그쳐 봐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슬비가 차분히 말했다. “저도 현이와 오랜만에 만났다고요. 게다가 현이에게 할 말도 있고요. ” “아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그 괴상한 취미 생활에 현이를 동참시키게 되면, 미연 언니가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이르지만 않으면 미연이도 모를 거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쯧, 하고 혀를 차는 슬비와, 역력히 실망한 눈길로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양호 선생님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미연 누나를 알고 있는 거야? 대체 선생님의 정체는 무엇? 아까 삭제시켰던 민준 녀석의 말이 슬금슬금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뻣뻣이 몸을 긴장시켰다. “현아, 가자.” 내 손을 잡는 슬비의 손을 갑자기 누군가 거세게 쳐냈다. 민현이었다. “잠깐,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인상을 굳히고 말하는 민현에게 슬비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오만하게 말했다. “글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 차갑게 뭔가 말을 하려는 민현을 나는 턱, 붙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민현을 끌고 양호실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환자입니다. 치료해 주세요.” 놀란 얼굴로 입만 벌리고 어버버 하며 나를 보고 있는 민현을 외면한 채 양호 선생님을 향해 말하자 양호 선생님이 애교있게 웃었다. “어머나, 민현군. 후훗, 왜 긴장을 하는 거지? 아아, 설마 환자를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거니?” 예쁘게 웃으면서 나폴나폴 민현에게 다가가는 양호 선생님, 그리고 나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도움을 청하듯이 바라보는 민현. ...왜 저러지? 미심쩍어하며 바라보는 내 팔을 슬비가 잡아당겼다. “그럼 나가서 애기 좀 하자.” 응, 나가자, 라고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역시 민현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조용히 양호 선생님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응? 윤 현군? 설마 윤 현군도 아픈 거야?”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묻는 그 모습에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은 왜인지.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는 양호 선생님에게 말해 주었다. “민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물어봐주세요.” “에엣~?” 이상한 비명 소리같은 것을 지르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양호 선생님을, 굳어 있는 민현과 슬비를 외면하고 나는 진심을 담아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되도록 녀석에게 부럽다는 말을 많이 해 주세요, 라는 의미를 심어 아직도 얼빠진표정을 하고 있는 양호 선생님에게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양호 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해 주면 녀석도 기운을 차리겠지. 그러니까 힘내라. 민현아. “여전하구나, 현이는. 어렸을때도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지.” 옅게 웃음지으면서 가볍게 말하는 슬비를 나는 멀뚱히 바라보았다. 엉뚱한 말과 행동? 나는 언제나 얌전히, 구석에서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자, 슬비는 또다시 웃었다. “지금도 그래. 어렸을 때는 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곤 했는데, 현이 너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 “나도, 모두들 조금씩 바뀌었거든. ” 그래서 이런 네 모습을 보니 무척 좋아, 라고 조금은 아련하게 말하는 슬비를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바뀌지 않았어.”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당당하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는 건 현이 너 뿐이야.” 나를 바라보면 슬비는 말을 이었다. “나, 약혼자가 있어.” 허, 허억, 약, 약혼자!? 약혼자라 함은 결혼을 약속한 사람으로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배필을 말함이 아니었던가. 선우 형이 어디 갈 때 옆에 달고 가기 편한 상대, 라고 말했다가 미연 누나에게 조용히 끌려나갔었던 바로 그 약혼자~! 참고로 선우 형은 미연 누나와 같이 나간 후 정확히 4일 만에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었더랬다. “응.” 고개를 끄덕이는 슬비는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축하해.” 일단 가장 무난한 말을 하자, 슬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단지 그뿐?”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더라? 멀뚱히 바라보자 슬비의 눈이 쓸쓸한 빛을 띄었다. “하긴, 현이 너의 감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 멋대로 기대를 품은 것은 나였지. 한 때는 그래서 너를 무척이나 원망하기도 했어. 지금...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약혼자가 생겼던 때가 언제였는지 알아? 11살에 약혼자라며 파티에 끌려가서 소개받고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었는지...“ 파삭하게 메마른 음성으로 말하는 슬비가 무척이나 추운 듯 보여서 나는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슬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슬비의 눈동자가 천천히 커졌다. 괜찮아. 나도 혼자서 넓은 방 안에 앉아 있을 때면 무척이나 추워지곤 했다. 웅크리고 앉아서 창문 옆에 달라붙어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럴 때 내가 보고 있던 것은 창 밖의 경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저 울창한 나무의 가지만이 드리워져 있는 창 밖의 경치가 아닌,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으면... ...어느 샌가 방문이 달칵 열린다. 그리고 선우 형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 주저 앉는다. 선우 형은 나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될 수 있으면 내 앞에 앉아서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했다.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냐?” 낮게 투덜거리면서 선우 형은 내 머리를 이렇게 문지르곤 했다. 그럴 때면 평소에 괴롭히면서 머리를 헝클어 놓는 것과는 달리, 손이 따뜻함을 한껏 품고 있어서, 나는 그제서야 몸이 차가웠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슬비도 자신이 추웠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듯 했다.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머리를 맡기고 있는 걸 보니. “고마워.” 어지간히 따뜻해졌겠다 싶어 손을 내리자 슬비는 나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훗, 그러고 보니까 하고 싶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번에 일본을 갔다 오면서 미연 언니를 만났어.“ 미연 누나를? “미연 언니의 특별 부탁이야. 선우 오빠나 미연 언니나 회사일로 바빠서 한 동안 너에게 신경을 못 써줄 것 같으니까, 내가 옆에서 너를 도와주라고 하셨어.” ...그,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간 선우 형의 전화가 뜸하긴 했다. 전화를 해도 30분 정도만 통화하고 끊곤 했지. “많이 바쁘대?” 그렇게 일하다 보면 몸이 상할 텐데... 걱정이 되어 묻자 슬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기보다, 해결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하시던걸? 뭐, 그런 이유로 앞으로 잘 부탁해, 현아.“ 손을 내밀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슬비를 바라보자 슬비가 고개를 끄덕여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 고집스럽게 말하자, 슬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렇긴 하지. 내가 부탁받은 것은 현이 너에 대한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 “...주변 환경?” “아아, 그런 게 있어.” 라면서 장난스럽게 웃는 슬비를 보고 나는 떨떠름하게 슬비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보니 9반 담임 선생님께 가 봐야 될 것 같네. 쿡, 나도 소문이 자자한 9반 전학생들 중의 한 명이 되는 건가?” 응? 하면서 바라보자 슬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혼잣말이었어.” 무언가 이상한 말을 들었던 듯한데? 고개를 갸웃하자 슬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봐. 조만간 계속 마주치게 될 테니까.” -26- 다음 날 민현과 재범, 승호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민현은 아프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녀석들은 무슨 일이지? 게다가 승호는 어제 나갈 때 상황 자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내 옆에서 민준은 열심히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아아, 시끄러워. 민준 녀석은 어제 밤 늦은 시간에 꾸물꾸물 내 방으로 기어 들어왔다. 술 냄새를 잔뜩 풍기는 녀석을 밀쳐 내자, 나를 보고 씩 웃는다. 내가 질색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 당겨서 품에 안는 녀석이 얄미워서 발로 퍽퍽 차대는데도 녀석은 잠 한번 깨지 않고 잘도 잤더랬다. 아침에 부은 눈으로 일어나서. “아아, 내 완벽한 미모에~!” 라는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시끄러워.” 결국 삐용 삐용 하는 소리가 거슬려서 톡, 하고 내쏘자, 민준이 히죽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거냐? ” 그냥 솔직히 부럽다고 말해, 라고 이죽거리는 녀석을 한 대 쳐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래, 진작에 내가 피하는 게 낫지. 저 녀석은 사기꾼에 암 같은 녀석이야,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걸음을 옮겼더랬다. 그 결과 마주치게 된 꼬맹이를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없는 별관 옥상 쪽으로 다가가자 어디선가 꼬맹이 하나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165가 안 되보이는 땅딸막한 키를 하고 내 옷자락을 덥썩 쥐는 꼬맹이를 나는 한 동안 놀래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꼬마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억, 이런, 혹시 내가 겁을 준 건가?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상냥하게 말했더랬다. “여긴 고등학교다. 중학교는 저 쪽, 초등학교는 여기서 30분 정도 걸어야 돼.”‘ 그러자 꼬마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다시 파래진다. 그 모습에 다시 친절히 말해주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그러자 꼬마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파르르 떠는 것이다. 이런, 설마 우는 건가? 곤란해하며 보는데 갑자기 꼬마가 고개를 팍 들었다. “난 고등학교 2학년이야~!” ...설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꼬마의 얼굴이 다시 붉게 변했다. “...왜,왜 그렇게 보는 거야?”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꼬마의 위 아래를 쓱 흩어보았다. 다시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꼬마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허, 허억,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믿어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흑, 흐윽, 물론 너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너는 많이 가졌잖아? 그러니까, 제발 빼앗아가지 말아줘.“ 울먹거리는 꼬맹이 앞에서 나는 정말로 난처해졌다. 설마 나는 이 꼬마에게서 무언가를 빼 앗은 적이 있었단 말인가? 생각나지 않는 과거의 악행 앞에서 나는 그저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흑, 그러니까 제발 재범이를 내게 돌려줘.” 뒤이어 말하는 꼬마를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뭐?” “흑, 겨우 맘을 돌려놨었는데, 네가 와서 모두 엉망이 되 버렸어. 어차피 너는 신경도 안쓰잖아? 나는 재범이가 없으면 안 돼.“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간절히 말하는 꼬마의 앞에서 나는 그저 되풀이 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이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서...말릴 수가 없어. 저렇게 마구 돌아다니면 다른 녀석들이 가 만 있지 않을 거라고~! “ 저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하면서 다시 울먹거리는 꼬마에게 나는 차갑게 말했다. “재범이는 어디 있어?” 나도 알아야겠다. 먼저 외면했었던 네가, 도리어 나를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렇게 잊지도 못하게 계속 너의 존재를 나에게 알려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나는 너란 존재를 과거 네가 그랬듯이 깨끗이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흑, 아까 술집에서 대명고 녀석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나갔어. ” “어디로?” “잘 모르겠지만...xx동에 있는 폐공장으로 간 것 같아.” 나는 꼬마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벗어났다. 나중에 나는 걷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뛰고 있었다. 학교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xx동 공장으로 가 주세요.” 말하자 택시 운전 기사가 나를 힐끗 보았다. “네?” “xx동 공장이요.” “저기 어딘지...” 머뭇거리면서 말하다가 운전 기사는 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고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앞만 바라보았다. 재범이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녀석을 만나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예전의 녀석으로 돌려놓고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손님, 도착했는데요.” 머뭇거리며 말하는 운전 기사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쥐어주고 나는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택시 기사를 무시하고 나는 작은 공장앞에 멈춰섰다. 앞에 있는 육중한, 녹슨 철문을 노려보다가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 안에, 재범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문을 열고 힘차게 소리쳤다. “안재범~!” 그러자 내 고함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었다. 나도 행동을 멈추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박스를 어깨에 매고 있던 사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한 손에 오징어를 여러 개 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운데에서는 위잉~ 소리를 내면서 기계가 돌아간다. 구석에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던 사람들, 기계에 달라붙어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징어를 말리는 중이었던 듯, 오징어가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던 아저씨가 떨리는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하, 학생은 누구여?” “...” 여기서 뭐라고 말할까. “재, 재범이 없나요?” 더듬거리며 말하자 아저씨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재범이가 누구여?” “....” “....”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재범인 찾았냐?” 내 뒤에서 서 있던 한 녀석이 웃음을 참는 듯한 어조로 물어봤다. “...” “큭, 크큭, 안에서 뭐하고 있었대? 오징어라도 말리고 있었던 거냐? 재범이 그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푸하핫, 웃으면서 말하는 녀석을 나는 원념을 담아서 꾹꾹 밟아주었다. 입 닥쳐, 박 민준~! -27- “넌 왜 여기 있는 거냐?” 녀석을 신나게 밟아주다가 겨우 이성을 되찾고 묻자, 민준은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널 따라왔지.” 오냐, 장하다. 째려보는 내 눈길에 민준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뭐, 따라오는 내내 모르던걸. 어지간히 급했나봐? 가는 곳이 이런 곳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만하지 못하겠냐. “됐어, 나 간다.”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택시를 잡으러 길가로 나가려 하자, 민준이 내 팔을 탁, 잡았다. “흐응, 그냥 학교로 가게?” “아니, 다른 곳을 찾아 봐야지. ” “그래?” 씩 웃는 녀석을 보자 등가에서 뭔가가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것 같다. “설마 너는 같이 안 가겠지?” “물론 같이 갈 거라고 생각하네만?” “... 싫어.” “어허, 그러고 보니 천 회장님 뵌지가 오래 된...” 크아악~! 속으로 절규하며 바라보자 민준이 느긋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나를 데려가는 게 좋을걸? 나는 재범이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거든.” “...” 결국 나는 민준을 데리고 그 문제의 폐공장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폐공장은 의외로 오징어를 말리던 공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폐공장이라기보다는... “흉가지.” 민준이 간단하게 풍경에 대한 감상을 정리했다. 낡은 2층 양옥집은 담이 반쯤 헐려 있는 상태였고, 주변에는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다가가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손잡이에 피가 묻어 있는게 아닌가. 어헉, 하고 나는 놀란 숨을 들이키고 황급히 문을 열었더랬다. 문을 열자 오랫동안 방치된 곳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강렬한 냄새에도 아랑곳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환한 밖에 있다가 어둑어둑한 집 안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는다. 눈을 깜박이다가 나는 구석 한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뿌옇게 허공을 타고 올라오는 담배 연기, 그리고 느껴지는 존재감. 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낡은 마룻바닥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삐걱댔다. 뒤에서 민준이 현관문을 닫고 느긋하게 따라오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곧장 걸어갔다. 재범이다. 재범은 눈을 감고 구석에 외로이 앉아 있었다. 얼핏보면 자고 있는 것처럼, 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재범의 입에 물려진 담배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가, 녀석이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호, 이것 봐라? 그런 재범의 태연한 태도가, 나는 문득 무척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창피를 당해가면서까지 녀석을 찾았는데 이 여유만만한 녀석의 태도는 뭔가.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잡아서 제지하고, 재범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재범의 눈이 번쩍 떠졌다. “허억.” 아, 순간 정말 놀라버렸다. 무서운 녀석, 내 흉흉한 기세를 알아차리고 눈을 떠 버리다니. 조금만 있었으면, 내가 스스로를 못 이겨 녀석을 한 대 때려주기라도 했을 텐데. 아까움에 안타깝게 재범을 보자, 재범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입술을 꽉 깨문다. 입술은 이미 터져서 주위에 피 딱지가 엉켜 있었고, 볼 한 쪽에는 베인 상처 비슷한 자상까지 길게 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재범의 어깨 한 쪽이 검붉은 것으로 물들어져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야, 너...” 하얗게 질려서 재범을 흩어보자, 더러워진 옷 위로 언뜻언뜻 보이는 검붉은 얼룩들이 확연히 들어왔다. 재범은 천천히 입에서 담배를 빼내 한 쪽 손에 쥐었다. “윤 현, 여긴 뭐하러 온 거지?” 재범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런 녀석의 말도 힘이 빠져 있는 듯 들리는 것은 나의 착각인가? “그야, 놀러왔지.” 씩 웃으면서 뻔뻔하게 말하는 민준 녀석. 그건 너나 그렇지~! 라는 외침을 마음 속에 저장시키며, 나는 조용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꺼져.”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재범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는 민준에게 말했다. “너는 다리를 잡아.” 아무래도 내가 팔을 잡는게 낫겠지. 그래도 명색이 사촌인데 설마 때리기야 하겠어? 내 말에 민준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날 쳐다본다. “....뭐?” “뭐해? 자, 하나 둘 셋 하면 잡는 거다. 하나 둘 셋!” 말하고 동시에 영차, 하면서 나는 재범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바보 같은 민준이 녀석이 멍하니 나를 보고만 있는 게 아닌가. 재범은 놀랐는지 팔을 바둥거리면서 나를 뿌리치려 했다. 나는 죽자 살자 재범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 와중에 재범의 손에 쥐어 있던 담배가 내 옷 위로 떨어졌다. 바지 위로 떨어져서 치익~, 소리를 내며 옷을 그을리는 담배를 나는 경악해서 바라보았다. “어엉?” 너무 놀라서 그 말만 하고 계속 옷을 태우는 담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후다닥 다가온다. 잽싸게 담배를 저 멀리로 보내고, 연신 담배가 떨어졌던 부위를 문질러댄다. 안 그래줘도 되는데, 옷만 탄 거니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손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다급하게 말하면서 내 얼굴을 살펴보는 재범은 무척이나 놀랐는지,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흐음, 뭐야, 정작 살은 태우지도 못했잖아.” 그 옆에 서서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민준, 그래, 내가 너에게 뭘 바라겠냐. 너는 그냥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어주면 안 되냐? “돌아가.” 재범은 어느 새 무표정으로 돌아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왜인지. “싫어.” 단호하게 말하자, 재범의 눈썹이 꿈틀, 하고 위로 올라간다. “...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 소리치는 녀석에게 나는 질세라 소리를 높였다. 이런 것은 기선 싸움이라고 선우 형도 그랬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거다. “그럼 너는 왜 내 앞에서 돌아다니는 건데!” 갑자기 재범의 눈동자가 암울하게 변해갔다. 상처 입혔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도 많이 억울했고, 또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먼저, 내가 싫다고 옛날에 무시했던 것도 너잖아~! 그런데 왜 지금 나한테 이렇게 행동하는 건데!” 주르르 내뱉고서 나는 겨우 가출한 이성을 찾아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재범의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녀석도 크게 소리친다. “무슨 소리야~! 네가 그 날 일 때문에 내가 싫어졌다고 그랬잖아! 내가 똑똑히 들었어! 게다가 그 후 내가 보기 싫다고 미국까지 가서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 다른 놈과 웃으면서 돌아다니다니! 대체 저 놈은 허락되는 이유가 뭔데!” 절절히 감정이 실린 그 말에 나는 다시 불끈 화가 치솟아 올랐다. “넌 또 무슨 소리야! 난 이제까지 미국은 커녕, 제주도도 못 가봤어! 그리고 다른 놈이라니, 그건 또 뭔 말이야?!” 소리치자, 재범의 눈길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 날 내가 똑똑히 들었어~! 선우 형에게 다시는 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녀석의 말을 도중에 끊고 나는 버럭 외쳤다. “그거야 네가 날 무시했으니까!” “그야 네가 그 날 일 이후로 내가 싫어졌다고 했으니까!” 하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 녀석? 씨근덕 거리며 숨을 고르는데 뒤에서 민준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뭐하는 거냐, 너네? 무한히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고리냐? 서로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면서 말이 안 통하고 있잖아.” 그래, 그거야! “네가 쓸모가 있을 때가 있구나.” 기쁜 마음으로 민준을 향해 칭찬의 말을 날리자, 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던 재범이가 날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현이 너 그 날 일 때문에 내가 싫어졌던 거 아니었어?” “그 날 일이 뭔데? 너야말로 내가 친구 하나 없다고 무시했던 거 아니었냐?” “...절대 아닌데?” 멀뚱히 나를 바라보며 금시초문이라는 듯 말하는 재범을 나 역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럼, 그 날 일은 또 뭐냐?”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끼어드는 민준의 말에 재범이 쓱, 시선을 외면한다. 어어? 왜 저러지? 이제까지 소리치느라 흥분해서 그런지 재범의 귓가가 발그레하게 물드는 것을 보며,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럼, 민준아, 이제 너는 발을 잡아라.” 영차, 하면서 다시 재범의 팔을 잡으려고 하자 재범이 후다닥 나에게서 멀어졌다. 아쉬움에 물끄러미 쳐다보자, 민준이 황당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저 녀석 발과 팔을 잡아서 대체 뭘 하려는 거냐?” 뭘 하긴, 당연히... “다친 것 같아서 데려가려고.” “...너 재범이가 엄연히 인간이고 말귀를 알아듣는 상대라는 건 알고 있냐?” 그야, 당연히.. “참,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순간 재범이 몸을 휘청했다. “...그러면 어떻게 데려가려고 했는지 물어봐도 되냐?” 힘겹게 묻는 민준에게 나는 태연히 말했다. “그야, 팔 다리 들어서 잡은 후 앞으로 던지면서 데려가려고 했지. ” 그럼 좀 수월하게 데려 갈 수 있을 거 아니야? 하면서 웃자, 민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전에 죽지 않을까 싶다.” 결국 나는 민준, 재범이와 같이 그 흉가를 나왔다. 아무 말 없이 날 따라오는 재범이를 기특해 하며 나는 술집에서 재범이와 같이 나갔다는 녀석들에 대해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건... 그냥 있다가 먼저 갔다.” 아까 소리치던 것은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재범이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맞고서 뛰쳐나간 거겠지. 저 그로테스크한 현관문의 예술성은 그 녀석들이 만든 것일 거 아니야?” 잽싸게 끼어들어 나불대는 민준을 재범이가 쓰윽, 하고 노려보자 민준이 느끼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어허, 그런 발칙한 눈으로 날 보다니, 도움이 필요 없는가 보지?” “...뭐?” 도움이 되는 민준이 녀석이라니, 상상이 안 간다. 재범이와 나의 합동 째림 공격을 받고 민준이가 거만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능숙하게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꾹 누른다. “아아, 누님, 아, 물론이죠. 네.” 연신 누군가와 말하더니 민준은 갑자기 핸드폰을 손으로 누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후훗, 누님이 태워주신다는군. 자아, 가련한 중생들이여, 원한다면 애원해보시게.” “...택시 부르자.” “...차라리 걸어간다.” 재범과 나의 연이은 말에 민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쳇, 재미없는 녀석들. 됐다, 됐어.” 투덜거리면서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말한 후 핸드폰을 끄는 녀석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익숙한 누님이라는 호칭, 그리고 이상하게 느끼한 말투, 녀석은 혹시~! “너, 혹시 누나 있냐?” 내 말에 민준이 아니, 왜?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너, 혹시 일선에서 일했냐?” 조용히 묻자 민준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어떻게 알았냐? 너처럼 둔한 놈이?” 아아, 역시. 녀석은 판매업 종사자였던 게야. 하면서 나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의 사기꾼 냄새가 폴폴 나는 분위기까지 모두 이해가 되는 게...너도 힘들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민준의 어깨를 토닥토닥 대자 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 뭔가 민준이 말하려는데 타이밍 좋게 검은색의 날렵한 스포츠카가 우리 앞에 섰다. “오랜만이야, 민준아.” 쓰윽, 하고 문이 열리더니, 금발로 화려하게 머리를 물들인 늘씬한 여인이 나타났다. 갈색 빛의 얼굴에 눈가에 찍힌 점이 예쁘다. 화려하게 화장을 한 미인에게 민준은 능숙하게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지민 누나.” “고맙긴, 뭘. 이 아이들은 네 친구들이니?” 누나가 눈을 휘면서 예쁘게 웃으며 말하자, 민준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같은 반 녀석들이예요.” ...그나마 모르는 사람이라고 안 해 줘서 고맙구나. “후훗, 알았어. 저기, 내 이름은 신 지민이야. 너희 이름은 뭐니?” “윤 현입니다.” 당황해서 짧게 대답하자, 누나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아, 그래. 반가워.” 너는? 하는 시선으로 누나가 재범이를 바라보자 재범이는 쓰윽, 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녀석, 부끄러운가 보다. 그 모습에 어렸을 때의 재범이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민준이 날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안 타고 뭐해?” 아아, 그렇지. 후다닥 차에 올라타자, 뒤이어 민준이 누나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 가 학교로 출발했다. 경쾌한 댄스 음악이 나오는 차 안에서 지민 누나는 자칫 잘못하면 가라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학교로 들어갈 거니?” 이미 수업은 거의 끝났을 것 같은데? 하면서 묻는 지민 누나에게 민준이 태연히 대답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요. 이번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아 있는 한 들어가 봐야죠.” 어억, 저 녀석이 어디서 거짓말을~! 상습 땡땡이에 툭하면 술먹고 기어 들어오는 녀석이 뭐? 학생의 본분이 어째? ...어쩌면 저 녀석은 박 민준이 아닐지도... ...혹시 아까 박 민준을 어디다 빠뜨리고 왔었나? 멍해 있는데 옆자리에서 심상치 않은 숨소리가 들렸다. 응? 하면서 돌아보는데 재범이의 얼굴이 새빨갰다. “너...!” 급히 재범이의 얼굴을 손으로 짚고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 뜨겁다. 이미 정상 체온을 넘은 온도다. “그냥 감기야. 신경쓰지 마.” 재범이는 쉰 목소리로 말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게 지금 신경 쓰지 않을 일이냐~! 재범이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누나가 차의 속력을 높였다. 처음 학교를 나올 때와는 달리 금방 학교에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재범이를 끌고 나왔다. “아아, 다음에 또 봐.” 의미심장하게 웃는 지민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기숙사로 향하자, 곧 민준이 뛰어와서 재범을 부축한다. “감기군.” 민준은 경쾌하게 말하고, 그러게 왜 궁상을 떨고 다녀. 하고 얄밉게 덧붙였다. 지금이 그런 말 할 때냐~! 끙끙대며 재범을 데리고 기숙사 내 방으로 데려갔다. 재범을 휘장이 쳐진 화려한 침대에 누이자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그대로 쓰러진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재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멀뚱히 나를 쳐다보며 팔짱을 낀 채 태연히 의자에 앉는 민준을 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가서 양호 선생님을 불러...” “기각! 너 저녀석 죽일 일 있냐?” “왜?” “...그 여잔 생체 실험 매니아란 말이다!” 치를 떨면서 말하는 민준을 의심쩍게 바라보자, 녀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너 벌써 만난 건 아니겠지?” “어제, 봤는데. ” 민현이 아픈 것 같아서 데려다 주고 왔지, 하고 덧붙이자, 민준은 허공을 쳐다봤다. “어쩐지, 오늘 결석을 했더라니. 불쌍한 녀석, 미인계에 넘어가냐.” 중얼대는 민준 주변에서 어쩐지 광기 같은 게 흘러서, 슬금슬금 물러서는데 재범이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럼, 의사를 불러...” “기각! 기껏 감기에 출장 의사를 부르냐? 넌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약 사올 테니까.”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민준이 나간 후 나는 할 일 없이 재범을 바라보았다. 하늘거리는 휘장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재범을 보고 있자니, 마치 공주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거슬리는 핏자국도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가냘파 보이는게... 내가 책임지고 간호해줄게~! 라는 마음을 솟아오르게 한다. 자, 그럼 감기에 좋은 게 뭐가 있더라? 고개를 갸웃 하다가 우선 열을 식혀주기 위해 냉장고에 가서 얼음을 꺼냈다. 그대로 이마에 올려놓아 주기에는 뭔가 어색하다. 서랍을 뒤져서 비닐 봉지를 꺼낸 후, 봉지 속에 얼음을 가득 넣어 이마에 올려놔 주었다. 의기 양양하게 그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영양식에 생각이 미쳤다. 좋아, 이왕 한 김에 완벽하게 해 주지! 하면서 나는 냉장고를 뒤졌다. 민준이 돌아온 것은 나간지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확히는 내가 녀석이 나가서 약을 만들어 오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약 봉투를 만들어 오는 건지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오늘 안에만 와 다오~! 하고 외칠 때 쯤이었다. 기다림에 지쳐 느긋하게 들어온 녀석에게 화도 나지 않아, 녀석이 내미는 약봉투를 받아들고 재범을 깨우려고 휘장을 걷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침대가 물 천지다. 이미 재범은 의식이 없는 듯했다. “...너 재범이가 그렇게 싫었냐?” 심각하게 묻는 민준을 나는 살며시 외면했다. ...봉지에 구멍이 뚫려 있었나 보군. 뿌듯한 마음으로 넣었던 수많은 얼음들은 장렬히 녹아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이 상태로는 없던 병도 생기지 싶어, 얼른 민준을 채근해서 재범을 들어서(라기보다는 굴려서) 바닥에 놓았다. “재범아, 일어나.” 재범을 붙잡고 큰 소리로 외치는데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민준이 진지하게 재범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집어 보았다. “...괜찮냐?” 차마 살아 있냐? 라고는 지은 죄가 있어서 물어보지 못하고, 빙 돌려서 묻자 민준이 얼굴을 찌푸린다. “내일까지 정신을 못 차리면 구급차를 부르자. ” ...그 정도냐? 허억, 경악해서 입을 다물고 서 있자 민준이 나를 힐끗 보았다. “괜찮아. 그 동안의 정을 살펴서 고의가 아닌 사고라고 말해줄게. 그럼, 우리 먼저 입을 맞춰 놓자.” 나중에 말이 어긋나면 큰일 나잖아, 라고 말하는 민준을 노려보면서도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쩌지? 재범아, 일어나봐, 재범아!” 재범의 목을 잡고 달달 흔들면서 재범을 부르자 민준이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이제는 확인 사살이냐...” 다 들린다. 막 녀석에게 뭐라고 해 주려고 하는데, 재범이 힘겹게 눈을 떴다. “...ㅁ...” 반가움을 못 이겨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녀석을 내 쪽으로 잡아 끌었다. “뭐라고?” “...ㄴ...ㅈ...” “뭐라고? 잘 안들려” 하는데 민준이 내 손을 턱 잡더니 재범의 목에서 손가락을 하나 둘 씩 떼어냈다. “....아...” “미안하다. 네 편은 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무서운 녀석, 다른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당히 질식사를 시도하다니, ” 나를 힐끔거리면서 슬금 슬금 물러나는 민준을 무시하고 나는 아까 열심히 만들어 왔던 음식을 가져왔다. 자, 이거 먹고 힘내, 재범아. 그릇에 만들어 놓은 것을 하나 가득 담아 오자, 민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이상한 냄새는 뭐냐?”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긴 하다. 하지만... “몸에 좋은 게 먹기에는 쓰다잖아.” 태연히 말하자 민준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그릇 속에 들은 것은 뭐야?” “감기에 들었을 때 먹으면 좋은 것.” “뭔데?” “오렌지 쥬스.” “...왠지 김이 나는 것 같네만?” 떨떠름하게 말하는 민준을 나 역시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그야 끓였으니까.” “...오렌지 쥬스를?” “응. 오렌지가 감기에 좋다고 하니까. 차가운 걸 먹이는 것보다 따뜻하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 말을 듣고 민준이 다시 구석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린다. “...이젠 독살이냐.” 민준을 무시하고 나는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재범을 부축해서 벽에 기대어 앉혔다. “재범아, 약 먹어야 하니까 이 것 좀 먹어.” 재범이에게 먹이려고 그릇을 들고 숟가락을 입으로 밀어 넣어주는데 처음에는 반응이 없다가, 나중에 입이 살며시 열린다. 이 틈에, 하면서 나는 열심히 숟가락으로 오렌지 쥬스를 떠서 넣어 주었다. 급기야는 먹여주는 것이 신나져서 큰 그릇 하나 가득 있던 쥬스를 결국 다 먹였다. 후훗, 하고 만족스럽게 웃고, 나는 재범이에게 감기약까지 마저 먹였다. “자, 이제 자라.” 재범이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서 재범이를 다시 바닥에 뉘였다. 귀여운 녀석,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재범이가 덩치 큰 동생처럼 느껴져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민준은 그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계속 궁시렁대고 있었다. “...오늘 잠은 대체 어디서 자라는 거냐. 침대를 저 꼴로 만들어 놓고 그래, 웃음이 나오냐?” ...나는 모처럼 관대한 마음으로 가뿐히 민준의 말을 무시해주었다. 재범이는 다행히 그 날 밤 한 번 잠에서 깨더니, 쥬스와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에는 의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괜찮아?” 녀석을 보고 묻자 재범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눈빛이 슬프고, 또 그러면서도 지쳐 보여서 나도 마주 재범이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재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움찔거리면서도 얌전히 앉아 있는 녀석이 귀엽다. “...미안.” 한참만에 재범이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 뭐가 그리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받아줄테니까 그런 눈빛 하지마. “그럼 오해 다 풀린 거지?” 나지막이 말하자 재범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우린 친구지?” 느닷없이 나간 말에 말하고 나서도,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그럼에도 취소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 재범이는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하다. 이제 녀석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혼자 아파하는 일은 다시 없도록 해야지. 재범이가 어렸을 때 약속했듯이, 나도 사실 이제까지 한 번도 재범이를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민준이 볼멘 소리로 타박을 놓을 때까지 나는 한참동안 재범이를 안고 서 있었다. “아, 참. 이거 먹고 가.”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나가는 재범이에게 나는 오렌지 쥬스를 다시 끓여서 갖다 주었다. 재범이의 얼굴이 상당히 묘해지더니, 민준이 진지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너 오렌지 쥬스를 도대체 몇 병이나 끓인 거냐?” “...냉장고에 있는 것 다 넣었는데?” “...그 많은 걸?” “응. 내가 직접 만들었어, 재범아.” 재범이는 움찔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사발을 쳐다보다가 쉬지 않고 한 입에 다 먹었다. 그래, 그렇게 아팠으니 배고플 만도 하지. “괜찮아, 천천히 먹어. 아직 많아.” 잘 먹는 모습에 흐뭇해져, 아예 솥째로 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재범이는 감격했는지 울 듯한 얼굴로 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나이 17, 늦봄에 친구가 생기다.- -28- 부제 : 성장기 2 민준은 잔뜩 열이 받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인데, 자신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더욱 마음이 끓어 오른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짜증나. 지겨워. 그저 아무 것이나 잡아서 부숴버리고 싶다. 그러면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해질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민준이 지금 얌전히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참고 있는 것은 파괴 후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잔뜩 무언가에 화풀이를 한 후 허탈해지는 몸과 마음은 이미 질리도록 겪었다. 그 정신 나간 아버지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한 명령을 받았던 후부터, 민준은 이미 오랜 시간 방황하며 다쳐왔다. 짜증나. 다시금 되뇌이며 민준은 걸음이 가는 대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 “야야, 아직 어려 보이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 겁 먹을라.” 시끄러. 하긴, 이런 것은 아무리 나라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곳에나 이런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내가 어떻게 했더라? 민준은 비릿하게 웃었다. “자, 잘못했어.” 추하게 울면서 빌고 있는 녀석을 민준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상관없다. 이 녀석이 아픈 것은 나와 상관없어. 그리고 나는 지금 정당하게 행동하고 있는 중이야. 민준은 사정없이 녀석을 걷어찼다. “컥, 커억.” 부들부들 떠는 녀석을 민준은 무심히 외면했다. 지루해. 어디론가 가고 싶다. 어디로? 고개를 돌린 민준의 시야에 파란 하늘이 잡혔다. 그래, 바다도 좋겠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여름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휴가철이 아니다. 게다가 일부러 골라서 온 곳은 관광객이 들끓는 바다가 아니라, 광주의 이름없는 작은 천(川)이었다. 물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그저 풀리지 않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것이었기 때문에 민준은 경치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민준은 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름답게 웨이브가 진 긴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목가에서 살짝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흰 목이 가냘팠다. 여인은 정신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쓰레기가 널려있는 더러운 개천 가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혹은 찾고 있듯이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마음을 잡아끈다. 쓸쓸하고 고독해 보이는 가냘픈 뒷 모습이 왠지 눈길을 잡아끈다. 민준은 그 곳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천천히 몸을 돌려 민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내리깔리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그 사람의 외양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밤색의 눈동자와 흰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민준은 더 이상 다른 것을 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눈에서 천천히 흘려내려오는 눈물에 생각이 멈춰졌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곁을 지나갈 때도 민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 후 민준은 매일 같이 그 개천에 나갔다. 그 사람은 그 후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를 실망감이 가슴을 채웠다. 이게 대체 뭐지?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민준은 그 원인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민준은 의식처럼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을 뿐이다. 오늘도 그 개천 가에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젠장, 아버지인가? 민준은 이를 갈았다. 자신을 아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가장 먼 곳으로 떠났었다. 내려 보니 광주라는 것도 민준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저 아버지의 눈을 피하면 모든 것이 족했으니까. 그런데 벌써 꼬리가 붙은 것 같다. 아니, 벌써가 아닌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양반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지켜봐주겠다는 강자의 여유다. 민준은 최대한 여유있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골목들 사이로 빠졌다. 광주에 와서 복잡한 골목길이 고맙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겨우 꼬리를 잘라내었다고 느꼈을 때 민준은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오지 않았겠지. 돌아갈까. 아무 여관이나 골라잡아 걸음을 옮기려다 민준은 멈칫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 날도 개천가로 나간 민준은 아무도 없는 그 곳에 한참을 서 있다 돌아와야 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그 다음에는 또다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민준은 홀린 듯이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면 꼭 이름을 물어봐야지, 했던 다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이 자신을 향한다. 꿈인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는 그 사람의 손을 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잡아챘다. 생각보다 더 가냘픈 것 같아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내일도...오실 건가요?” 엉뚱하게도 물어본 말은 이것이었다. 자신을 한 없이 책망하고 있는데 그 사람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아무 일 없으면요.” 스르륵, 힘이 풀려 손을 놓자 그 사람은 살며시 웃고는 자리를 떠났다. 마치 환상처럼. 그 다음날 민준은 설레는 마음으로 개천에 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곳이다. 그 곳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사람은 그 날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 곳에 온지 얼추 한 달이 넘어간다. 그 사람은 그 후 사나흘에 한 번 꼴로 개천가에 나오곤 했다. 민준은 그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일단 그 앞에 서게 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그 사람과 같이 멍하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했다. 몇 년간, 아니 아주 옛날에도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쳐다보는 어딘가의 허공을 민준도 바라보곤 했다. 뭐, 그래도 알게 된 것은 몇 가지 있었다. 이 사람이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를 가졌다는 것, 무척이나 아프고 슬픈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준은 오늘 그녀에게 작별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해야만 했다. 망할 아버지가 결국 사람을 보낸 것이다. 걱정을 가장한 협박을 전해들은 이상 여기서 더 미적거리고 있으면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민준은 서울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아마 민준이 이길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역시 이대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은 억울하다. 무엇보다... “ 박 민준 군, 맞으시죠?” “...네?” 민준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저 되물었다. 민준은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그녀에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민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제까지 나눈 대화는 그저 날씨라든가, 순간의 감상이라든가 하는 소소한 것들밖에는 없었다. “실은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 아무 말도 못하고 민준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고동색 눈동자가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죽어가는 듯한 시린 느낌이 어려 있다. “저는...당신을 이용할 거예요.” “...왜...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당신을 통해 하려는 것은 당신의 동의가 없으면 힘든 일이거든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무엇보다, 당신은 제가 하려는 복수에 아무 책임도 없어요. 이것은, 그저 죄책감이라고 해 두죠.” “...복수?”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곱고 예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런 처절한 눈빛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아픈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저 사람인데 왜 이렇게 자신의 가슴이 조이는지 알수 없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냥 이 곳을 떠나세요,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민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온 몸이 아프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민준은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나는, 나는 지금 단지 아픈 것 뿐이다. 단지 그것 뿐이야. 그녀는 그런 민준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제 이름은, 카나하라 유키예요. 유키라고 불러주세요.” -소년, 14세에 열병에 걸리다.- -29- 어제 많은 일들을 겪어서인지, 오늘 따라 학교가 무척 새롭다. 감탄사를 터뜨리며 주위를 바라보자, 민준은 촌스럽다고 나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녀석, 입가에 묻은 침이나 닦고 말하지. 교실 앞에 도착하자, 벽에 기대 있던 작은 인형이 내 쪽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쪽이군. 재범이는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꿋꿋하게 교실까지 잘 따라오고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재범이는 그 많은 것을 다 먹으려는 듯 쉬지도 않고 쥬스를 마셔댔다. 그런 재범이에게 싸 줄테니 가져가서 먹으라고 말하자 재범이는 무척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눈물이 고일 정도라니, 그렇게 좋아하면 내가 부끄럽잖아. 내가 재범이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챙겨 주었던 커다란 보온병을 한 손에 들고 재범이는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그러자 벽에 기대 있던 사람이 우리, 아니 재범이에게로 다다다 뛰어온다. “...괜찮아?” 달려온 꼬마는 걱정스런 얼굴로 재범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재범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만히 말했다. “돌아가. 나중에 말하자.” 그리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꼬마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터덜터덜 떠나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불쌍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어머, 현아, 여기서 뭐해? ” 발랄하게 말하는 목소리.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슬비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 옆에 있는 커트 머리의 키 큰 여학생이 나를 보고 고개를 까닥한다. “아아.” 쉽사리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뒤에서 왜인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 있는 승호를 봤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여학생에게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아아, 맞다. 인사해. 이 쪽은 현 승희, 승호 약혼자야.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왔어.” 슬비는 여학생을 소개하고는 승호를 바라보며 마치 배부른 고양이같이 씩 웃었다. 그러자 승호는 나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잘 부탁해.” 승희라는 아이는 나를 향해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무척 묘한게...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어떤 각오에 가득차서 빛나고 있다. 나는 말없이 그 손을 잡아주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안에 들어가자 또다시 교실이 조용해진다. 참 이상한게, 우리 반 아이들은 매일 밤을 새서 공부하는지, 내가 보는 반 아이들은 언제나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있다. 무서운 것들, 아직 1학년인데도 저렇게 공부를 하고 싶을까. 뭐, 명색이 명문고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오늘 민현은 다행히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민현도 공부를 많이 했는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래, 네가 일 등 해라. 자는 녀석을 깨우기도 뭐해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민현의 옆이 아닌 뒷자리에 앉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 내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슥슥 앉기 시작했다. “야, 너 괜찮냐?” 민준이 자고 있는 민현을 슬금슬금 건드렸다. 자는 데 깨우면 신경질 날텐데. “...내버려둬.” 역시나 민현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저런다고 그만두면 저 녀석은 민준이 아닐 것이다. “그래. 푹 쉬어라.” ...저 녀석은 민준이 아니었던가? 헉, 대체 언제 바꿔치기가 된 거지? 경악의 눈길로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훗, 내가 그렇게 좋아? 미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제발 생각해 줘.” ...역시 민준이 맞았다. “그만해.” 재범이 민준을 노려보며 짧고 거칠게 말했다. 그러자 민준이 훗, 하면서 재범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글쎄, 뭘 그만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뭐, 현이와 나 사이에 이런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닥쳐.” 갑자기 승호가 억눌린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 사랑스러운 약.혼.녀를 돌봐줘야지. 아무리 우.리. 현이의 친. 구. 라지만 말이야.” 뭐가 그리 좋은지 씩, 웃으면서 말하는 민준을 승호는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휙 쳐다본다. “저 애는...집에서 멋대로 정한 거야.” 뭔가, 믿어줘~! 라는 오오라를 풍기며 단호하게 말하는 승호를 나는 놀라서 바라보았다. 그, 그래. 내가 언제 뭐라고 했냐? “그래. 나중에 결혼식 때 꼭 갈게.” 허걱~! 말을 하자마자 승호가 벌떡 일어났다. 거칠게 일어나더니 그대로 교실 문을 열고 나간다. 왜 저래, 도대체? 그 뒤에서 민준은 뭐가 그리 좋은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누가 나에게 말해줘, 대체 내가 뭘 잘 못 말한 거야? 애절한 눈빛으로 내 친구인 재범이를 쳐다보자, 재범이는 아직도 아픈 건지 무척이나 심란한 얼굴로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그런 거였어? 훗, 그럼 나는 이만.” 갑자기 사뿐히 일어나 교실 밖으로 유유히 나가는 승희양. 그 유려한 뒷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승희라는 여자애는 첫날부터 땡땡이를 치려는 셈인가. 빈 자리 두 곳을 신경쓰면서 처량히 수업을 진행할 선생님들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중간고사 일정이 앞당겨졌다. 일정은 교실 뒤에 붙여 놓을 테니 각자 공부 열심히 하고 있도록.” 초췌한 안색으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들어와서 말을 하고 나간 담임 선생님의 말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중간 고사, 벌써 그 시간이 다가왔단 말인가~! 웅성거리며 교실 뒤로 몰려드는 반 아이들 사이로 일정표를 보기 위해 다가가자 반 아이들이 썰물처럼 자기 자리로 황급히 돌아가 앉기 시작했다. ...무서운 것들, 벌써부터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서두르다니. 헉, 그러고 보니, 내 주위의 이 녀석들이 나와 같은 반으로 모두 모인 것도 수상쩍다. 혹시 이 곳은... ...그 말로만 듣던 특별반? 공부 잘하는 녀석들을 모아서 서로 경쟁을 시키는... “어? 뭐야, 다음 주군. 그럼 그 때 실컷 놀수 있겠군.” 껄렁껄렁 내 옆으로 와서 말하는 민준 녀석이 내 생각을 파삭 깨뜨린다. 미안하다, 네가 나와 같은 반인데 특별반이니 뭐니, 하는 그런 생각을 해서. 아무리 봐도 공부와는 인연이 없는 듯 보이는 민준 녀석을 나는 깨끗이 무시했다. 내가 좋은 곳을 아는데 놀러갈래? 하는 민준의 말은 저 멀리 교실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말이다. 아아, 시간도 없는데 이 녀석과 놀아줄 수야 없지. 나는 곧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뭐하냐, 너?” 수업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짐을 싸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에게 민준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하냐니, 당연히! “시험 공부를 해야지. 너는 아무 것도 안하고 뭐 하는 거야~!” “...벌써?” “당연하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럼 그 책들은 다 뭐야?” 민준은 넋이 나간 듯한 눈길로 내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민준의 시선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흠, 대체 왜 저러지? 안정감을 추구하기 위해 2m의 높이로 책상 근처에 쌓여서 놓여진 여러개의 책 무리에는 어디를 봐도 잘못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아, 맞다~! “이 책들을 잊을 뻔 했네.” 태연히 다른 문제집들을 꺼내서 책상 밑에 다시 쌓아올리고, 만족함으로 씩 웃자, 민준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걸 다 공부한다고? 너 지금 어디 국제 박사학위 따러 가냐? 이건 그냥 중간고사일 뿐이라고~!” 아니, 저게 지금 무슨 망발을?!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활활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민준을 보자 민준이 움찔했다. “...응?” “그~냥 중간고사? 너는 지금 반 아이들의 기세를 보면 모르겠냐? 매일 밤 새서 공부하는지, 틈만 나면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잖아!” “...그건, 그런 게 아니라~!” “모두 너처럼 공부 안 한다고 생각하지 마! 이미 우리는 늦었다고~! 게다가 중간고사라 함은 선생님의 취향에 따라서 어떤 문제가 나올지 예상할 수 없는 복병 투성이의 시험! 이 책들 다 외워도 부족할지도 몰라, 자, 우리 어서 같이 힘내자.“ “...자, 잠깐, 문제집을 푸는 게 아니라 외워? 게다가 뭐? 같이 힘내?” 어째서? 라는 경악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민준에게 나는 따뜻이 웃었다. “괜찮아. 외우다보면 금방이야.” 이 기회에 너의 근성을 뿌리채 고쳐주마. 녀석도 과거의 수상쩍은 세일즈맨 영업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할 때가 되었다. “잠깐만~! 나는 충분히 공부 잘 해, 그러니까 미친 짓 하려면 너나 해, 윤 현~!” 다급하게 소리치는 민준이 녀석을 보며 나는 자애롭게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공부 못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냐.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자, 그러면 어서 시작할까?” ‘최근 5년간 수리영역 1 기출문제 모음집‘을 들고 부드럽게 말하자 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녀석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제발 사람이 말하면 좀 알아들어 달란 말이야~!” 짜식, 공부하는 게 그렇게 싫나? -30- “120 페이지, 문제 5번.” “그림과 같이 5m길이의 줄에 매달린 그네가 있다. 그네의 줄과 지면의 수선이 이루는 각이 가 되도록 그네를 당겼다가 놓으면 중력과 공기 저항 등에 의해 9/10만큼 반대편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지금 준구가 민구를 그네에 태우고 =45가 되도록 그네를 당겼다가 놓으면 이 그네가 정지할 때까지 그네를 타고 있는 민구가 움직인 거리를 구하시오.” “그림을 그리고 이 문제의 식, 답을 말해봐.” “...” 부들부들 손을 떨고 있는 민준을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뭐해, 안 그리고?”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새벽 4시까지 쉬지 않고 문제집을 외우게 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 아니 세상에 수학 문제집을 문제와 쪽수까지 달달 외우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쯧쯧, 네가 공부를 안 해 봐서 잘 모르는구나. 무릇,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반복학습도 중요하지만 한 번 외울 때 철저하게 외우는 것이 더 중요해. 그리고 일주일 전 밤샘 공부는 시험을 보는 사람의 당연한 예의다.” “...수학 문제집 외우는 것도 시험을 보는 이의 예의냐?” 아니, 이게 지금 졸려서 미쳤나, 왜 시비를 거는 거지? “그건 시험 보는 사람의 성의다.” 그러자 민준이 허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 왜 수학 1을 지금 하는 거냐? 우린 고등학교 1학년 공통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그 원리와 기초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게다가 선생님이 혹시 우리들을 위해서 수학 1을 낼지 어떻게 알아?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해서 공부를 해야지. 이것이 끝나면 ‘수학, 그 원리와 이해’ 라는 책을 외우는 거다.” “그러니까 대체 왜~!” 민준은 손에 핏줄이 돋힐 정도로 샤프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결국 죽어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드러누워 버린 녀석을 달래기 위해 나는 친히 민준에게 재범이에게 끓여주고 남은 쥬스를 컵에 따라다 갖다 바쳐야 했다. “...이건 혹시?” 의심스런 눈길로 쥬스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민준에게 의문의 눈길을 보내자 민준이 움찔했다. “으음...” ...너무 공부를 많이 시켰나? 이제까지 뺀질거리고 놀기만 했던 녀석에겐 부담이 가는 양이었을지도... 손가락을 쥬스가 담긴 컵에 가져갔다가 화들짝 떼고, 다시 조심스럽게 컵을 건드리는 일을 반복하는 민준을 보며 나는 슬며시 생겨나는 죄책감을 억눌러야 했다. 그래서일까? 민준의 엉뚱한 질문에 새삼 친절하게 대답해 준 것은 말이다. “너 재범이, 그 녀석과 같이 친구하기로 한 것, 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건... 난 어렸을 때부터 친구가 없었거든. 내가 뭐가 이상한지 사람들이 날 피해서... 거의 혼자 지냈어. 그 때 처음으로 친구가 되 준 것이 재범이였어.” “...뭐?” 내가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운지 민준은 멍한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원래 이런 화제는 나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창피해서 입에 올리지 않곤 했지만, 오늘 밤은 왠지 그냥 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런 사실은 나에게 약점이 될 수 없었다. 이제는 나에게도 친구가 있다. 그리고 민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또 사실... “어쩌다가 헤어지게 됐는데... 그러고 보니 재범이 녀석, 이상한 이야기를 하던데,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어쨌든, 그래서 재범이는 나에게 참 고마운 존재야. 사실, 사람들이 날 피하는 것을 보면, 나는 같이 있을 때 즐겁고 편한 상대는 아닌 것 같거든. 그런데도 나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 재범이를 보면...” “그, 그래? 그런데 그러면 넌 이승호나 김민현은 어떻게 생각하냐?” 응? 뜬금없이 개네들이 왜 나와? “같은 초등학교 동창인데... 내 생각에는 둘이 무척이나 친한 사이인 것 같아. 그런데 둘 사이의 우정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일부러 나를 사이에 끼고 다니는 게 아닐까.” “...그래? 그럼 이슬비는?” 슬비? “잘 모르겠어. 뭔가 형이랑 누나한테 부탁받은 게 있다고 하는데? 안면이 있으니 책임감에라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 같아.” “...심각하군.” 크읔, 나의 빈약한 인간관계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흐음, 그럼 너, 혹시 친구들 사이에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냐?”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하는 민준의 모습에 나는 잠시 움찔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 내가 지금 민준이 녀석에게 자존심을 다 팔고 구질구질하게 나의 과거를 말해준 이유~! 그것은 친구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진정한 친구인지 등을 물어보고 싶어서였다. “우후훗, 그렇단 말이군.” 갑자기 음흉스럽게 웃는 민준의 모습에 순간 이제까지 했던 말을 모두 잊어버리라고 머리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참았다. 비록 저런 믿지 못할 녀석이지만, 그래도 민준은 시시때때로 각종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오는 수상쩍은 전직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특히 친구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많이 알고 있겠지. “솔직히 말할게. 너 지금까지 친구가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 알고 있냐?” “모, 모르겠는데?” 그랬다. 이제까지 내가 진정으로 궁금해 했던 이유, 그것을 혹시 민준은 알고 있는 것일까? 애타는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은 여유있게 웃었다. “그것은 네가 친구들 사이에 하는 행동을 모르기 때문이다.” “행동?” 쿠쿵~! 순간 내 머리 위에서 효과음이 들리는 듯 하다. “그래, 아마 너에게도 친구를 하고 싶은 녀석들이 몇몇 다가왔겠지. 하지만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행동도 해주지 않음으로써 그런 녀석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거다. 그러니 네가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그, 그런~! “그럼 그 행동이란 도대체?” 넋을 잃고 멍하니 묻자, 민준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가늘게 접히는 눈꼬리를 보며 나는 왠지 점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찜찜한 기분은?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그 날 밤 내가 너에게 했던 것 기억나?” “..네가 날 팬 거? 그 때 부딪친 여파로 내 등짝에 한 동안 파스를 붙이고 다녔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자 민준의 미소가 잠시 일그러지더니, 곧 다시 진해졌다. “그것 말고, 다시 해 볼까?” 그리고 민준의 얼굴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뭐야? 뭔가가 떠오르려는 게... 순식간에 녀석의 입술이 내 입에 와 닿는 순간 나는 민준을 확 밀어버렸다. “너~!” “그래, 그 때 했던게 바로 키스라는 거다. 친. 구. 라면 당연히 하는 행동이지.” “...뭐?” “봐봐. 지금 너의 행동을. 친구가 되고 싶어서 행동하는 나를 밀어냈잖아? 솔직히 그 때 내가 너에게 조금 거칠게 행동한 것은 나빴지만...너도 너무했어. 나는 상처받았었다고.” 갑자기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우수에 찬 눈길로 바라보는 민준 녀석을 보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녀석이 지금 ‘나 상처받았어~, 모두 너 때문이야.’ 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다고 해도, 나는 우선 내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솔직히 민준, 저 녀석은 정말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조금씩 ‘정말일지도...’라는 긍정을 하고 있었으니... 음, 그렇다면... “그러고 보니, 형이랑 누나가 뽀뽀는 가족들이랑만 하는 거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키스는 친구들과만 하는 거였던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민준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물론 여기서 하나의 조건이 따르긴 하지만.” “조건?” “그래, 어렸을 때는 이 친구 사이의 행동을 맘대로 누구에게나 해도 되지만...좀 더 나이가 들면,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들어올 나이가 되면 이 행동은 절친한 친구 사이에만 하도록 제한되어 있어.” “왜?” “어렸을 때야,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이 친구간의 행동을 하면서 선별을 하는 거지. 하지만 고등학교 이상이 된다면...이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를 만난 상태가 되거든. 그럼 여기서 생각 하나 해 보자. 너는 네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기분이 좋겠냐?” 그건... “모르겠는데.” 난 친구라고는 재범이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그러니까 이런 행동은 진정한 친구 외에는 하면 안 돼.” “그, 그래?” “그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준이 녀석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뭔가 굉장히 의심쩍지만, 뭐가 의심쩍은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는 그런 기분이 마구 든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미연 누나가 나중에 찾아서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멍하니 묻자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젠장, 벌써 그런 꼼수를..” 응? 지금 저 녀석, 뭔가 이상한 말을 했는데? 그런데 미처 사고회로를 가동시키기 전에 민준이 나를 붙잡고 활활 불타는 눈빛으로 힘있게 말했다. “실망이다, 윤 현. 넌 이렇게까지 주체성이 없는 녀석이었냐?” “무슨 말이야?” 화가 나서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안 그러면? 너는 혹시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우습게 보고 있는 거 아니야? ” “아니야!” 발끈해서 말하자 민준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정한 친구를 누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 수가 있는 거냐?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이 진정한 친구다. 그렇다면 네 마음이 가는 사람을 네가 직접 찾아서, 그 사람 마음에 들도록 행동해서 진정한 친구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뭐?” 콰콰콰쾅~! 아아, 내 머리 위에서 아까를 능가하는 효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민준의 말이 맞았다. 이제까지 내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진정한 친구에 대한 예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럼 친구간에는 이 키스라는 것을 하면 되는 거냐?” “응. 진정한 친구에게는.” 아, 맞다. 아까 제한이 있다고 했지. 젠장, 이런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오래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해 주는 건데. “그, 그런데 그럼 너는 왜 나한테 키스를 하는 건데?” 나는 너의 진정한 친구도 아니잖아? 하면서 민준을 쳐다보자, 민준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 우리는 반드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다.” 정말 말은 잘 한다. 하지만... “난 너랑 친구 하기 싫어.” 이것은 100% 진심이다. 민준, 저 녀석은 그저 마주치지 않는게 내 속을 편하게 하는 괴상한 존재다. “...그렇게 말한다 이거지? 그렇다면 친구 사이에 하는 행동을 더 알고 싶지 않은가 봐?” 음침하게 웃으며 말하는 민준을 나는 놀라서 바라보았다. “아니, 키스가 전부가 아니란 말이야?” “후훗, 심오한 친구의 세계는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지. 아직도 많은 것들이 남아 있고, 그 기기묘묘한 행동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많지.” 아니, 그럴 수가~! 친구 한 명 사귀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경악하여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느끼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하나하나 다 알려줄게.” ...다 좋은데 왜 이렇게 팔뚝에 닭살이 돋지? 게다가 자꾸 식은땀이 나면서 불길한 예감같은 것이 마구 든다. “참, 이 친구사이의 행동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 “...왜?” “너 혹시, 지금까지 이런 것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은 거냐?” 한심한 듯 말하는 민준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내가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말하고 다닐 수야 없지. “후훗, 그럼 지금부터 하나씩 알려줄까? 우선 키스부터.” 나에게 다가오는 민준의 입을 조금 절망적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내 친구 사귀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내 나이 17살, 중간 고사 시험 전에 친구사이의 행동에 대해서 알다.- -31- 부제 : 그대가 잠든 사이에 1. “언제까지 화를 내고 있을 거냐.” 다정한 빛을 띈 아버지의 말에도 재범은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작은 나라에 오게 된 것도, 알지도 못하는 친척의 집에서 있어야 된다는 것도, 모든 것이 싫었다. 아니, 그 전에 어머니 홀로 미국에 남겨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천천히 따져보다가 재범은 다시 손을 꽉 쥐었다. 모든 것의 원흉은 불쑥 집에 찾아왔었던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시커먼 사내들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저 능글능글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굳이 아버지만 탓할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던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가는 게 서운하시지도 않은 걸까? 하다가 재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모든 것은 아버지 때문이야. 그리고... “어허, 괜찮단다. 그 집에 가면 친구도 있을 거야. 현이라고, 너와 동갑이란다. 친하게 지내렴.“ ...그 딴 녀석 알게 뭐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되는 집의 일원 따위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래, 만나면 실컷 괴롭혀 주겠어. 재범은 굳게 다짐했다. 그러니까 얼마전, 불과 한달이 채 되기도 전의 일이다. 집에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 불쑥 찾아와서는 부모님과 심각하게 쑥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재범을 불러서 턱하니 이야기를 꺼내셨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 이모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안주인이시지.”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셨다. “너의 외할아버지가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헉? 재범이 눈만 땡그랗게 뜨고 앉아 있자, 아버지는 단호하게 선언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한국에 가서 살기로 되었단다.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어라.“ ...그게 무슨 소리? 하면서 차마 대꾸도 못하는 재범의 옆에서 어머니는 단정히 앉아 계셨다. ...그리고 그 말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 저것 정보를 꿰맞춰본 결과,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으라는 것은 한국에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깡패집단, 이른바 조직 폭력배라고 하는 시커먼 것들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팔자에도 없는 깡패가 되어서 하는 일이란, 재벌가라는 이모네 집안의 뒷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재범이 집을 구할 때까지, 라는 말도 안되는 명목으로 이모네 집에 가는 진짜 목적은 그 재벌집안 사람들에게 후계자로서의 재범을 선보이기 위해서이다. 이 어린 나이에 깡패들의 우두머리라니, 죽어도 싫다. 아무리 외할아버지에게 자식이란 이모와 어머니밖에 없고, 이모의 자식들이 제외되면 결국 혈육은 재범이밖에 남지 않는다지만 순순히 말을 따라줄 이유는 없다. 그러니 각오해줘야겠어. 사촌씨들. 너희들 입에서 ‘저 녀석 다시 미국으로 보내~!’ 라는 말이 나오도록 해 주지. ...이게 사촌? 재범은 작전을 변경했다. 자신의 앞에서 쭉 찢어진 눈을 하고 상냥한 척 웃는 이 남자(절대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를 보자 온 몸에서 경고가 울려퍼졌다. 걸리면 위험하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그 때였다.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선우라는 사촌의 뒤에서 머뭇거리며 고개를 내미는 작은 아이. 꾸벅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동작에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커다란 눈동자를 하고, 하얀 얼굴을 한 아름다운 꼬마. 무언가 대단한 집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재범을 스쳐 지나갔다. 범접하기 어려운 귀족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두 형제를 보고 있는데, 작은 아이, 그러니까 현이라는 아이가 아버지의 말에 크게 대답을 하고는 실수라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선우가 현이의 머리를 꽉꽉 눌러댄다. ...그러면서 왜 선우가 아버지와 재범이를 무섭게 노려보는지, 재범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음에도 정말 무서웠다. 그래, 선우라는 저 형을 건드려서 뭐가 좋겠어. 목표는 꼬맹이다~! 재범은 남몰래 두 손을 불끈 쥐면서 창피해서인지 아직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현이라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범이야, 잘 지내자.” 그러자 현이 잠시 재범의 손을 바라보았다. ...설마 현을 이용하려고 하는 음흉한 속셈을 들킨 건가? 그럴리는 없겠지만 현이라는 아이의 신비한 분위기가 재범이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게 만들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쏘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선우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재범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게 여차하면 한 방 날릴 기세다. ...이 집 식구들은 단체로 초능력을 하나?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으려는데 작은 손이 재범의 손을 꼭 잡았다. “응.” ...걸려들었다. 앞으로 넌 각오해. 재범은 잠시동안 선우의 살기를 잊고 히죽 웃었다. “그럼 우리 어디 다른 데 가서 놀까?” 짐짓 다정하게 건넨 말에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후훗, 좋았어. 재범의 계획은 단순했다. 일단 현과 같이 사람이 안 보는 곳으로 간다.(여기서 저 선우라는 형은 반드시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는 현을 때리면서 괴롭힌다.(주의사항 : 겉에 보이는 곳에 상처를 남기면 안 된다.) 다른 어른들에게는 자신이 괴롭혔다는 사실을 이르지 못하게 협박한다. 현이를 협박해서 자신이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돌아갈 구실을 만든다.(예)난 사촌이 싫어! - 절대로 재범이 괴롭혔다는 티가 나면 안 됨.) 단순한만큼 성공 확률이 높은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딜 가려고?” 한 쪽 의자에 앉아 있던 선우가 쓱 하고 일어난다. 그리고는 현에게 걸어와서 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우리 돼지가, 응?” “하지마~, 형 미워!” “어쭈, 이 바보가 많이 컸다?” “으윽!” 재범은 참다 못해 신음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재범의 발등에 올려진 선우의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한 쪽으로 틀어서 현의 시야를 가리는 용의주도함을 보인다. 힘이 점점 더 가해지는 선우의 발에 재범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면서 괴로움을 참았다. “그냥 여기서 놀자, 미안.” 시무룩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윤현에게 대꾸해줄 정신이 지금 재범에게는 없었다. 분명히 괴롭히려고 한 건 자신인데, 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지 재범은 알 수 없었다. 선우에게 밟힌 발등이 아프고, 지금 다시 의자에 앉아서 재범을 노려보는 선우의 시선이 무섭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는 윤현의 시선에 짜증이 난다. 이 먼 타국까지 와서 이게 무슨 꼴인지. 재범은 서러웠다. 여기서 꺾일 수는 없어~! 주먹을 다시 굳게 쥐었지만, 선우의 살기를 띈 눈초리에 슬그머니 주먹쥔 손이 풀렸다. 선우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자, 애처롭게 재범을 바라보는 윤 현의 얼굴이 보였다. 선우가 천천히 손목을 꺾었다. [우두둑] ...왜 저 손목 꺾는 소리가 이렇게 현실감있게 들리는지. “아하하, 아냐. 그냥 여기서 놀지, 뭐.” 아직 내일이 남아 있다. 재범은 다음을 기약하며 윤현에게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럼 뭘 하고 놀까?” 선우의 눈치를 살피며 재범이 의욕없이 묻자, 윤현이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뭐야, 이 녀석? 멀뚱히 바라보자, 윤현이 벌떡 일어나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야?” “공기. 나 이 것 무척 해보고 싶었거든.” “...공기?” 대체 그건 또 뭐냐. 재범은 찰흙으로 만들어진 둥글둥글한 작은 구슬을 바라보았다. “응. 이 걸로 던지고 받으면서 노는 거야.” “던지고 받아?” ...공놀이인가? 멍하니 되묻는 재범의 옆에서 갑자기 푸웃~!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설마, 하면서 돌아보자, 선우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래, 저 사람이 그런 이상한 소리를 낼 리가 없지. 재범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윤현이 설명을 시작했다. “응. 이렇게 한 손으로 처음에는 하나씩 던져서 받고, 다음에는 두 개씩, 나중에는 세 개, 이렇게 개수를 늘려서 받는 거야.” “...5개 다 던져서 받으면?” “그러면 나이를 먹는 거야.” “...나이를 먹어?” “그래. 내 생각에는 떡국을 먹는 게 아닐까 싶어.” “...떡국?” 그 신년에 먹는다고 하는? 하면서 재범이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쿨럭~!” 헉, 다시 이상한 소리가? 재범이 휙하고 고개를 돌리자 역시 무표정하게 책을 읽고 있는 선우의 모습이 보인다. ...환청?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선우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선우가 진지한 얼굴로 책을 거꾸로 들고 집중해서 읽고 있는 모습을 재범이 멍하니 보는데, 윤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집이 오래되서 자꾸 바람이 새거든. 그래서 자주 이상한 소리가 들리곤 해.” ...이 집이 바람이 새? 재범이 육중한 저택을 둘러보며 고민하는 사이, 윤 현은 찰흙으로 손수 만든 공기라는 것을 들고 재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다 받은 쪽은 오늘 저녁 식사 때 그만큼 떡국을 먹는 거야. 누가 먼저 할까?” “응...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재범은 다시 반문했다. 그러니까, 5개 까지 저 동그란 공기를 다 던져서 받으면 떡국을 먹는다? 보통은 실패하면 벌칙을 받는 거 아닌가? “왜?” “아니, 5개 못 받으면 상대방에게 진 만큼 떡국을 먹어야 되는 거 아니야?” “왜?” 윤현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진 사람에게는 당연히 벌칙이 있어야 하잖아.” 그게 당연한 거다. 진 사람은 그만큼 손해를, 이긴 사람은 그만큼 이익을 봐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재범이 당연한 듯이 한 말에 윤현은 눈을 깜박거렸다. “왜? 떡국, 맛있는데.” ...엥? “하지만, 벌칙이 없으면 재미가 없잖아?” “...응? 난 공기를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게 보였는데?” 왜 벌칙을 줘야 해? 라면서 윤현이 되물었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재범이 버벅대자, 윤현이 다시 말했다. “그럼, 모두 못 받은 사람도 같이 떡국을 먹자.” 그럼 됐지? 라면서 윤현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라고 속으로 절규하는 재범을 놔두고 윤현은 자기가 먼저 한다며 공기를 바닥에 굴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손으로 자체 제작한 것이 분명한 공기는 바닥을 데구르르 무한정 구르더니 급기야는 가구들 밑으로, 소파 밑으로 쏙쏙 들어갔다. “...핫~!” 재범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소리쳤다. 그러자 윤현이 심각하게 재범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이 웃기지도 않은 놀이는 그만 두고 다른 걸 하자, 라고 재범이 말하려는데 윤현이 천사같이 밝게 웃었다. “가서 찰흙 가져올게.” ...그 날 재범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찰흙으로 공기를 빚고, 또 빚어야만 했다. 그 중간에 재범에게 짧은 휴식을 선사해 주었던 저녁 식사 시간의 메뉴는 떡국이었다. -32- “잠 못 잤어?”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민현의 모습에 나는 흠칫 놀랐다. “뭐, 뭐?” 말을 더듬으며 슬며시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자, 재범이까지 나를 쳐다본다. 헉, 보지마, 재범아! 나는 서둘러 식판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 내 모에 아랑곳없이 민준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젠장, 죽어버려, 저 망할 자식~! 아아, 내 머리가 살짝 돌지 않고서야, 민준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을 텐데. 민준은 그 날 밤 이후 나에게 친구사이의 행동을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쉴 새 없이 키스와 갖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말 친구들은 같이 목욕을 하는 건가? 씻고 있는데 들어오는 녀석에게 얼마나 놀랬던지. 서둘러 쫓아내고 문을 잠그자, 녀석은 문 밖에서 나에게 진정한 친구에 대한 예의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투덜댔다. 젠장, 정말 친구라는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살을 만져 대는건가? 언제나 입술을 부비고? 생각하다가 나는 경악해서 민현과 승호를 바라보았다. 헉, 설마 너네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는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내 눈빛에 승호가 의아한 듯이 눈을 깜박였다. ... 순간 암울해졌다. 무서운 것들, 이 놀라운 과정을 모두 통과하고 돈독한 친구가 되다니. 크흑, 하고 눈물을 흩뿌리는데, 승희라는 여자애가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윤 현, 너는 편식이 심한가봐? 이렇게 음식을 헤집어 놓는 것을 보면.” 방긋거리면서 말하는 승희의 태연한 말에 식판을 한 번 바라보자, 처참한 잔해로 나뒹굴고 있는 음식들이 보였다. 허헉, 생각에 너무 빠져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음식을 헤쳐놓은 것 같다. 조금 부끄러워져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있자니, 슬비가 승희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승희 넌, 다른 사람 식사에 관심이 많은가봐? 아니면 단순히 참견이 심한 건가?” 뭔가 날이 서 있는 듯한 슬비의 말에 승희가 조금 얼굴을 굳히더니, 다시 웃으면서 말한다. “어머, 슬비 네가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쓰는 것을 보면 선배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 아무리 선배가 멍하게 군다고 해도 명색이 네 약혼자잖아?“ 파지직~,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무섭다. 분명히 슬비나 승희나 모두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등골이 오싹한지. 나만 이런가?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곳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슬금슬금 움직여 한꺼번에 식당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지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이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다른 녀석들은 이 일에 관심이 없는 건지 모두 식판에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는 모습을 오오~, 하면서 보다가 승호가 혼자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뿐인가? 승호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승희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내 약혼자가 네가 뭘 하든 신경쓰지 않는 승희 네 약혼자와 다르긴 하지. 아, 미안. 혹시 너의 무심한 약혼자에게 관심끌고 싶어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 일에 참견하고 다니는 거였어?“ ...뭔가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듯 민준이 전화기를 끄고 싱글거리면서 승희와 슬비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으면서 왜인지 눈을 찡긋한다. 그 모습을 직통으로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든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대로 젓가락을 민준의 면상에 날려버리고 싶은 아찔한 유혹이 몸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승호가 벌떡 일어났다.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짧게 말하고는 승희를 붙잡고 그대로 나가 버린다.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 참 다정한 연인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슬비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현아, 기분나빴더라도 이해해. 저 애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지금 좀 예민해져서.” 응? 뭐가? 왜 내가 기분이 나쁠 거라고 말하는 거지? 멀뚱히 바라보자, 슬비가 한숨을 포옥 내쉰다. 그리고 그 옆에서 민준이 히죽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보자, 다시 속에서 열불이 뻗친다. 역시 마가 끼었던 게야. 암, 그렇고 말고. 저런 뺀질이 녀석을 만나다니, 내 일생 최대의 실수다. 어떻게 민준이 녀석을 떨쳐 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나를 살짝 살짝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허, 허험, 흠,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앉아 있어서 그러나? 나는 다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상한 분위기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에 돌아가자, 승호와 승희가 냉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승희가 고개를 까닥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 잠깐 이야기 좀 할래?” 나는 도도하게 서서 말하는 승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지금 나에게 말하는 거 맞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슬비가 내 앞을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그럴까? 마침 나도 너랑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아, 내가 아니라 슬비였구나. 하긴, 나랑 이야기 할 게 뭐가 있겠어. 그대로 자리에 앉으려는데, 승희가 낮은 목소리로 매섭게 말했다. “방해하는 거야, 이슬비? 내가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은...!” “방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어쨌든 우리 서로간에 할 말이 무.척. 많은 것 같은데.” 호호호,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슬비의 모습이 왠지 무척이나 낯익다. 저 모습을 보자니, 무언가가 떠오를 법도 한데...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승희가 씨근덕거리며 슬비와 같이 밖으로 나갔다. ...생각날 법도 했는데, 하고 아쉬움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민준이 옆에서 나를 톡톡 친다. “...왜?” 용건만 간단히, 라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민준이 씩 웃었다. “인기 많아서 좋겠다, 윤 현.”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만약 그 순간 내가 조금만 덜 이성적이었다면 나는 앉고 있던 의자를 집어들어 민준의 머리를 후려갈겨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고, 또 침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면서 민준에게 침착하게 물었더랬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지켜주는 기사님들이 많아서 좋겠다고.” ...커터칼이 어디 있더라? 화가 나는데, 이성적이고 뭐고 찾을 시간이 어디있어?! 크아아악~! 역시, 역시 민준 저 녀석은...! “하긴, 해충같은 누구와는 질이 틀리지.” 옆에서 불쑥 말하는 민현을 쳐다보자, 민현이 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질투냐?” 훗, 하고 코웃음치는 민준의 말에 민현의 해맑은 웃음은 금방 찌그러지고 말았다. 고오오~ 오라를 내뿜는 두 녀석을 외면하는데 재범이가 슬쩍 교실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곧 수업 시간인데 어디를 가는 거지? 저 큰 덩치를 가지고 답지 않게 살금살금 나가는 녀석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나도 재범이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나갔다. 뒤에서 사이좋게 눈길을 주고받던 민준과 민현은 내가 나가는 것을 보고 붙잡으려고 하다가 곧 서로 정다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지겨운 것들, 승호처럼 얌전히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승호 저 녀석,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웬지 눈이 풀려 있는 것 같다...? ...아닌가? 고개를 갸웃 갸웃 하면서 재범이를 따라가려는데, 재범이가 빠른 걸음으로 이러저리 방향을 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설마 내가 쫓아가는 것을 눈치 챈 건가? 나름대로 잘 숨어서 쫓아간다고 한 건데...? 재범이가 어디로 갔을까,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 소리가 들렸다. 으응? 이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히...? 사삭,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교내 시멘트 벽에 바짝 붙어서 살펴보자, 역시나 승희와 슬비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나가더니 이런 데 있었구나. 끄덕끄덕 하면서 지나가려는데, 문득 승희의 외침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이해할 수 없어~! 도대체 윤 현 그 녀석이 뭐길래?!” ...나? -33-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슬비가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너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줄 알아? 이렇게 막무가내인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현 승희.“ “...너야말로 웃기는군. 이 슬비. 지금 네가 나에게 이렇게 당당히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내가 아직도 모를 것 같아? 그 앞에서 얌전한 척 내숭을 떨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정말로 황당했어.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안 그래? 천하의 이 슬비에게 약. 점. 이 생기다니 말이야. 내가 입만 열면...“ “...입만 열면 넌 내 손에 죽어.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그의 일에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를, 다른 녀석들이 그 앞에서 아이처럼 굴어대는 이유를 말이야. “ ...무슨 말이지? 그는 도대체 누구지? 슬비의 약점이라니... 게다가 슬비와 승희의 관계는 대체...? 쿵덕대는 심장 소리가 혹시라도 승희와 슬비에게 들릴까 싶어 지그시 손으로 심장을 누르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귀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한숨에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주춤, 하는 내 몸의 허리를 가녀린 손이 휘감았다. “어머, 윤 현군. 엿듣는 건 나쁜 어린이야, 안 그래?” 푸른 색 눈동자를 크게 뜨면서 양호 선생님이 살풋 웃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들었어, 윤 현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양호실 책상 의자에 앉아서 양호 선생님이 내미는 찻 잔을 받아들고 있었다. “...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 잔을 손에 들고 되묻자, 양호 선생님이 적갈색의 화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집어 넘기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뚜렷한 시선이 왠지 모르게 무섭게 느껴진다. 뭔가를 원하시는 듯 한데, 뭘 원하시는지 잘 알 수가 없어서 녹차의 연푸른 색만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양호 선생님이 다시 재촉했다. “자, 어서 그 차를 마시면서 대답해줘, 윤 현군.” “...네.” 그다지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아 차를 무릎으로 내려놓고 간략하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는 중에도 양호 선생님의 강렬한 눈빛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와중에 안광의 형형함은 점점 더 그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 “...흐응, 그 이야기는 이만 됐어.” 흥미 없다는 듯이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말에 순간 허탈해졌다. ...먼저 물어봤던 건 선생님이셨는데...흑, 저렇게 말씀하시면 이제까지 열심히 말한 내 입장은 그럼 뭐가 된단 말인가?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찻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양호 선생님이 기대된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보다, 윤 현군, 어서 차를 마셔보는 게 어때?” ...차? 그러고 보니 양호 선생님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작은 찻 잔안에 담겨져서 찰랑거리는 연 푸른 녹찻물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수상쩍고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움, 이걸.... 먹어야 되나? 슬며시 고개를 들어 양호 선생님의 눈치를 쓱 살피자, 양호 선생님의 푸른 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먹어, 어서 먹어~! 라고 외치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이 차를 마시는 게 더 꺼림칙해졌다. 그러고 보니 민준 녀석이 양호 선생님이라면 질색을 했던 것도 생각나고 또 이런저런 다른 것들이 연상되어 떠오르면서 급기야는 이 차를 마시면 안 되겠다~! 라는 결심이 생겨났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 찻 잔을 내려놓고 나오려는데, 양호 선생님이 서운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흑, 너무 슬퍼. 나는 열심히 끓였는데, 윤 현군이 이렇게 먹기 싫다고 나가 버리다니.”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제가 나쁜 사람 같잖아요~! “아아, 나는 다만 윤 현 군과 같이 다정히 차를 마시면서 미연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는데.” ...미, 미연 누나? 그러고 보니 양호 선생님은 미연 누나와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내가 모르는 미연 누나의 모습이라니.. ...정말로... 듣고 싶다, 듣고 싶어~! 빠른 동작으로 다시 의자에 앉아 찻 잔을 집어드는 내 모습에 양호 선생님이 생긋 웃었다. 빨갛고 작은 입술이 완만한 호선을 그리는 모습을 애타게 바라보자, 양호 선생님이 다시 나긋나긋 말했다. “자, 그럼 우선 차를 마시고 감상을 말 해준다면 미연이에 대해서 말 해 줄게.” ...아까부터 차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고 계시군. 떨떠름하게 차를 집어들어 한 입에 털어놓자, 양호 선생님이 두 손을 모아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 어때? 윤 현군? ” 나를 살피는 듯한 양호 선생님의 눈빛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맛있군요. 그보다 미연 누나와는...?” 어서 본론에 들어가고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양호 선생님이 잠시 동안 허공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양이 너무 적었나...?” ...양? 찻물 양을 말하는 건가? ...그보다 어서 미연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초조하게 바라보는 내 눈빛을 알아챘는지 양호 선생님이 느긋하게 말씀하셨다. “어머, 윤 현군, 피부 너무 좋다. 뭐 특별한 미용 용품 쓰는 것 있어?” ...전혀 내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셨군. 아니면 내가 너무 재촉해서 화가 나신 건가? 그렇지 않으면 피부가 좋다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실 이유가 없으실 테니까 말이다. “...없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해맑은 양호 선생님의 표정에 할 수 없이 대답하자, 양호 선생님이 갑자기 까르륵 웃으셨다. “도대체, 이렇게 나오면 제대로 심술을 부릴 수도 없잖아?” ...심술? “흐응, 하여간 이렇게 키워 놓다니 미연이도 대단한 걸?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거야? 뭐, 나야 더 이상 건드릴 생각도 없으니까.” ...네에? 뭔가 미연 누나와 연관이 된 듯한 말인 것 같은데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박거리자, 양호 선생님이 갑자기 몸을 내 쪽으로 숙였다. “미연이는 예쁘고 똑똑하고 당찬 아이였어. 언제나 오만한 여왕님같이 사람들 위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아이였지.” ...타인의 입에서 듣게 되는 미연 누나에 대한 평가는 나에게 묘한 감정을 생기게 했다. 미연 누나에 대한 긍정적인 칭찬의 말에 대한 수긍, 자랑스러움, 그리고... ...알싸한 그리움까지. 계속해서 전화를 하지 않는 선우 형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서 나는 말 없이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무례한 모습에도 신경쓰지 않고, 양호 선생님은 시를 읊듯이 잔잔하게 말했다. “그래서 미연이가 사랑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무척이나 놀랐지. ” ...사랑? 미연 누나가?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어왔다.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뜻밖이라는 말이 머릿 속을 빙빙 맴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우상을 멋대로 빼앗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나는 철이 없었고, 또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 아이였거든. 그래서...그대로 미연이를 외면하고, 그 사랑을 지켜봐주지 않았지.“ 씁쓸하게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살며시 손을 들어 작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양호 선생님이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후훗, 위로해 주는 거야?”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양호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활기찬 모습으로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선명한 푸른 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새초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답례로 좋은 것을 알려줄게, 윤 현군.”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라도 말하는 듯 속삭이는 양호 선생님의 숨결이 간지러워서 몸을 움찔움찔 거리자 양호 선생님이 키득키득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미연이는 거짓말 할 때 왼손 약지를 오른손으로 잡는 습관이 있어. 이건 몰랐지?” ...정말요? “후훗, 사업가로서 치명적인 습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어.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 입은 다물어 주겠지, 윤 현군?” “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 “혹시 미연이를 울리게 되면...그러면 아무리 윤 현군같이 귀여운 소년이라도 괴롭히게 될지도 몰라.” 생글 생글 웃으면서 태연하게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호 선생님의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고 양호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하하핫~, 후후..” ...지금 수업 시간이어서 아이들이 없는 게 다행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우신 양호 선생님의 저런 웃음소리를 듣게 된다면 모두들 얼마나 놀라겠는가 말이다. -내 나이 17살, 초여름에 가족의 숨겨진 작은 단면을 엿보다.- -34- 텅 빈 복도를 타닥타닥 신발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데 저 반대편에서 선생님인 듯 보이는 한 남자가 양복을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헉, 이런... 그러고 보니 지금 나는 자체 땡땡이 중이 아니었던가? 이런 비 학생적인 짓을 하다 선생님께 걸리는 날에는... ...민준이 녀석이 비웃을 게 틀림없다. 흥, 그래. 친구는 무슨 친구. 그 웬수 같은 녀석은 아마 기회는 이 때다 하면서 두고두고 나를 놀려댈 것이다. 아아, 어떡하지? 선생님 심부름 나온 거라고 해야 할까? 발을 질질 끌면서 시선을 아래에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내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냥 지나갔다. ...다행이다. 나는 마주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얼른 그 곳을 빠져 나갔다. 아, 위험했어. 휴우, 하면서 나는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재범이 찾기는 이미 틀린 것 같고, 또 이대로 수업에 들어가기도 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랬던가? 나는 기숙사로 가는 길에 있는 으슥한 구석에서 재범이를 발견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재범이를 보고 소리쳐 부르려고 하는데, 순간 재범이의 상체가 숙여졌다. 그리고 앞에 있는 누군가와 같이 얼굴을 맞대고 열렬한 키스를 했다. 나는 재범이와 키스를 하면서 나를 바라보며 슬쩍 눈웃음을 짓는 얼굴이 굉장히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저 얼굴을 볼 것도 없이 애시당초 짝달막한 키를 봤을 때 나는 저 인간이 누군지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도무지 고등학교에 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운 울보 꼬마가 나에게 승리의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그냥 이 곳을 지나가야 하나? 슬며시 발을 돌려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말 없이 가기에는... ...젠장, 대체 뭐지?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이 느낌. 분노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감정. 그래, 굉장히 배알이 뒤틀린다, 라고 거칠게 말해버릴 것 같은 심정. 내가 이 감정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길고 긴 키스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그리고 재범이가 무언가를 느낀 듯 뒤를 바라보고는 놀란 듯 짧은 신음을 흘렸다. 꼬맹이는 그런 재범이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고는 나를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아. 하. 하. 후훗, 여기서 “그럼 난 이만.” 하고 가는 것은... ...절대로 못 하겠다. 나는 당당히 재범이에게 다가가...다가 풀썩 넘어졌다. 이, 이럴 수가... 너무 폼 잡으면서 걷다가 다리가 꼬였다. 이런 창피한 일이... 말 없이 주섬주섬 일어나는데, 커다란 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묻는 재범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재범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넘어진 것에 대해 혹시라도 비웃지는 않을까, 여기저기 살피는데, 재범이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시선을 구석으로 돌렸다. “...무슨 일이지, 윤 현?” 그런데 꼬마가 재범이의 팔을 꽉 잡고는 나에게 고개를 발딱 쳐들고 귀엽게도 물어본다. 어허, 이 녀석도 내가 넘어진 것은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반딱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그 눈동자가 필사적인 느낌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아, 아무 말 하지 않고 자세히 살펴 보자 꼬마가 발끈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무시하는 거야?” 그게 아닌데...? 아무래도 해명해야겠군, 하면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재범이가 앞서서 말했다. “강 진우, 넌 이만 가 봐.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그 가라앉은 음성에 꼬맹이가 억울한 듯 입만 뻐끔거리다가 나를 한 껏 노려보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래, 저 꼬맹이 이름이 강 진우였구나. 이제야 알게 된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재범이를 바라봐주었다. 그러자 재범이의 눈동자가 다시 데굴데굴 굴려져서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본다. 시선을 피하는 저 필사적인 조용한 몸짓에 흥미가 생겨서 다시 시선을 맞추자, 또다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려져 다른 곳을 바라본다. 흐,흐흠, 귀여운 녀석 같으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나는 남 모를 각오를 하나 세웠더랬다. “재범아.” 나직이 부르자 재범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쉰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미적미적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다짜고짜 재범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는 입술을 갔다댔다. 처음으로 입맞춤을 하게 된 재범이의 입술에서는 오렌지 쥬스의 시큼한 맛이 났다. “...무슨...?” 내가 재범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름대로 민준이가 했던 대로 키스를 하려고 하는데, 재범이가 갑자기 나를 후다닥 밀어냈다. “싫어?” 나랑 친구하는 게 싫어? 라는 눈빛으로 물어보자, 재범이가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무슨...! 그, 그런 게 아니잖아!” 으응? 그럼 뭐가 문제야? 나랑 너는 친구라며? 사실 가장 친한 친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생각났던 것은 재범이의 얼굴이었다. 키스라는 게 가장 친한 친구 사이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면, 우리 둘도 이제 이런 행동을 통해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멍하니 바라보자, 재범이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헉, 혹시 저 꼬마, 그러니까 강 진우라는 녀석이 이미 재범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 건가? 그, 그렇다고 해도 재범이의 절친한 친구 명단에 내가 한 명 더 낀다고 해서 큰 해는 없을 텐데? 초조하게 바라보는데, 재범이가 낮은 목소리로 사납게 말했다. “너, 혹시 선우 형이 말한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절대로...!“ “형이 무슨 말을 했는데?” 내 반문에 재범이가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다시 물었다. “혹시 그 날 밤 일이라던가....” “그 날 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날 밤이 언젠데?” “...아니야...그런데 그럼 대체 왜 나한테...?”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그 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내가 미국에 갔다느니 하는 말을 했었잖아? 그게 다 무슨 말이야?” “...그건...” ...그건? “네가 내가 싫다고 말했다고 들어서... 다시는 나를 보기 싫다고 말했다고...그리고 그래서 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간 것이라고 들었는데...“ 어억, 아니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한 사람은 대체...? 으음, 왠지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예감이 내 손을 더욱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었다. 그래, 거짓말을 해서 돌아오는 이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심술을 태연하게 부리는 사람, 분명히 그 사람은...! “미연 누나가 그렇게 말해서...” ...아앙? 내가 지금 뭔가를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귀를 후비면서 다시 재범이를 바라보자, 재범이가 머뭇머뭇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러니까, 키, 키, 키...스를...” 그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단다, 재범아. “그러니까 선우 형이 그런 거짓말을 했단 말이지, 재범이 너한테?” “응? 그게 아니라 미영 누나가...” “선우 형, 정말 너무해~!” “아니, 그러니까 미영...” “그나저나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가 들리는군. 어서 가서 쉬어야겠다.” 아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요즘 민준이라던가, 또는 민준 바보라던가, 혹은 민준 그 녀석이라던가 하는 이상한 녀석 때문에 너무 기력이 약해졌는지, 자꾸 소리가 왜곡돼서 들린다. 재범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재범이가 내 손을 탁 잡았다. “잠깐만~! 대체 왜 나한테 키....스....를...” 아, 맞다. 나는 재범이에게 생긋 웃고는 재범이의 얼굴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재범이는 멍한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수줍게 입을 맞추고는 슬며시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훗, 그래. 너도 사실은 나와 제일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구나. 나는 밀려오는 감격에 몸을 떨며 재범이와 친한 친구가 되기 위한 행. 동. 을 했다. 미연 누나, 그리고 미덥지는 않지만 선우 형, 아버지, 선재 형, 저는 가족들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반드시 제 손으로 진정한 친구와의 우정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 -내 나이 17 살 초여름,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다.- -35- 부제 : 그대가 잠든 사이에 2. 다음 날 아침, 재범은 새벽에 눈을 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제 윤 현이라는 놈에게 당한 것이 떠올라 이가 갈린다. 그 녀석, 순진한 얼굴로 나를 골탕먹여? 웬 놈의 찰흙은 공장에서 직수입을 해 온건가, 끝도 없이 나와서 재범의 팔을 흑사시켰다. 게다가 만들어진 공기는 놀이를 시작한다고 바닥에 던지면 그대로 가구들의 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윤이 나는 바닥은 마찰이 없는 듯 미끄러워 공기의 무한 운동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아니, 무엇보다 그 윤현이라는 놈~! 어린 놈이 무슨 놈의 고집은 그렇게 센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공기를 만들었다.(재범은 잠시 윤현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공기 소리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를 거다. 재범은 기합을 불어넣고 방을 나섰다. “고무줄?” “응.” ...고무줄이라면 재범도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한인 여자아이들이 밖에서 잘 하던 놀이다. 그런데 계집애들이나 하는 그런 놀이를? 막 싫다고 하려는데, 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과도를 집어든다. 과도가 선우의 손에서 몇바퀴 공중 회전을 하더니, 아침 햇살에 비쳐 영롱한 빛을 내었다. “꼭 해 보고 싶었어.” 재범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이 걸로 하자.” 현이 의기양양하게 검은 고무줄을 가져와 한 쪽은 마당의 나무에 묶고 다른 한 쪽은 바로 옆의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는 손짓을 해 재범을 부른다. 재범이 가기 싫은 걸음을 억지로 떼 놓자, 현이 말끔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노래를 부를게. 거기에 맞춰서 발로 고무줄을 밟는 거야.” “...노래?” “응. 내가 먼저 부르면, 잘 듣고 따라 불러. 알았지?” ...이 때 고개를 끄덕이지 말았어야만 했다. 재범은 훗날 두고두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우가 담배를 입에 꼬나물더니 은제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는 발목을 흔들며 재범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응.” ...아버지는 대체 어디를 가신 걸까. 한 번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재범은 어기적거리며 현의 뒤에 섰다. “그럼 시작한다~!” ...노래는 시작되었다. “...그 노래는 대체?” 재범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자 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노래가 왜?” ...넌 이상한 걸 못 느끼고 있는 거냐? 재범이 절규하는 사이, 선우의 입에서는 담배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으응? 괜찮은데? 오, 오, 오이 맛사지. 아프리카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아. 좋아. 좋아. 케잌 사 주고. 케잌 먹고 배탈나 병원에 가니 호박같은 간호사가 나를 반기네. 오, 오 징글러비유. 오, 오 아이러비유. 오, 오 사랑합니다. 오, 오 오이 맛사지. ...이게 왜?“ ...이상해, 이상하다구~! “...무슨 노래가 그러냐?” 재범이 힘겹게 말하자, 현이 또랑또랑하게 노래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 노래의 주인공은 오이 맛사지를 해서 피부를 깨끗하고 탄력있게 가꾸는 사람이야.” ...탄력있게? “주인공은 아프리카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착한 아프리카 사람은 주인공에게 케이크를 사 줘.” ...뭘 사줘? “그런데 케이크가 아프리카에서 만든 거라 배탈이 난 거야.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못생긴 간호사가 주인공을 보고 반가워한거지.” ...어디서 만들어서 배탈이 나...? “주인공이 간호사보고 징그러워요, 하니까 간호사가 주인공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거야.” ...뭐? “이 노래는 아주 심오한 노래지. 그러니까 네가 못 알아드는 것도 이해가 가. 이 노래를 잘 생각해보면 중요한 것을 알아챌 수가 있어. 바로 이 간호사가 처음에 케잌을 사 주었던 아프리카 인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이 모든 가사가 설명 가능해져. 즉, 간호사는 처음부터 주인공을 사랑했던 거야.“ ...그러니까...? 입만 벌리고 있는 재범의 뒤에서 천천히 선우의 몸이 아래로 허물어졌다. “여기서 다시 의문점이 들지. 대체 간호사는 왜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 걸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주인공이 오이 맛사지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 아프리카 사람은 주인공이 오이 맛사지로 가꾼 희고 탄력있는 피부에서 사랑을 느낀 거야.“ ...신이여...저는 미국으로 갈 수 있을까요? 천천히 재가 되어 휘날리는 재범의 앞에서 윤 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얼마만큼의 인종 차별적 어감이 풍기기는 하지만, 실상은 가슴 아픈 사랑 노래야. 무엇보다 인종을 넘어선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노래지.” ...다 좋은데 나도 그걸 불러야 하냐? ...어머니.. 재범은 울고 싶었다. 결국 하루 종일 괴상한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을 해야 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재범은 이제 새파랗게 독이 올라 있었다. ..저 윤현이라는 이상한 녀석을 가만 두지 않으면 내 이름은 안 재범이 아니다~! 그래서 재범은 다시 계획을 세웠다. 선우라는 형도 자는 곳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그래, 윤 현의 방에 마직막 날이니 같이 잔다는 핑계로 들어가서 얼굴에 창피한 낙서를 해줘야지. 침대에 물도 부어주고... 아, 맞다. 깜깜한 어둠, 닫힌 방문을 이용해서 몇 대 때려줘도 되겠지? 흐흐, 거리면서 재범은 베개를 들고 윤현의 방으로 갔다. 다행히 윤현은 재범의 말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재범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왜 이래?” 아직 때리지도 않았건만. 생각했던 악행들 중 단 하나도 하지 않았건만 대체 왜 윤현이 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괴롭힘을 당한 것은 재범이지, 윤현이 아니었다. “흐윽, 내일 학교 가면 나 싫어하게 될 거야.” ...학교?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과 같은 학교라고 했지. 그렇다면 윤 현을 괴롭힐 기회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거군.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놓였다. (이미 재범은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주된 목적은 슬그머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재범은 슬슬 윤현을 달래면서, 약속이라며 새끼 손가락까지 걸어주는 관대함을 베풀었다. 그리고는 재범보다 약간 작은 윤현을 안고 침대에 눕자, 윤현이 울어서인지 곧 새근거리며 잠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 녀석 정말 예쁘게 생겼다. 재범은 윤현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성격도 생긴 것과 똑같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윤현이라는 녀석의 성격이 다만 정상인처럼만 됐으면... 아니, 그 전에 그 지독한 끈기만 없었더라면... 점점 소망의 범위가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재범은 천천히 윤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장이라도 깰 것 같아 흠칫거리며 하얀 피부를 만지는데도, 윤현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피부 감촉에 재범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천천히 얼굴을 숙였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윤 현의 빨간 입술도 이렇게 부드러운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래도 사실 다행이었다. 이렇게 이상한 성격을 가진 현이니, 다른 사람들이 달라붙지는 않을 것 아닌가. ...엉?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재범이 미칠 듯 뛰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면서 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 이녀석...” 어느 새 들어온 것인지, 사랑스러운 막내에게 굿 나잇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선우가 음산하게 말하면서 재범을 번쩍 들어올렸다. “...죽었어, 넌.” 현을 신경쓰며 작게 말한 선우가 그대로 재범을 끌고 다른 방으로 가는 동안 재범은 풀린 눈을 하고 고민을 계속 하고 있었다. ...재범은 이 낯선 땅에 와서 내가 미쳤지 싶었다. -소년, 12세에 어른들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다.- -36- “...현아?” 입을 뗀 재범이가 뜨거운 목소리로 가쁘게 말을 했다. 잠깐, 뜨거운 목소리...? 뭔가가 이상하다, 라고 느낀 것도 잠시, 재범이의 얼굴이 한 개에서 두개가 되더니 이윽고 세 개가 되어 공중에서 하나로 합체를 했다. 오옷, 재주도 많은 녀석 같으니, 하면서 헤벌쭉 웃고 있자니, 재범이가 내 이마에 손을 댔다가 후다닥 떼었다. “너, 열이 나잖아?” 그, 그런가? 잘 모르겠다. 빤히 재범이를 바라보자, 재범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왜 그래?” 그러다가 재범이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으응? 뭐가? 오히려 내가 재범이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나온다. 설마 나 계속 이렇게 웃고 있었던 건가? 대체 왜 이렇게 웃고 있는 거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재범이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아, 그래. 대답을 해 줘야지. 그런데 재범이가 뭐라고 물어봤었더라? 억지로 생각을 해 보았지만 도통 그 질문이 뭐였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 속은 누가 스프레이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점점 뿌옇게 되어서, 급기야는 온 몸이 풍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뿌연 세상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들처업고 뛰었던 듯도 했다. 나는 따뜻한 등판에 기대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푸헤헤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오늘, 세상은 아름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눈을 떠 보니 나는 기숙사 내 방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지금 이건 현실?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민준이가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가 내가 눈을 뜬 것을 보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런 젠장, 잠이 덜 깼나?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하는 김에 이불까지 뒤집어쓰자 민준이 갑자기 이불을 홱 벗겨버렸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대답을 해 봐~! 대체 이 난장판이 무슨 일인지!” “난장판이라니?” 뚱하게 대답하자, 민준이 핏줄이 선 손으로 방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이 걸 보고도 그런 의문이 생기냐?” 으엥? 이럴 수가... 혹시 이 방안에... “...군대라도 왔다 갔나?” 나도 모르게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자, 민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군대라니, 군대라니~! 모두 네가 한 짓이다, 이 웬수야~! 너는 대낮부터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거였냐?” “시끄러워, 머리 울려.”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미식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말하자, 민준이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씨근덕거렸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씩 웃는 폼이 묘하게, 상당히, 수상쩍었다. “...왜?” 퉁명스럽게 물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현이 너는 아직도 자각이 부족하구나. 우리는 친.구.잖.아.”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멋지게 웃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이유없이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자, 현아...” 내 쪽으로 다가오는 민준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역시, 괜히 기분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 한참동안 구역질을 하고 나오자, 민준이 초췌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쓸쓸히 앉아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민준의 모습에 나는 잠시동안 내 눈을 의심했더랬다. 민준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너 내가 그렇게 싫냐? 토할 정도로?” “응.” 단호히 말하자 민준이 몸을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물었다. “내 어디가 그렇게 싫은데? ” “싫은 점들을 모두 다 말해야 하냐?” 진지하게 되묻자, 민준이 갑자기 씩 웃었다. 그리고는 훗, 하면서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는 아직 어려서 어른의 매력을 몰라.” 모르긴 개뿔이... 나는 나날이 상태가 더 이상해지는 민준의 모습에 왈칵 두려움을 느꼈다. 저 녀석이 여기서 더 상태가 이상해지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앞으로 민준을 잘 지켜봐야겠다, 라고 결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불을 둘둘 말고 한참을 자다 일어나니, 어느새 날은 거의 밝아져 오고 있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 눈을 뜨고 누워 한참동안 양들을 세어 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방을 나오기 전에 내 옆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민준을 몇 번 가볍게 차 주자, 민준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살며시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들 단잠에 빠진 듯 기숙사의 복도는 고요한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한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 대화실에 도착해 불을 켰다. 그리고 그대로 의자에 앉으려다가, 나는 깜짝 놀라서 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사람도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안 자도 돼?” 깜깜한 대화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던 주인공, 이 승호가 나에게 툭하고 말을 걸었다. “...응. ” 고개를 끄덕이고 푹신한 의자에 앉자, 승호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결국 그 시선에 못 이긴 나는, 승호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너는 안 졸려?” “....괜찮아.” 승호는 낮게 말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있지도 않았던 나는, 의자에 앉아 이것 저것 여러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승호가 갑자기 침묵을 깨고 불쑥 말을 했다. “현이 너는...이제까지...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어?” ...엥? 이건 또 웬 난데없는 질문이란 말인가? 눈만 뎅그랗게 뜨고 승호를 바라보자, 승호가 나에게 똑바로 시선을 부딪쳐왔다.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실린 승호의 눈빛에 나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승호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해달라는 건가? 으음.... “같은 동기고...(비록 괴롭힘을 당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같은 반에 다니고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어렵다. 친구...? 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관계가 승호와 나 사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말을 하다 말고 멀뚱히 승호를 바라보자, 승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허탈한 듯 하면서도, 우울함이 짙게 배어있는 그 미소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승호가 스치듯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우리는 결국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었지.” 나는 말 없이 승호를 바라보았다. 승호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일어선 승호는 나에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약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처럼 이렇게 네 옆에 계속 있어도 될까? “ 승호가 짓고 있는 미소가 너무 어색해 보여서, 그리고 승호의 모습이 주눅든 아이처럼 처량해 보여서, 차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승호는 그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갈게. 나중에 보자.” 문을 닫고 나가는 승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배 중간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들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나를 당황하게 했다. 문득 펼쳐본 내 손은, 창가에 비쳐진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파묻혀서, 아직도 내 손은 이렇게 작구나, 하는 실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이유없이 무너질 듯 흔들거리기 시작하는 마음들 사이에 묻혀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했다. -내 나이 17살 어느 아침, 표류하는 듯한 기분을 깨닫다.- -37- 중간 고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어서, 중간고사 준비를 충실히 하지 못해 걱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결국 중간고사 대비 밤샘은 하지도 못했다.) 시험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겨우 시험이 끝났다 했더니... ...축제라는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들뜬 기색의 사람들과 떠들썩한 교내 분위기와는 별개로, 지금 나는 고민 하나를 안고 있었다. 재범이가 또다시 나를 피해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이 녀석이~?! 울컥하는 기분보다, 서운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때 꼬마, 강 진우가 나를 찾아왔다. “.....” 나를 불러낸 강 진우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강 진우는 저번에 봤을 때 나에게 지어줬던 귀여운 표정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였다. ...너무 오래 쳐다봤나? 자, 어서 할 말을 해 봐, 하는 눈빛을 보내자, 강 진우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야?” ...뭐가? 그렇게 다짜고짜 말하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다. 침묵을 지키는 내 모습에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진우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난 절대로 재범이를 뺏길 수 없어! 지금 재범이와 사귀는 사람은 나라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말하는 진우의 모습에 나는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군, 지금 그걸 말하는 거였어. 나는 뒤늦게 상황을 납득하고 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도 재범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러자 내 말에 충격을 받은 건지 진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런, 내가 너무 심한 건가? 그렇지만 말이다, 나도 진정한 친구 후보 명단에서 재범이의 이름을 빼놓고 싶지 않단 말이다. 아무리 강 진우가 재범이와 절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나라는 인물이 한 명, 그 친구라는 명단에 끼어들 수도 있지 않은가? “...너는...너는 재범이말고도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택할 수 있잖아! 하지만 나는 재범이가 다야~!” 나는 진우의 말에 몸을 움찔했다. 예리한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눈치가 상당히 빠른 것 같다. 지금 민준이라는 녀석이 내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수상쩍은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다니 말이다. 게다가 진우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본후,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너도 재범이 말고는 친구가 없나 보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근거 없는 동질감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진우에게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우리 세 명이서 같이 사귀면 안 될까?” 내가 말을 하자, 한동안 주위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진우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귀를 한 번 후비고, 다시 나를 바라보고, 왜인지 자신의 머리도 통통 때려보고 있었다. 그 괴이한 진우의 행동들에 나는 다소 진우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라고?” 진우는 한참후에야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진우의 풀린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다시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다. “그러니까...나도 재범이밖에는 없어. 하지만 너는 재범이를 놓아줄 수 없다고 하고... 그렇다면 우리 셋이 같이 사귀는 수밖에...“ “자, 잠깐만~!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진우가 버럭 소리를 질러 내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지만.... 마, 마, 맞아~! 윤 현, 네 그 말은 나와도 사귄다는 말인데 그래도 좋아?” 나는 온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더듬더듬 말하는 진우를 바라보며 한껏 커다랗게 미소지었다. “물론, 괜찮아.” 내 말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진우가 비틀비틀 거리면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섰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중얼대면서 때때로 스스로의 머리를 벽에 부딪혀댔다. 그 광적이기까지 한 진우의 행동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멀뚱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여, 역시 이런 건 안 돼~!” 그러다가 진우가 그 괴상한 행동들을 멈추고, 크게 외치고는 엄청난 기세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멀뚱히 진우의 얼굴을 바라보자, 진우는 입만 달싹달싹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급기야는 한숨까지 내쉬더니, 주먹을 세게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셋이서 사...귄다는 것은 좋지 않아...” 그리고는 겨우 꺼낸 말이 이 것이다. 진우는 뛰엄뛰엄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나중에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왜?” 왜 셋이서 진정한 친구가 되면 안 된다는 거지?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질문에 진우가 더 이상 붉어질 수도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들였던 얼굴색을 새하얗게 바꾸었다. 그 빠른 얼굴색의 변화에 감탄하면서 진우를 쳐다보자, 이번에는 내 앞에서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리는 기술까지 선보여 주었다. “그, 그런 것은~! 잘못된 일이야!! 그러니까...! 마, 맞아~! 윤 현 너도 나한테 키스하고 싶지는 않잖아?“ 음, 그렇군. 그게 문제였던가. 하하핫, 그런 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는데. 나는 이미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 행한다는 키스라는 기술을 완벽하게 행할 준비와 자세를 갖추고 있단 말이다. 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진우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진우의 눈이 땡그랗게 커진다. “...윤...현...” 나는 진우의 몸을 내 쪽으로 잡아 끌었다. 그러자 진우가 순순히 내 쪽으로 끌려온다. 긴장해서인지 굳어있는 진우의 입에 입술을 갖다대어 키스를 하려는데 진우가 갑자기 후다닥 나를 밀쳐냈다. “...으아악~!” 그리고는 괴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저 멀리로 아련하게 사라져가는 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움에 혀를 찼다. ...이번 기회에 세 명이서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내 나이 17, 중간 고사가 끝난 방과 후에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쏘라는 속담 하나를 직접 실행에 옮기다.- -38- 허망한 눈으로 진우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다가 그 자리를 떠나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응? 하면서 소리가 난 곳으로 걸어가 보자, 슬비와 민현이 벽에 기대어 궁상맞게 앉아 있다가 딱딱하게 얼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해?” 단순히 그저 인사차 물어본 것 뿐인데, 슬비와 민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벌린 채 계속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살짝 무서워진 나는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안녕.” 타닥타닥 기숙사로 걸어가면서 뻐적지근한 팔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다시 슬비와 민현의 태도를 생각해보아도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 둘의 멍한 표정과 시선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헉, 잠깐만~! 설마 그 녀석들 내가 진우에게 한 말을 모두 들은 건가? 쳇, 하긴 들었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오늘도 날씨는 지독히도 맑았고, 그리고 내 기분은 여전히 그리 좋지 못했다. 기숙사로 돌아가서 뒹굴거리는데, 누가 밖에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대체 누구지? 설마하지 민준이 이렇게 노크를 하고 들어올 리는 없을테고, 민현이나 아니면 승호인가? 음, 하지만 이해불가의 민준 녀석이라면 그 녀석이 노크를 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자, 기다란 생머리의 소녀, 이 슬비가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잠깐 할 말이 있어서. 괜찮을까?” 나는 문 앞에 서서 다소곳이 말하는 슬비를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슬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냥 안에서 이야기해도 괜찮은데...” “아니, 밖에서 하자.” 안에서 이야기하다가 민준 녀석이 오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음, 그 녀석이 관련된 일이라면 조건 반사적으로 상상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몸 속에 가득차게 된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슬비가 묘하게 서운한 듯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모습에 조금 미안해졌지만, 나는 꿋꿋이 슬비를 데리고 기숙사를 나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에 멈춰섰다. 슬비를 바라보며 시선으로 이야기를 재촉하자, 슬비가 눈을 깜박깜박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으응? 이건? 나는 촉촉한 물기가 느껴지는 슬비의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할 이야기는?” 내 질문에 슬비가 손가락으로 기다란 생머리를 잡아 뒤로 넘기면서 내 쪽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내 바로 앞에 서서 새초롬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슬비의 기다란 속눈썹을 바라보고만 있자, 슬비가 무엇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내 쪽으로 쓰러졌다. 순간 아찔한 꽃향기가 훅, 내 쪽으로 풍겼다. 나는 일단 슬비를 안아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곤혹스럽게 슬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슬비가 그대로 나에게 안겨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런, 설마 기절?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마에 손이라도 대어볼까 싶어 손을 들어올리려는데,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렸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슬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나에게서 떨어져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슬비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핸드폰을 보고, 핸드폰 벨 소리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로 인해 슬비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남몰래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슬비는 침착한 태도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짤막짤막하게 대답을 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훗, 하면서 천천히 말을 꺼내는 슬비의 모습이 낯설어,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슬비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현이 너는...” 슬비는 나를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은 미연 언니에 대한 거야. 언니에게 연락이 왔어. 언니와 오빠들이 회사 일로 바빠서 현이 너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지 못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일이 곧 쉽게 해결이 날 것 같다고 하셨어. 조만간 너에게 직접 연락을 하시겠다고...“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야?” 어지간해서는 눈 한 번 깜빡할 사람들이 아닌데, 하면서 궁금함을 담아 묻자, 슬비가 조개처럼 입을 꽈악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해주지 않을 듯한 슬비의 태도에 나 또한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한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슬비가 먼저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갈게.” “...아. 응. 고마워, 이렇게 말해 줘서.“ 내 말에 슬비는 오늘 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살풋이 웃었다. 그 어색하지 않은 미소에 비로서 슬비가 예전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내가 슬비를 따라서 미소짓자 슬비가 장난꾸러기처럼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원래대로라면 재범이 일을 보고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얌전히 입을 다물어 줄게. 그러니까 현이 너도 재범이에 대한 마음같은 것은 깨끗이 버리는 게 좋아.“ “....응?”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슬비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왜냐하면... ...현이 너와 재범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거든.“ 마지막으로 눈을 찡긋하며 돌아서는 슬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둘렀다.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네. 저 꼬마마녀가.” “...무거워.” 그 누군가, 즉 민준의 발등을 힘을 주어 발뒤꿈치로 꾹꾹 밟으면서 말하자, 내 어깨에 매달려 있던 민준이 징징대는 소리를 냈다. “너무해, 절.친.한 친구사이에.” “...그냥 절교하자.” 단호히 말하자 민준이 또다시 중얼대기 시작했다. “젠장, 왜 오늘따라 아리따운 시계의 노랫소리가 안 들리는 거지?” ....이런 돌멩이로 마빡을 얻어맞을 녀석을 봤나.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민준을 노려보며 묻자, 민준이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그대로 손가락을 잡아 꺾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억지로 그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그야 당연히 너를 뒤따라 왔지.” ...그게 어째서 당연히냐. 아니, 그런 것보다 어째서 그런 포즈를 취하면서 말을 하는 건데.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팔로 얼굴을 받치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민준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내 안에서 잠들어 있었던 폭력성향이 새록새록 눈을 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민준을 내버려두고 차갑게 몸을 돌려 기숙사로 걸어가자, 민준이 내 옆으로 다다다 쫓아와서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너무해~! 자꾸 그런 식으로 하면...” ...네가 뭘 어쩔 건데? 무시하는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무엇을 느낀 것인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반했냐?” 이런 젠장, 썩을~! 주워서 민준에게 던질 만한 적당한 돌멩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민준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현이 너는 슬비 공주님이 오늘 어째서 이렇게 쉽게 물러섰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냐?” 으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멀뚱히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아차~! 하면서 머리를 한 번 쳤다. “아마 너는 슬비 공주님이 아까 너한테 어떤 유혹을 하셨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간단하게 말해주지. 슬비 약혼자가 돌아왔어.“ “...약혼자?” “그래. 한 동안 외국에 나가있었거든. 그 약혼자씨는 덧붙여 이 학교를 주름잡는 실질적인 우두머리이기도 한 사람이야. 이제 그 사람이 왔으니, 더욱더 재미있어질 거다.“ 그러니까 결론은 슬비 약혼자가 돌아왔다, 그 약혼자는 이 학교 사람이다, 라는 것인가? 정리를 하고 있는 나를 민준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기대하고 있어, 윤 현.” ...웃긴 녀석. 대체 뭘 기대한다는 건지. -39- 부제 : 그대는 눈물겹다 1. 여기 한 꿈 많은 소년이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괜시리 슬퍼지는 17세의 소년, 그의 이름은 권 오성이었다. 명성 고등학교 1학년 9반에 재학중인 이 소년은 현재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고민은 그 또래의 소년들이 종종 하곤 하는 성적 걱정 같은 시시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지금 권 오성 소년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윤 현~! 하지만 같은 반 학생인 윤 현의 주위에는 이미 무서운 녀석들이 포진해 있어서, 권 오성은 아직까지도 윤 현에게 자신의 이름조차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 현 주위에 있는 무서운 녀석들은 권오성이 보기에 정말 깡패같은 것들이었다. 입학식 바로 다음날부터 속속들이 1학년 9반으로 반을 바꿔 들어온 이 녀석들은, 같은 학교 내에서의 전학을 직접 실행한 상식 없는 인간들이기도 했다. 게다가 기숙사에서는 다른 학생의 방을 빼앗아, 윤 현의 옆 방을 차지한, 개인적으로 무척 부러운 놈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권 오성, 17세 사나이~! 겨우 이 정도로 생숭거리는 마음을 접을 수는 없었다. 할 때는 하는 남자, 권 오성. 지금 그의 이야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미션 1. 화이트 데이 대 작전.= ‘화려함과 귀여움을 어필해 그녀의 마음을 노려라.’ ‘차별화가 승부~!’ 권 오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잡지를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지금 이 때만큼 요리를 가르쳤던 어머니께 감사했던 때가 있었던가?(단 한 번도 없었다.) 자, 드디어 윤 현에게 나의 이름을 알리리라~! -D-DAY-화이트 데이 당일.- 권 오성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학교에 왔다.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부스럭대면서 쇼핑백에서 소중히 선물을 꺼내 윤 현의 책상 속에 고이 넣은 권 오성.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확인점검하고 돌아가는 권 오성의 뒷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오늘은 순정을 품은 소년의 날이었다. -D-DAY- 윤 현 도착.- 드디어 윤 현이 교실에 도착한 것을 본 권 오성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윤 현이 느긋하게 자리에 앉으... ...려고 하는데, 옆에서 김 민현이 윤 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내가 여기 앉을게.” “....응.” 선뜻 자리를 내 준 윤 현은 묘하게 상쾌한 얼굴로 김 민현이 앉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랬다. 권 오성이 잊고 있던 것, 그것은... ...1학년 9반은 지정 좌석제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권 오성 소년은 참으로 억울했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감히 윤 현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던 거란 말이다! 권 오성은 김 민현이 책상 서랍에 가득 든 선물들을 꺼내 즐거운 얼굴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쓰러져 버렸다.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는 거 아냐?” 권 오성의 14년 지기, 양 승혁은 마음 먹고 권 오성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점점 초췌해지는 친구를 보다 못해 이렇게 나선 양 승혁은 권 오성의 얼굴을 보고 순간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권 오성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대로 양 승혁을 껴안았다. “흐흑, 친구야~!” “이, 이거 놔~!” 승혁은 발악하면서 권 오성을 떨궈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 때... 교실 문이 열리며, 윤 현이 그들을 힐끗 보고 지나쳤다. “...야?” 갑자기 조용해진 권 오성의 상태에 더욱 불안해진 양 승혁은 조용히 권 오성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야, 그만 둬, 왜 이래?” “놔!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안 돼~! 밑의 화단은 교장 선생님이 직접 가꾸시는 거란 말야!” “...지금 네가 제 정신이냐.” 양 승혁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권 오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네가 나를 비웃는 거냐? 이 의리라고는 쌀가루만큼도 없는 녀석!” “...비웃을만 하니까 비웃지!” 그 때 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 1이 권 오성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잠깐, 권 오성. 넌 윤 현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말 하는 거냐.“ “...알고 있어.” 권 오성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럼 윤 현 때문에 기숙사 1층에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있다던가, 또는 윤 현에게 접근한 사람이 어느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던가 하는 말들은 알고 있는 거야?.” 친구 2의 질문에 권 오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모두 알고 있지만,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포기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살아있으니까~!“ “....그게 대체 뭔 상관인데~! 그냥 포기하란 말이야~!” 양 승혁이 진절머리를 내면서 말하자, 오성이 상처입은 얼굴로 승혁을 바라보았다. “아냐, 승혁아. 지금 이건 네가 너무 심했어.” “...뭐?” 양 승혁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하는 친구 1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친구 1은 눈을 반짝이며 권 오성을 향해 말했다. “멋지다, 오성아. 솔직히 네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크읔,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대체 뭘?” 허망하게 물어보는 양 승혁을 제쳐두고, 친구 2가 권 오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짜식, 내가 도와주마.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고마워, 모두들 고마워~!” 그러자 친구 1이 오성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괜찮아, 대신 윤 현과 친해지면 나중에 우리도 소개시켜 줘야 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소년의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40- 부제 : 그대는 눈물겹다 2. =미션 2. 나의 존재를 알리자.=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말이지. 우선 윤 현에게 너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1의 말에 권 오성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은 내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것이 있는데... 잡지를 뒤져보니 스포츠를 열심히 하는 남자를 보면 가슴이 떨린다는 말이 있던데,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친구 2가 손을 턱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는 남자의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지.” 그러자 한 쪽에 서 있던 승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넌 운동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 말에 갑자기 암울해진 오성의 등을 두드려주며 친구 1이 다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우리만 믿어.” “...쓸데없이 그 녀석 격려해 주지 말란 말이야~!” 양 승혁은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역시나 오성과 친구 1,2에게는 승혁의 진심이 가득 담긴 절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라기보다는 무시하고 있었다.) “통계 결과를 보면 축구, 농구, 테니스계열의 운동을 하는 남자들이 인기가 많은 것으로 나왔으니까, 그 방향으로 시도 해 보자.” 심각하게 말하는 친구 2를 향해, 양 승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그 통계는 누가 낸 건데?” 그 물음에 친구 1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지금 네가 이 통계를 무시하는 거냐? 이건 다양한 연령대의 지식인들이 참여해서 나온 결과란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에서 낸 통계인데?” “월별 만화부분 인기순위.” ...그랬다. 양 승혁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권 오성과 그의 친구 1,2는 심각한 만화 중독자들이었다. 권 오성이 친구 1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슬x덩크나, 테니스의 x자, 휘x등을 보면 확실히 그렇지. 좋아. 너희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모든 것을 포기한 양 승혁은 조용히 구석에 가서 아무 말 없이 어서 이 소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1은 이런 양 승혁의 행동을 신경쓰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모든 것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으니.“ 그 말에 친구 2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게 되었을 때 그 효과가 더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이를 테면, 전대물에서 주인공들이 합체를 통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이 말에 깊은 동의를 표한 권 오성과 친구 1은 구체적인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밤새도록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놓인 높다란 장벽에 좌절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에 찬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이 포인트~! 여기서 연습의 형태는 여러 것이 있지만 장소와 상황 등을 분석해 봤을 때 가장 적절한 연습의 모습은 벽에 공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1의 말에 친구 2가 손가락을 양 옆으로 저어댔다. “아니, 아니지. 지금 그것을 의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아? 바로 의상~! 제대로 된 의상을 갖춰 입게 되면, 그 즉시 사용가능 파워는 500% 증가하게 되지.“ 그러자 권 오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겨우 500% 라니. 의상은 힘을 끌어내는 원동력이며 힘의 원천이 되는 존재다. 카드 캡터 xxx가 몸빼 바지를 입고 쓰레빠를 끌면서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어?“ 그 말에 친구 2가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으윽~! 이제 그만해~!” “....그건 이미 카드 캡터 xxx가 아니야!” 친구 2를 따라 절규하는 친구 1을 바라보며 권 오성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게다가 그 쓰레빠가.... 짝짝이라면?” “크읔~!” 침몰하는 친구 1과 2. 친구 2는 털썩 주저앉으며 괴롭게 말했다. “내가 말을 잘 못 했군. 그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상! 그럼 가장 중요한 것부터 의논해 볼까.“ 밤이 깊도록 토론을 한 친구 1,2와 권 오성. (양 승혁은 아까 전부터 자고 있었다.) 결국 그 세명은 밤을 새워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드디어 모든 것을 마스터한 그들은 완벽한 준비를 갖춘 후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승혁을 깨워서 끌고 나왔다. 그리고...윤 현이 나올 시간이 되었다. -작전 1. 의상은 완벽하게.- 오성은 법칙에 따라 완벽하게 의상을 갖추고 있었다. 토론 결과 옷은 농구복에, 축구화를 신고 테니스 양말을 신은 오성은 테니스 라켓과 공을 들고 기숙사에서 학교로 가는 쪽에 세워진 건물 벽 앞에 섰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옷과 머리에 물을 뿌려 인위적인 땀을 연출하고, 섹시하게 보이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목덜미에도 물을 몇 방울 뿌렸다. 거기에 더해 치밀하게 흙까지 군데군데 묻힌 오성은 긴장한 채 윤 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윤 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전 2.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라.- 오성은 테니스 공을 벽으로 던져 라켓으로 받아치며 커다랗게 외치기 시작했다. “96,97,98, 99,100...” 이것은 친구 1,2와의 열띤 논쟁 끝에 정한 숫자였다. 처음 의견으로는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이 나왔으나, 곧 그것은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는 지적 아래에 묵살되고 말았다. 과장되지 않고, 높은 실력을 드러내 줄 수 있는 숫자라는 지적 아래 결정된 횟수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윤 현과 그 일행이 이런 오성의 모습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오성은 라켓을 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밤을 새며 연습했는데도, 필살기를 완성하지 못하다니. ...하아. 이대로 쓰러지고 싶다.“ 오성은 마무리로 절망에 찬 몸짓으로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3. 끊임없이 도전하는 의지를 보여줘라.-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어~! 우승은 나의 것이니까!“ 오성은 라켓을 쥐고 다리를 떨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부라려 의지에 찬 모습을 보여주고, 테니스 공을 벽으로 던졌다. 이제 윤 현의 시선은 완전히 오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윤 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오성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만 헛 스윙을 하고 말았다. 오성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테니스 라켓은 커다란 파공음을 내며 윤 현이 서 있는 곳으로 날라갔다. -4, 머뭇거리는 상대방을 재촉할 조력자가 필요하다.- 작전 3을 끝낸 후, 오성의 모습에 감동한 윤 현이 오성에게 다가가 땀을 닦을 수건을 건네주도록 유도하기 위해 친구 1은 멋지게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오~~성~~!”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열심히 공을 치고 있어야 할 라켓은, 공중을 나는 모험을 끝내고 윤 현의 앞에 선 이 승호의 손아귀에 사뿐히 들려져 있었다.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오성,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는 윤 현과 그 일행들을 본 친구 1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그 자리에서 몸을 데구르르 구르며 외쳤다. “...공~~!” 후에 친구 1은 술을 먹으며, 앞으로 구르기가 성공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야 친구 1의 성공적인 앞구르기를 축하해 줄 만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구르르 구른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친구 1의 옆에는 구르는 사이 빠져나온 손수건이 뒹굴고 있었다. -5. 상대방의 호감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센스를 보여줘라.- 얼어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윤 현이 저벅저벅 걸어서 친구 1의 앞에 섰다. 윤 현은 떨어진 손수건을 집어들고 심각한 얼굴로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이 계획의 핵심 중 하나인 손수건은 오성의 미적 감각과 고상한 취미를 잘 알려줄 수 있도록 특별히 선정된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지금쯤 윤 현은 친구 1에게 이 손수건을 전달받고, 한 차례 감탄을 한 후 오성의 땀을 닦아주고 있어야 했다. 세 사람이 장장 한 시간동안이나 토론한 결과 결정한, 한정판 특별 사은품인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세 메인 캐릭터가 그려진 손수건을 집어 든 윤 현의 모습을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윤 현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손수건에 그려진 마리 앙뚜아네뜨와 앙드레, 오스칼의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윤 현이 손을 들어 손수건을 눈 가까이에 가져갔다. 오성과 친구 1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지금 윤 현에게 명작의 위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그 순간 윤 현이 다시 손을 내리고는 다른 손으로 앙투아네뜨의 눈 크기와 얼굴 크기를 재서 비교해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하는 한 마디. “...외계인?” 이 말에 친구 1은 잠시 동안 자신의 청각을 의심했다. 윤 현은 차가운 얼굴로 친구 1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힘 내세요, 아저씨.” 그리고 윤 현은 망설임없이 일행을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친구 1은 멍한 눈으로 윤 현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친구 1에게 오성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왔다. “있지, 오성아...나...” 친구 1은 풀린 눈으로 그런 오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죽을 만큼 기뻤어~! ” “알아, 네 맘 다 알아~!” 얼싸안고 눈물짓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친구 2가 천천히 몸을 드러내며 손가락으로 눈을 훔쳤다. “이런...눈에 모래가... ” 친구 1은 이런 친구 2를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우리 다음에는 잘 하자~!” “그래. 우선 계획부터 다시 세우자!” 굳게 다짐하는 세 명을 바라보며 승혁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다 좋은데, 우리 이대로는 지각이다.” 아름다운 우정이 펼쳐지고 있는 이 곳에, 소년들의 우정을 축복이라도 하듯 5분 늦게 나온 루치아노 빠가로티의 우렁찬 노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년, 17세에 새로운 세계에 눈뜨다.- -41- 현재 나는 민준의 사념 때문인지, 아니면 꼬인 내 일기 때문인지 한 떼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앉혀져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재범이를 찾아 혼자서 교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진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재범이의 절친한 친구인 진우라면 재범이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 반갑게 진우를 향해 걸어가는데, 문득 내 쪽을 바라본 진우가 미친 듯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다. 혹시 날 못 봤나? 싶어서 진우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가 이곳 저곳 기웃거리고 있자니, 한 떼의 학생들이 나를 빙 둘러쌌다. 으응? 이 사람들은?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이 사람들이 전에 교실로 찾아왔던 선배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내가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맞아, 이 녀석이야.” “하지만 이 분은 ..... 잖아.” “아니, 그것보다 소문에는...” 쑥덕대던 선배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그 중 한 선배가 앞으로 나왔다. 아, 역시 이 사람도 낯이 익은 선배였다. 우리 교실에 올 때마다 이 무리의 앞에 서서 말했던 선배가 고개를 까딱하면서 나에게 질문했다. “네가...안 재범 사촌, 맞나....? ....요?” 선배의 어색한 말투에 나는 선배가 내가 1학년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 보군, 하는 판단을 내렸다. 내 생각에는 3학년인 걸로 추정되는 선배가 나에게 존대말을 하는 모습이 과히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내 말에 그 선배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다른 학생들과 수군수군 의논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를 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같이 가 주지 않을래...요?” ...존대말하는 것이 취미인 건가, 이 선배는? 교실에 와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더듬거리는 선배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를 빙 둘러쌌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데려간다, 라고 생각했는데, 옥상으로 가는 계단 아래에 있는 창고로 가는 것이다. 창고의 문을 열자, 생각과는 달리 넓고 깨끗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 정정하겠다. 이 곳은 창고가 아니라 서클룸같은 곳이었나 보다. 같이 왔던 사람들은 그 곳에 들어가서 모두 일제히 벽 앞에 쭈루룩 늘어 서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그 옆에 뻘쭘히 서 있자, 사람들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던 사람이 크하하, 웃더니 내 쪽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으음, 지금 나에게 오라고 하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것이 맞나 보다. 창피함을 참으며 나를 부른 사람 앞에 다가가 그 앞의 소파에 앉자,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스듬히 앉았다. 그리고는 묻는 말이 이 것이었다. “네가 윤 현이냐?” ...대체 왜 이런 질문 같지도 않은 것을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남자는 그 질문이 그저 단순한 확인작업이었던 듯 흐리게 웃었다. “내 이름은 김 천호다. ”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너, 굉장히 말이 없구나, 역시. 그 녀석, 이런 사람이 좋다는 건가.“ 그 말을 끝으로 김 천호라는 남자는 다시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에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김 천호라는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갈색이 섞인 머리카락은 가끔씩 햇빛이 와서 비출 때마다 불그스레한 색을 띄었다. 김 천호는 앞머리가 이마를 덮어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는데, 어딘가 묘하게 흐린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길쭉한 팔다리, 그리고 군살이 없이 탄탄한 몸매를 차례로 바라보다가, 문득 지루해져서 그대로 소파에 얼굴을 기댔다. 뜨거운 햇빛이 얼굴을 간지럽혀 눈을 찌푸리자, 누군가가 눈치 빠르게 커텐을 쳐 주었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반쯤 졸고 있는데, 김 천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윤 현, 너는 어째서 아무것도 안 물어보냐? 보통 누구든지 이 쯤에서 왜 데려왔는지 정도는 물어보지 않냐?“ ...내가 물어봐줬으면 하는 건가, 이 사람은.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굉장히 독특한 사람인 것 같다. 물어봐주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조금 귀찮다. 아무말 없이 고개를 흔들어 물어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나타내자 김 천호가 다시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뭐, 그럼 역시 이야기는 단 둘이 앉아서 하는 게 좋겠지.“ 김 천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주루룩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일사 분란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김 천호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더 이상한 녀석을 상상했는데,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일단은 칭찬이라고 생각해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김 천호가 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소파에 몸을 눕혔다. “...슬비를 어떻게 생각하냐?” ...순간 그 물음의 의미보다 기시감이 먼저 나에게 덮쳐왔다. 요즘 수없이 들은 듯한 질문. [나를 어떻게 생각해?] 물어보며 제 멋대로 상처 입고 돌아서던 뒷 모습. 떠오르는 영상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자, 김 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냐?” 뭐가 그런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김 천호를 바라보았다. “...아, 역시 귀찮아. 이런 건 적성에 안 맞는다니까.“ “...슬비와 어떤...” 그제서야 나는 김 천호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사실 질문을 하면서도 나는 자연스레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며칠 전 민준이 무척이나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던 사람을 말이다. “일단은 약...혼자랄까?”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과감히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 천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 말이나 한다는 듯이 툭하고 말을 건넸다. “너는...재범이 녀석이 네 사촌이지?” “...네.” “재범이 아직도 까불고 다닌다며? 다른 녀석들이 난리 치더라.“ 그 말에 순간적으로 교실로 찾아오던 선배 무리들과 학교를 지배한다는 김 천호, 그리고 재범이의 관계가 연산이 되기 시작했다. “뭐, 나야 상관하기 귀찮아서 무시해버렸지만. 건방진 후배가 어디 한 둘이냐? 짜식들, 괜히 얻어맞고 와서 어디서 하소연이야?“ 그 연산은 이어진 김천호의 말에 자동 중단되어버렸다. 김 천호는 정말로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박 민준 그 녀석한테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그 말에 순간적으로 귀가 번쩍 트였다. “...민준이요?” 조심스럽게 묻자, 김 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바람둥이 녀석. 생긴 것처럼 아주 지능적으로 놀아대지. 그 녀석은 특별히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라서 상대하기 귀찮아.“ 그 확고 명료한 말에 나는 진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민준 녀석은 사기꾼이군요?” 내가 눈을 빛내며 물어보자 김 천호가, 아니 김 천호 선배님이 잠시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더 질이 나빠.” 오오, 역시~! 그러고 보니 민준이 했던 그 엄청난 협박이 스물스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민준이 학교 이사라는 천 회장님이라는 분과 잘 안다는 말이 사실이예요?” 조심스럽게 묻자, 김 천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간단명료한 대답에 시커먼 절망이 나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 그러면... 천 회장님이 혹시...” ...뭐라고 물어야 하나? 그 분 혹시 깡패라는 직종에 종사하고 계시지 않나요? 젠장, 그렇게 묻는 것은 너무 직설적이잖아~! “...왜? 굉장히 좋으신 분이지. 지금 나이 80이 다 되셔서 이제 은퇴를 고려하시는...” ...순간 뒷골이 땡겨오기 시작했다. “...저기 그럼, 그 분이 혹시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뼈를 부러뜨리거나 아니면...” “...틀니하시고 콜록거리시면서 다니시는 분이?” ....그렇구나. 민준, 네 녀석은 어쩌면... 이렇게... 후훗훗... 허탈하게 웃음짓는 내 모습에 무엇을 느낀 것인지 김 천호 선배님이(점점 호칭이 올라가고 있다) 자리에서 꾸물꾸물 일어나 앉으셨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어딘가로 걸어가서 구석에 놓인 박스 안에서 초록색 유리병을 가득 꺼내 오셨다. “...목 마르지? 마셔라.” 뚜껑을 비틀어 열어 나에게 건네는 김 천호 선배님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나는 건네진 유리병을 쳐들었다. 막 마시려는데 알싸한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소 주저하며 다시 병을 내려놓자, 앞에서 김 천호 선배님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도수 약한 국산 술이야.”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정말로 기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럽다. 나는 병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들이키는 순간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설마... 단지 느낌일 뿐이겠지. 저렇게 좋으신, 민준 녀석의 사악함마저도 잘 알고 계신 천호 선배님이 설마 거짓말을 하셨겠어?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술 병을 내려놓는데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나도 술이 약한 것이 아니니, 이 정도로 취할 리가 없을 텐데? 역시 요즘 피곤하긴 피곤했나 보다. 이렇게 자주 기력이 딸리는 것을 보면. “...민준이...” 막상 말을 꺼내고 나자, 복받치는 것은 설움뿐이라, 나는 잠시 동안 말도 하지 못하고 공중의 먼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민준이 양호 선생님을 무서워하는 것은 왜...” 그러는 거예요? 라고 물으려는데 갑자기 김 천호 선배님이 푸확~! 하면서 나에게 마시고 있던 술을 내뿜었다. 졸지에 술을 뒤집어쓴 나는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미, 미안.” 꽤나 당황한 듯이 일어서는 김 천호 선배님에게 괜찮다고 말씀드리는데도, 김 천호 선배님은 술병을 꺼내온 박스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뿜었다. “양호 선생님...” 고뇌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씀하신 김 천호 선배님은 천천히 나를 돌아보셨다. “양호 선생님이 박 민준의 형수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양호 선생님이 박 민준...의... 형수? 에엣~! 말도 안 돼를 외치고 있는 사이 천호 선배님이 작은 천 조각을 들고 나에게 다가오셨다. “미안. 벌써 다른 사람이 수건을 다 써나 보네. 그냥 이걸로 닦자.“ 선배가 나에게 다가와 천으로 이곳 저곳을 꼼꼼히 닦아주고 계시는데, 갑자기 문이 콰당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앞에는 슬비가 씨근덕거리며 서 있었다. -42- 부제 : 스승의 은혜는. 현재 나이 42세. 일류 명문 명성 고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천 봉수 선생. 그는 1학년 9반의 담임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천 선생은...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복도 벽에 기대어 유리창 너머의 초록색 나뭇잎을 보고 있자니, 천 선생은 문득 무척이나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담임인데, 교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숨듯이 앉아있는 꼴이라니. 이대로는 교사의 권위가~!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던 천 선생은 거칠게 문을 열고 나오는 문제아 안 재범의 모습에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취하며 애교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안 재범은 그런 천 선생을 쳐다보지도 않고 거칠게 욕을 중얼거리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저, 저런 못되먹은 녀석!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되거늘~! 그렇지만 재범의 살벌한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느새 손까지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있는 천 선생은, 한 사람의 학생을 위해 다른 많은 학생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천 선생은 다시 복도에 앉아서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 소란스런 고함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 선생은 학생들의 자율을 존중하는 자상한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이 승호와 한 떼의 학생들이 어디론가 우루루 몰려나갔다. “...” 복도에 앉아 있어서 천 선생이 선생님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학생들은 천 선생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천 선생은 학생들의 그런 건방진 행동을 대하고, 여린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으셨다. ‘이 녀석들을~!’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 선생의 눈동자는 어떤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때 또다시 교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넌 또 누구...!” “여기서 뭐 하십니까?”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박 민준의 시선에 천 선생은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어, 어디 가나?” “볼 일이 있어서요.” 싸가지없게 대답하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박 민준의 등 뒤를 향해 천 선생은 박력있게..! “잘 갔다 오게.” 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 것은 천 선생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천 선생도 온갖 소문의 주인공인 박 민준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고로 군자란 스스로 더러운 것을 피해 가는 법. 천 선생의 행동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천 선생은 민준이 사라질 때까지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가 민준의 모습이 사라진 후 불평을 중얼거리며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래 봬도 교사 생활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 교사인 천 선생은, 끓어오르는 교사 혼을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이대로는 교권이 무너진다~!’ 직감적으로 이 사실을 눈치챈 천 선생은 아직도 저릿저릿한 다리의 통증을 없애기 위해 코에 침을 바르며 생각에 열중했다. 그 때 또다시 교실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나오는 이를 바라 본 천 선생의 시선에 윤 현과 김 민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호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예의바르게 말하는 윤 현의 차가운 얼굴 앞에서 천 선생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과반수 이상이 교실에 앉아 있으니 수업 진행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을 듯 싶었다. 천 선생은 나날이 수척해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빈자리, 그리고 학생들의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천 선생이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일개 평교사라지만, 이 곳 명성의 학생들이 일명 엘리트라고 불리는 상류층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래, 다시 한 번 선생님의 권위를 세워야만 해!’ 굳게 결심한 천 선생은 드디어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정말 이러셔도 돼요?” “자, 어서~!” 영란은 안절부절 못한 채 천 선생을 바라보았다. 천 선생은 흔들림 없는 굳센 눈동자로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재촉했다. 그러자 영란이 결국 할 수 없다는 듯이 손에 든 것을 팽팽하게 한 번 잡아당겨 보고는 그것을 천 선생의 머리에 묶기 시작했다. 천 선생은 아내를 여위고 혼자 키워낸 사랑스러운 딸, 영란이 자신의 머리에 ‘그것’을 묶는 것을 끝마치자, 식탁 위에 놓인 초록색 참 이슬 병을 들고 들이키기 시작했다. 한 병을 원샷하고 내려놓은 천 선생은 다른 병을 들어 안주도 없이 벌컥대며 들이켰다. 초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영란의 애절한 눈동자를 무시하고 참 이슬을 3병 하고도 반이 넘게 마신 후에야, 천 선생의 동작이 멈추었다. “끄억~!” 마지막으로 트림을 거세게 하고 현관을 나서는 천 선생의 머리에는 화려한 넥타이 하나가 묶여서 펄럭이고 있었다. 천 선생의 숨겨진 능력, 그것은 술을 마시고 넥타이를 머리에 묶으면 삼돌이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삼돌이로 변신하게 되면 우선 목소리가 커지며, 간이 어디론가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천 선생이었을 때 차마 하지 못했던 여러 일들(어떤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있는)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삼돌이로 변해서 반 안의 탈선 학생들을 혼내주고 그로써 교사의 권위를 세우기로 계획을 세운 천 선생은, 주위 사람들의 경악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꺼억! 소리를 연달아 내며 휘청이는 걸음으로 교실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떤 건방진 녀석이 교탁 앞에 서서 천 선생이 들어가는데도 자리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약 평소의 천 선생이라면 여기서 점잖게 “...저기, 선생님 왔단다...” 라는 식으로 중얼거렸겠지만, 지금 천 선생은 삼돌이로 변신해 있었다. 거침 없는 발 걸음으로 교탁 앞에 선 녀석에게 다가간 천 선생은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쳤다. “아직도 자리에 않 앉고 뭐하는 거냐~!” 그런데 천 선생의 고함 소리에 앞에 서 있는 녀석이 건방지게도 피식 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미소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천 선생은 발을 들어 그 녀석의 다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 건방진 녀석은 겁을 상실했는지 여유있게 천 선생의 발을 피했다. 그리고 더욱더 화가 나, 이성을 시집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천 선생의 어깨를 탁 붙잡으며, 그 건방진 녀석은 황당하다는 듯이 지껄였다. “여기 1학년 8반입니다. 전 8반 단임이구요.” ...삼돌이는 많은 유용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단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단점 중의 하나로 시력 저하, 기억력 저하등을 들 수 있다. 잠시 좌절한 천 선생, 하지만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 양들을 떠올리고 다시 힘을 내어 9반에 들어갔다. 9반 학생들의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를 무시하고 교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는 천 선생의 시야에 빈 자리 하나가 들어왔다. “오늘 결석한 저 녀석 누구야~!” 천 선생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학생들은 조용하게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더욱 더 흥분한 천 선생은 발까지 탕탕 구르면서 소리쳤다. “저 녀석 누구냐니까~!” 그 때 교실 문이 열리면서 한 학생이 교실로 뛰어들어왔다. “큰일났어! 지금 윤 현이 김 천호 선배 패거리한테 잡혀갔어~!” 그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몇몇 녀석이 바람처럼 튀어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교실이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차더니 교실의 반수 이상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연이어 사라져버렸다. 천 선생은 황량한 교실을 둘러보며 외로이 중얼거렸다. “...윤 현이 결석했구나.” 천 선생이 쓸쓸히 중얼거리는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교실 안의 전화기가 따르릉 거리며 울렸댔다, 천 선생이 전화기를 들어올리자, 교장 비서라는 젊은 여인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천 선생님, 수업 끝나시고 교장 선생님께서 당장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네, 네? 어째서?” “오늘 천 선생님의 등교 모습을 본 사람들의 항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와서 사정을 이야기해주세요.” 교장 비서는 약간 동정심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고, 천 선생은 결국 뚜뚜 거리는 수화기를 들고 슬픈 눈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나이 42세에 능력의 한계를 느끼다.- -43- 슬비를 보고 고개를 까닥하는데, 슬비는 답례도 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질문에 김 천호 선배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시는 대로...랄까.” “...너...!” 슬비가 이를 악물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찰나, 김 천호 선배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찮게 해서 미안. 그럼 다음에 보자.“ 그 명백한 축객령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면서도 슬비와 김 천호 선배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미적미적 걸어가는데, 저 한 쪽 구석에 재범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리쳐 부르려다가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재범이의 옆에 다정히 서 있는 진우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다정해 보이는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무척이나 외로워졌다. 나는 가만히 복도 창문앞에 서서 유리창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뽀득뽀득 소리를 내는 유리창, 그리고 유리창 너머에 서 있는 재범이와 진우. 재범이와 나 사이에는, 이 유리창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한 두께를 가지고 있는 벽이 놓여 있는 것만 같아 나는 몇 번이고 유리창에 손가락을 문질러댔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보면 언젠가 유리창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축제가 시작되었다. 우리 반은 연극인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는데 나와 또 내가 아는 녀석들은 한 명도 이 연극에 참가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처음 해 보는 연극이라는 것에 나름대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 아이들은 우리 쪽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같이 하자고 권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축제라는 것을 맞이하게 되었다. 축제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나는 민준을 밀어내고 먼저 기숙사를 나와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체 모를 상자를 낑낑대며 들고 와서 여기저기 늘어놓는 학생들의 모습이 활기차서, 보기 좋다, 라고 애늙은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슬비가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없을까?” 슬비의 요청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 슬비가 앞장서서 어디론가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슬비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도착한 곳은 눈에 익은 학교 옥상이었다.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들어 어정쩡하게 서 있자니, 슬비가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순간 나는 또다시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슬비는 그런 내 모습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등을 곧게 세우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슬비의 당당한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이 떨리고 있는 슬비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윤 현, 너를 좋아해.” 슬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슬비의 꽉 쥔 주먹이 지금 슬비의 심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나를 숨막히게 했다. “...” “...어렸을 때부터,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좋아했어. 만약 너만 내 마음을 받아준다면, 이런 우습지도 않은 약혼 같은 것은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대답을 구하는 슬비의 진지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을 꺼내놓고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나는 너와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친구가 아니라...연인이 되고 싶어.” 슬비는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해 하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절의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당당하고 곧은 눈동자, 쭉 펴진 등, 그리고 꽉 쥐어진 주먹... “너를 보면,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이어진 슬비의 속삭임에 나는 잠시 동안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 잠깐~! 키스는 친구 사이에 하는 게 아니었어?“ 멍한 얼굴로 묻는 나를 향해, 슬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친구 사이에 키스하지는 않아. 너를 사랑하니까, 이렇게나 좋아하니까 자꾸 만지고 싶고, 옆에 있고 싶은 거야.“ ...순간 쿵, 하고 어디선가 돌덩이가 내려와 내 가슴을 후려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슬비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런 슬비를 보면서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안해.” 그 짤막한 말에 슬비의 걸음이 일순 멈춰졌다. “...정말로...” “...그만~!” 단호하게 말하는 슬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슬비에게만은 유독 약했던 이유, 예전 이 승호가 물어봤었던 슬비에게만은 달라졌던 내 행동의 이유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슬비의 모습에 한 사람의 모습이 겹쳐졌다. 혈육의 이름을 가지고 언제나 든든히 나를 지탱해줬던 미연 누나의 모습이. 그래서... 나는 더욱더 미안해졌다. “...슬비야...” “어째서?” 작게 물어보는 슬비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슬비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지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 없이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옥상을 빠져나왔다. 옥상을 빠져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슬비를 바라보았을 때, 물탱크가 설치된 구석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천호 선배님은 나른한 표정으로 나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답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육중한 옥상 문을 닫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떻게 됐냐? 공주님이 뭐라고 하셨어?” 옥상 문 앞에 있는 계단에 앉아 있던 민준이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태연하게 지껄여댔다. 그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에는 머릿 속 전체가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 없이 민준을 잡아끌고, 사람이 없는 빈교실을 찾아 다녔다. 다행히 축제라서 그런지 아무도 없는 교실 하나를 곧 발견할 수 있었다. 교실문을 닫고, 민준을 향해 돌아서자, 민준이 싱긋 웃었다. “표정이 살벌한데? 무섭게 왜 그래?”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로 말하는 민준을 향해, 나는 차가운 어조로 질문했다. “...왜 나한테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거짓말들을 한 거냐?” “무슨 거짓말? 생각나는게...” “...없다는 이야기냐? 단 하나도?” “어이,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쯧, 너무 많아서 뭔지 모르겠단 말이다.” ...이대로는 민준의 페이스에 끌려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 나는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사장에 관한 일부터 시작해서 친구 사이에는 뭘 어쩐다고...? 대체 그런 말들을 해서 네가 얻는 게 뭐냐?“ “...공주님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셨군.” 쯧쯧, 혀를 차면서 말하는 민준의 태도에 정말로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민준이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거냐?” “뭘?” 짧게 반문하자 민준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 현, 너는 항상 그렇게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지. 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스스로의 시각으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그것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네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둬라.“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애써 담담한 척 가장하며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단 이 일에서 나는 지켜보기만 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서 말이야. 뭐, 나중에 혹시라도 기분이 동하면 끼어들게 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이 곳 저 곳을 평가하면서 끼어들어갈 곳을 재고 있는 중이거든.“ “...?” “너희 형제들이 왜 갑자기 너에게 연락을 안 하는지 한 번이라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냐?” “...바쁜 일이 생겼다고...” “바쁜 일은 바쁜 일이지. 성진 그룹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떼거지로 연합해서 계속 일을 터뜨리고 있으니.” “...일?” “뭐, 아직까지는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지만.” 민준은 히죽거리면서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바짝바짝 타기 시작하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 있냐?”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자, 민준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장 최고의 애완동물은 바로 길들여진 야생동물이지. 야생동물을 잡아서, 날 수 없게 새장에 가두고, 달릴 수 있게 우리에 가두는 거야. 그리고 다른 누구도 볼 수 없게, 야생 동물이 오직 주인만을 바라보도록 상황을 만들어 준 후, 주인만이 야생 동물의 옆에 앉아 야생 동물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면... 그러면 야생 동물은 착각하게 된다. 굳게 믿는 거지. 눈 앞의 이 사람이 세상 속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동물은 자유롭게 풀어줘도,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 날 수 있는 날개도, 달릴 수 있는 다리도 자신에게는 이미 없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길들여진 동물은 행복할까? 불쌍할까?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직접 판단을 내려봐, 윤 현. 너에게 내가 내 주는 과제야. 자신의 세계가 깨어져 사육당하고 있는 처지를 깨닫게 될 때 야생동물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자살이라는 것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거든. 그렇다면... ...너는 어떨까?“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는 혼란이 가득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준이 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나는 다만 알고 싶은 것 뿐이야. 모두들 아름답다 칭송하는 보석의 빛이 진짜일지, 내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만약 그 보석이 가짜라면, 이제까지 내 인생에 귀찮게 끼어들었던 대가로 보석을 부셔버릴생각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뿐이지.“ -44- 나는 잠시 동안 짙은 조소를 띈 민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그런 내 모습에 동요 한 번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주위를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처럼 허무하게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 없을 만큼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로 달려가서 누군가의 얼굴을 봐야 할 것만 같았다. 괜찮아, 라는 낮은 음성을 듣고 싶다. 어쩌면 나는 민준이 지적했던 대로 내 세계에만 빠져 사는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위로받고 싶다. 미친 듯이 교내를 돌아다니며 익숙한 뒷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결국 내 눈에 띈 재범이는... ... 진우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재범이를 부르기 위해 치켜들었던 내 손이 슬며시 내려갔다. 나는 계단 위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범이와 진우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니까...자꾸 만지고 싶고...그리고 키스하고 싶은 거야.] 달콤한 슬비의 속삭임이 떠올랐다. 문득 가슴이 지끈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 거였냐. 의미없는 자조가 입 속을 맴돌았다. 그런 거였어?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문장을 끝없이 되뇌이며 나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어디선가 본 여인이 나를 보며 상냥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분명히..현이라고 했었지?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신 지민이라고, 저번에 민준이 때문에 같이 만났었는데.“ 나는 지민 누나의 화려한 금발 머리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예...”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웃음을 애써 바로잡는데, 지민 누나가 활기차게 말했다. “실은 민준이가 초대해서 왔는데, 민준이가 보이지를 않네. 미안하지만 대신 있어줄 수 없을까?“ 나는 지민 누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몸이 안 좋아서...가서 민준이를 불러오겠습니다.” 사실 이대로 기숙사에 들어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도록 잠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전에 신세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대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폐 속까지 노곤노곤하게 피곤을 호소하고 있는 몸을 이끌고 민준을 찾아 가려는데, 지민 누나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지민 누나가 애교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가 버리면 곤란해. 사실 이번에는 윤 현, 너를 만나러 온 거거든. 미안하지만....같이 가 주면 안 될까?“ ”...죄송합니다.“ 피곤이 드디어 머리까지 점령했는지 음성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하는 나를 지민 누나는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흐음, 그래? 서운하네. 나는 윤 현, 네가 꼭 같이 가주리라 생각했었는데. 왜냐하면... ...네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 많이 있었거든. 특히 윤 미연에 대해서.“ “...!” “따라가 줄 거지?” 지민 누나는 나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다.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꿈 속에서 이성적인 내가 한쪽편에 서서 “이건 꿈이군.” 라는 식의 소리를 지껄여댔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나는 3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이성적인 나로서 연신 싸가지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더니 급기야는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나 자신이라지만 참 재수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는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책을 읽듯이, 영화를 보듯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말이다. 마지막의 또 다른 내 모습은 우산을 들고 아스팔트 길가에 서 있었다. ...우산? 하고 인식하는 순간 공중에서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나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우산을 들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쁘기 나타나서 바쁘게 사라지는 사람들. 뒷모습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이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나는 우산 아래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누군가가 내 등을 힘껏 떠밀었다. 나는 그만 균형을 잃고 넘어져서 땅바닥에 배를 맞대고 쓰러지게 되었다. 쓰러진 내 눈앞에 우산이 나뒹굴어 데구르르 굴러갔다. 나는 더럽혀진 옷보다도, 넘어져서 아픈 몸보다도, 굴러가는 우산의 모습이 더 안타깝고 서러워,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직도 피곤이 덜 가신 모양인지, 눈꺼풀이 천근 만근 무겁기 짝이 없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꿈 속에서 느꼈던 서럽고 안타까운 감정들이 찌꺼기처럼 가슴에 남아 있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머리를 양 옆으로 몇 번 흔들어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가위 눌림? 하고 경악하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앞에 놓인 의자에 턱하니 앉았다. 의자? ...으음?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의자 위에 앉혀 있고, 손은 뒤로 묶여져 있다, 라는 식의 제반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알아채면 뭐하나? 왜 이런 상황인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고개를 들자, 내 앞에서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는 지민 누나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칼날같은 싸늘함이 느껴지는 지민 누나의 눈동자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쓰윽 흩어보자 주위에 옹기 종기 앉아있는 아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벌하게 얼굴을 굳힌 험상궂은 아저씨들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흐릿한 머리가 이 곳이 어디인지를 자동 처리해서 알려주기 시작했다. “과연 윤 미연 동생이라고 불릴 만하네. 배짱 하나는 알아주겠는데.” ...진심이십니까, 누님?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에잇, 하지만 그 정도로 피곤했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그렇다. 아까 전에 지민 누나를 따라 학교를 나오자마자, 곧바로 눈 앞에 시커먼 자동차가 서더니, 지민 누나가 나를 밀어넣고 따라서 올라탔었다. 눈을 가리는 폼이 심상치가 않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무척이나 수상쩍은, 마치 납치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눈을 가리자 앞이 깜깜한 것이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씨구나, 하면서 깊이 잠들어버린 내 모습에 지민 누나가 황당해 하는 것도 약간은 이해가 간다. 말 없이 양 옆으로 고개를 흔들어 남아있는 잠을 털어내자, 지민 누나가 대답을 재촉하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쳐다보는 지민 누나의 강렬한 눈빛에 무언가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결국 나는 무난한 말을 선택해서 말을 했다. “...조금 춥군요. 오늘 날씨는 어때요?” ...이런 젠장~! 순간 나는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이 넓따란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지민 누나를 포함해서)이 나를 미친 놈 보듯이 쳐다봤기 때문이다. 침울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지민 누나가 차갑게 웃으며 비웃듯이 말을 꺼냈다. “이 정도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건가? 하긴, 그 윤미연 동생인데 이 정도로 대접해드리기에는 섭섭하지.“ 화가 난 듯한 지민 누나의 모습에 다시금 쓸데 없는 말을 한 것이 미안해졌다. -45-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민 누나를 바라보자, 지민 누나가 싸늘한 얼굴로 내뱉었다.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가 보지? 아니면 일치감치 포기 한 건가? 하긴, 그 편이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지. 이렇게 얌전히 있어준다면 우리도 나쁘게 대할 생각은 없어. 원한이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윤 미연이니까.“ ...원한? 미연 누나에게? 잠깐, 잠깐, 생각을 해 보자. 그러니까 저 말을 분석해보자면... ...나, 설마 납치당한 건가? 움직일때마다 덜그럭 소리를 내는 팔목의 상태를 생각해 볼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눈빛을 볼때, 아무래도 결론은... ...역시 납치당한 것 같다. 그것도 미연 누나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이런지나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태연한 척 목소리를 내려깔고 말을 건네자, 지민 누나가 헛웃음을 쳤다. “....설마 동생 앞에서는 성녀처럼 굴기라도 하는 건가? 그 윤미연이? 지금 윤미연 동생이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 신 지웅이 내 오빠라면, 그러면 이해가 되겠어?“ ...신 지웅이 누구더라? 아무리 머릿속을 뒤지고, 고민을 해 봐도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멀뚱히 바라보자, 지민 누나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설마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야? ...기억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건가? 하긴, 이제까지 윤 미연이 지옥으로 보낸 인간이 몇 명인데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겠어?!“ ...점차 속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끓어오르던 속이 한계점에 달아오른 것처럼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한없이 침체되어 가는 기분으로 내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나는 지금...확실히 화가 나 있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적이 없을 만큼 진정으로, 너무나 화가 나서 주체를 못 하고 있었다. ...지민 누나가 지금 함부로 말하고 있는 미연 누나는, 내 누나였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나의 소중한 누나. “...뭔가 잘못 아셨군요. ” 차갑게 말하자, 지민 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회피하고 덮어 놓을 생각인가? 내 오빠의 죽음조차도~!“ ...죽어? “윤 미연, 그 마녀같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가 결국은 손목을 긋고 자살한 오빠를, 내가 한 번이라도 잊었을 것 같아? 결코 용서하지 않아!“ “... 미연 누나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단호히 대답하자, 지민 누나가 비죽 살벌한 웃음을 물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윤 미연의 죄가 없어질 것 같아? 그래, 그 대단한 윤 미연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동생이 다친다면 어떻게 될까, 응?“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는 지민 누나의 행동에,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펑~,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나는... 그 자리에서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렇다면 누나네 오빠라는 분이 미연 누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밝혀보도록 하죠! 우선 그 상황부터 재연해볼까요?!“ 갑작스러운, 발작과도 같은 내 고함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얼굴을 만지던 지민 누나의 손가락이 가만히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땡그랗게 눈을 뜨고 굳어 있는 지민 누나를 무시하고 주위에 있는 아저씨들을 쓱 흩어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사삭 시선을 피하는 아저씨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오빠분이 손목을 그으셨다고 하셨죠? 그러면 그 장면부터 재연시킨 후, 천천히 추리를 해 나가죠. 거기 아저씨, 잠깐 제 손목 좀 앞으로 해 주세요.“ 내 말에 한 아저씨가 쭈뼛쭈뼛 일어나더니 나에게 다가오다가 멈칫해서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지민 누나는 아저씨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이 새파랗게 독기가 서린 눈으로 소리쳤다. “...무슨! 이렇게 혼란스럽게 한 후 달아나려고 하다니, 그 기발함은 칭찬해주지!“ ...미안하지만 지민 누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나 본데요... ...나는 아까 전부터 달아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지금 나는 충분히 진지하게 이 사태를 대면하고 있는 중이다. “...어서요.” 아저씨를 바라보며 재촉하자, 지민 누나가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뺨을 후려쳤다. 쫙~! 하는 실감나는 소리와 함께 순간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녹슨 쇠 맛이 비릿하게 입 안으로 퍼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피가 나는 것 같군, 하는 판단이 내려졌다. 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씨근덕거리고 있는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누나네 오빠분과 똑같이 만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저는 지금 지민 누나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이해 절충을 위해 신 지웅이라는 분의 마지막 상황부터 재연을 하면서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손목을 그으셨다고 하니 저도 똑같이 하도록 하기 위해 손을 앞으로 돌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솔직히 풀어주셔도 도망갈 생각은 없지만...풀어주실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이 쯤에서 타협을 보도록 하죠.“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벌리고 있는 지민 누나를 외면하고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가 망설이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라기보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를 꺼렸었다.),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해서인지 뒷목이 뻐근하게 아파온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손목이 앞으로 돌려져서 묶어졌다. 나는 손목에 차여진 은색으로 빛나는 수갑을 심각하게 바라보다가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자, 신 지웅이라는 분이 어디서 발견되셨나요?” “...화, 화장실에서...” 더듬거리며 말하는 지민 누나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번에는 옆에서 긴장한 듯이 서 있는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이 곳에 화장실이 어디 있죠?” “...저, 복도 끝에...” 아저씨는 망설이면서 말을 하고는 말꼬리를 흐리며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화장실로 가죠.”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하자, 지민 누나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쳤다. “잠깐, 누가 그런 것에 속을 줄 알아~! 지금 도망치려는 속셈인 것을 모를 줄 아냐고~!“ ...의심도 많다. “...제가 도망갈까 의심스럽다면 다른 분들은 그 주위에서 감시하고 계세요. 그리고 지민 누나, 소품은 확실히 챙겨주세요.“ 지민 누나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뒤에 주먹을 꽉 쥐고 멍한 눈으로 서 있는 지민 누나의 모습이 보였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는 그만큼 흥분해 있었고, 끓어오르는 멍한 머릿속은 더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해? 그래, 어쩌면 그래서 내가 더욱더 흥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미연 누나가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내게는 지금 내 관심을 돌려놓을 만한 상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식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스스로에게 희미한 슬픔과 자조를 함께 보내면서,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끼익거리는 녹슨 소리가 음산하게 조용한 복도 가득히 울려퍼졌다. 더러운 화장실 내로 한 발자국 들어가서 어디에서 손목을 긋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저씨들을 제치고 지민 누나가 벌겋게 된 얼굴로 들어왔다. “대체 왜들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어서 당장 이 녀석을 데려가서 가두지 않고...!“ 나는 다시 기운을 되찾았는지 억세게 소리치는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하죠. 칼은 가져오셨겠죠?” “...뭐?” 담담히 말하자, 누나가 곤혹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 가져왔나 보다. “칼, 가지고 계신 분 없나요?” 아저씨들을 바라보며 묻자, 한 아저씨가 쭈뻣거리면서 칼을 꺼내셨다. 칼집까지 있는 중간크기의 칼을 꼼꼼히 체크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좋군요. 그럼 지민 누나, 이걸로 시작해보도록 하죠.” 내가 손을 내밀자, 아저씨가 내 손에 칼을 내려놓으셨다. 그것을 집어들고 지민 누나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으음? 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다시 살벌하게 얼굴을 굳힌 아저씨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나에게 권총을 겨누고 계셨다. ...총, 아니 화기류는 불법 아니었던가. 능력들도 좋으셔라. 비틀린 생각을 하면서 지민 누나에게 칼을 내밀자 지민 누나가 뻣뻣하게 굳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또 왜 이러시나. 한숨을 푸욱 내쉬려는데, 아저씨 한 명이 긴장된 어조로 소리쳤다. “칼을 놓고 어서 물러나! 그렇지 않으면...!” ...납치된 것은 나였던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상황을 보면 꼭 내가 인질범이라도 되는 것 같으니... 쯧쯧, 혀를 차면서 누나의 손에 똑바로 칼을 쥐어줬다. “자, 화장실 어디서 발견됐나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시나 그 오빠라는 분이 자기 방에서 발견 되었다면 누나네 집까지 가야 했을 것 아닌가. ...그, 그래. 화장실이 조금 많이 퀘퀘한 냄새가 난다지만, 그리고 진갈색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지만 뭐... 나는 어느새 발견되신 장소가 제발 변기만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 지민 누나가 떠듬거리며 말한 장소는 그나마 깨끗한 곳이었다. “...욕조.” 좋긴 하다만 이 곳 화장실에는 욕조가 없었다. 이런, 갑작스레 욕조를 준비할 수는 없으니... “세면대로 대체해도 괜찮을까요?” 거절을 하면 어떡하지, 하고 가슴을 조이며 묻자, 지민 누나가 인형처럼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조금 전부터 쥐죽은 듯이 가만히 서 있는 아저씨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아저씨들의 한심스런 모습을 못 본 척 태연히 말을 꺼냈다. “그럼 문 앞에서 기다려 주세요.” 문을 콰앙 닫고 돌아서자, 지민 누나가 흠칫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46- 나는 움직이기 불편한 손을 들어 지민 누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요령은 알고 계시죠? 한 번에 잘 하셔야 됩니다. 그럼, 어서 해 보세요.“ 진지한 내 말에 지민 누나의 갈색 빛 얼굴이 새하얗게 되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무적으로 말했다. “혹시 덧 붙여야 될 다른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내 말에 지민 누나가 입만 달싹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기다려본후, 다시 한 번 지민 누나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자, 어서 하세요.”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지민 누나가 내 손목과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 갑작스런 고음에 귀가 찌릿찌릿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 제가 장난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차갑게 이야기하자, 지민 누나가 이를 악물었다. 칼집을 꺼내 박력있게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칼을 내리치는 지민 누나의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는데... 지민 누나가 칼을 내리치는 순간, 손이 미끄러웠는지 칼을 놓쳐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칼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지민누나를 쳐다보았다. 지민 누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지민 누나도 나도 서로간에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우습게도 서로의 눈동자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칼을 집어들었다. 불편한 손을 감수하고 일부러 칼을 집어서 내밀어 주는데도 지민 누나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받지 않나요?” 조용히 묻자, 지민 누나가 흠칫하고 몸을 경직시켰다. 마치 내가 살인마라도 되는 듯이 놀란 눈동자로 바라보는 지민 누나의 모습에 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원치 않는데도 먼지가 입을 타고 흘러들어와 폐 속에 엉켜있는 것처럼, 가슴이 묵직해왔다. 그 불쾌감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은 이런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미연 누나가 미워서, 그 동생인 저를 미끼로 상처를 주고 싶어했지 않습니까? 죽어버린 이와 똑같은 꼴로 저를 만들어 버리면, 미연 누나도 지민 누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게 될 겁니다.“ 사무적으로 나오는 내 목소리가 깔깔하게 공기를 긁어대는 것 같아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내 말에 지민 누나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입술을 깨물며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포기할 거라 생각해? 그래, 그 여자도 나와 똑같이 만들어 버릴 거야!“ 내 손에서 칼을 낚아챈 지민 누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칼을 그었다. ...아까웠다. 나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서 새겨진, 손목이 아닌 손등의 상처를 보고 그렇게 판단했다. 아니, 아까울 것도 없군. 애시당초 수갑을 찬 채로 손목을 긋는다니, 말이 안 된다. 역시,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수갑 열쇠 있나요? 아무래도 풀러야 할 것 같은데.” 지민 누나는 멍한 눈으로 피가 흐르는 내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내 연이은 재촉에 기계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열쇠를 내 놓았다. 수갑을 풀고 피가 통하도록 손을 허공에서 몇 번 흔들자, 피의 붉은 색이 허공을 날아 자국처럼 더러운 타일 위에 새겨졌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미는데, 지민 누나의 손에서 또다시 칼이 떨어졌다. 나는 이번에는 줏을 생각을 하지 않고 무심히 떨어진 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연 누나가 정말로 그 신 지웅이라는 형을 죽였나요?” 내 질문에 지민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의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입을 연 지민 누나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옳은 거야, 나는 잘못된 일을 하는 게 아니야~!”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중얼거리는 지민 누나의 말이 이상한 어감을 띄고 있었다. “...누나가 옳다고 누가 그렇게 말해주던가요?” 지민 누나는 핏줄이 터진 듯한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당하게 복수하는 것 뿐이야~!” 다짐하듯이 되뇌이는 지민 누나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정당한 복수입니까? ...미연 누나 때문에 죽는다고 신 지웅이라는 분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그래서 억울하니, 대신 복수해달라고 누나의 오빠에게 그렇게 들은 겁니까?“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지민 누나의 모습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울해졌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일들이 지민 누나의 흔들리는 눈빛과 같이 물방울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모든 것을 바라보지.] 민준의 싸늘한 말이 그 중심에 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것인가. 나는 겨우 깨달았다.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그것은 단순히 납치를 당해서라던가, 아니면 미연 누나가 나쁘게 말해진다던가 하는 이유때문만이 아니었다. 민준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고 있던 내 마음은 어느새 지민 누나의 행동에 나 자신을 대입하고 있었던 거다.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고 들었다. 지민 누나가 미연 누나에 대한 미움만으로 행동한 이유는 아마도... “...내, 내 오빠야~! 언제나 잘해주지는 않았지만, 힘들 때는 곁에 있어줬어. 가끔씩 정말로 상냥하게 대해주고, 내가 기댈 수 있었던... 그런데, 그런데...그 여자가 빼앗아갔어. 그 여자가 죽인 거야~!“ 더듬거리며 말하는 지민 누나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지민 누나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지민 누나에 대한 모욕이었고, 나 자신에 대한 경멸이었다. ...지민 누나가 스스로의 세계에 갇혔었던 이유는, 아마도 죽어버린 신 지웅이라는 사람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빠의 죽음을 말리지 못함으로써 첨가되었을 죄책감이 지민 누나의 행동에 불을 붙였겠지. ...그렇다면 내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려 하지 않았을까? 언제나 다른 이들의 행동의 뜻이 궁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을 접하면서 정말로 궁금해했었다. 그래, 나는... ...그저 궁금해하기만 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아른 아른 떠오르는 그 말 뒤에 숨겨져 있던 일그러진 표정들이 생각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그런... ...어째서 나는...? 그 의문에 작은 대답이 들려온다. 어쩌면 나도 무서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무엇을? 끝없이 되물어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거세지는 다짐 하나만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미연 누나나 다른 가족들에게 숨겨진 아픔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의 아픔을 바라보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요한 나의 세계에서 도드라진 나의 상처를 돌보기에 바빳고, 내 앞에서 웃음짓는 이들의 숨겨진 뒷 모습을 바라본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내가 외면하는 동안, 내 주위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감추고 나에게 웃어주었던 것일까? “...내가 잘못한거야?” 지민 누나는 나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물었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나를 바라보는 지민 누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못했던 것일까?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자, 심장이 세차게 고동쳐 그 질문을 부정했다. 잘못한 것이 부정을 의미한다면, 나는 지금까지의 내 생활 자체를 부끄러이 여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를 부끄러이 여기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한 것이 아니예요. 그저... ...이제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때가 온 것 뿐이예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내 말에 내가 더 깜짝 놀랐다. 말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지민 누나의 눈동자와 당황한 내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스스로 판단해?” “...듣고, 보고, 그리고...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혼자서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일이 없을 테니까. 스스로의 결정이라면 잘못된 일일지도 모른다며 후회하지도 않을 테니까.“ ...나는 말을 하면서 천천히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의 세계에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를. 나는, 무서웠던 거다. 혼자 힘으로 나선다는 것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 내 세계의 중심에는 미연 누나가 서 있었고, 미연 누나는 자상하게 내가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언제나 내 앞에 서 있었던 선우 형은 내가 해야 할 행동을 명령해 주었다. ....그것이 편했다. 그 세계에서는 내가 책음을 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저 원망만 하면 되는 거였다. 모든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형이,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이었고, 때문에 다른 이들의 행동은 나에게 이해 불가능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도 스스로 설 때가 되었다. 이미 훨씬 오래 전에 혼자서 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 서야 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잔잔한 눈으로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같이 노력해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내밀어진 나의 손을 지민 누나가 머뭇거리다가 잡고 일어났다. 처음으로 잡아 본 지민 누나의 손은 생각보다 더 작고, 따뜻했다. -내 나이 17세 어느 날, 내가 속해 있는 작은 세상 안을 벗어나기로 결심하다.- -47- 이대로 나가서 바이바이~, 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막 문을 열려다가, 나는 문득 무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던 밖의 소음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긴장된 분위기가 공기를 타고 이 화장실로까지 전염되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빠꼼이 문을 열고 내다본 밖에는 아까 본 아저씨 중의 한 명이 나뒹굴고 있었으니... ...이대로는 뭔가가 위험했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나는 다급한 눈길로 지민 누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머뭇거리는 누나를 재촉해 화장실 창문을 열고 빠져 나오려고 했으나... 이럴 수가... ...어째서 이런 부실 공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환기를 우선으로 해야 할 화장실 창문은 작고도 작았다. ...어린애도 못 빠져 나가겠다. 긴장감을 품은 침묵에 지민 누나도 바짝 긴장을 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뭐 하냐?” 태연히 묻는 소리에,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조용히 좀 해 봐, 저 환풍기를 뜯어내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무리일걸, 우선 어떻게 뜯을 건데?” “그야, 마대자루와 칼을 이용해서...” 막 말을 하다가 그제서야 지금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척이나 꺼림칙한 존재라는 것도. “어서 나가자, 지민 누나, 이 쪽으로 와요.” 태연하게 화장실 변기칸의 문을 열며 말하는 민준을 멀거니 바라보자, 민준이 씨익 웃었다. “아아, 나 잘생긴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감상은 나중에 해 줘.” 앞으로는 한 번 감상하는데 만원이다, 라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민준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지민 누나를 따라서 변기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대체 화장실 벽은 언제 파 놓은 것일까? 한 쪽 벽에 시원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변기칸을 다소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민준의 재촉으로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왔다. 이 화장실이 1층에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몸을 숙이고 사사삭, 걸음을 옮겨 겨우 그 곳을 빠져나온 지민 누나와 나는 민준의 계속된 재촉에 어두운 밤 길을 계속 걸어야 했다. 산 속으로 추정되는 길을 한참동안 걷다가 민준이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지민 누나는 이 쪽으로 가세요. 사람들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지민 누나는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렸지만 연신 밀어대는 민준의 행동에 할 수 없이 걸음을 떼어놓았다. 나는 곧 보이지 않게 된 지민 누나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다가 손을 내리고 민준을 돌아보았다. “...너는 누구야?” 내 질문에 민준이 잠시 멈칫했다. 어둠속에서도 왜인지 지금 민준 녀석이 평소처럼 피식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어? 내 이름은 박 민준, 나이는 17,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지?” 민준은 잠시 사이를 두더니 대답했다. “왜 그런 것을 물어보지? 신 지민이 무슨 말을 했나 본데, 절대로 믿지 마. 저 여자는 미연 누나에게 원한이 있어서 너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 뿐이야.” 나는 태연하게 말하는 민준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지민 누나를 도와주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갑작스럽게 화장실 벽까지 뚫고 나타난 주제에?“ “그건, 너도 알잖아, 내가 평소에 지민 누나와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간의 정을 버릴 수가 없어서..“ “그 누구도 친한 누나를 향해 저 여자라고 말하지 않아. 위험을 무릎쓰고 도와줄 만큼 절친한 사람을 험담하지도 않고.“ 내 단호한 말에 민준이 잠시 후 비웃듯이 말했다. “흐음, 잠시 동안 진화했다는 건가, 윤 현군? 뭐, 좋아. 나도 이 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그리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가는 민준의 뒤를 따라 말 없이 걷고 있으려니 문득 민준이 재미있는 것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왜 이제야 그런 것이 궁금해진 거지? 너는 나와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도 그런 식의 질문을 한 적이 없었잖아?“ “...그 이유가 그렇게도 중요한 거야?” 내 물음에 민준이 잠시 몸을 멈칫했다. 왜인지 지금 민준의 얼굴을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짓밟듯이 민준이 곧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하지. 이제까지.....그래, 슬비가 왜 너의 거절에 쉽게 물러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냐?“ “...아니.”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슬비와의 일을 녀석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슬비가 내 거절을 듣고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인가? 민준은 내 대답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빙글 돌았다. “그건 말이야. 윤 현, 네 평소 모습 때문이다. 너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지. 하다 못해 네 주위를 맴도는 녀석들에게도 귀찮게 구는 이유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어. 그 모습이...너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으로 비춰진다는 것을 알고 있냐? 처음부터 네 눈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네 거절 한 번에도 사람들은 손쉽게 포기하고 떨어져 나가지. 윤 현님의 기억에 남지 못한다면, 그 분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까지 곁을 맴돌며 기회를 노리겠습니다, 라는 식의 말을 지껄이면서. 뭐, 바보들의 대합창 같은 그 멍청한 꼴을 지켜보는 것은 즐겁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에 민준이 경쾌하게 말했다. “네가 모른다고 해서 알려주고 있을 뿐이야. 설마 화를 내고 있는 거냐, 그 윤 현이?“ “...” 나는 침묵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러자 민준이 쳇, 하고 혀를 찼다. “뭐야, 역시 너는 여간해서는 내 마음대로 안 된단 말이야. 휴우, 그 점이 지루하지 않아서 재미있긴 하다만, 이럴 때는 귀찮아.“ 의아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는데, 민준이 그 자리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소리를 내며 스스로를 때리는 민준을 놀라 바라보고 있자니, 민준이 겨우 자해하는 것을 멈추었다. “...네가 화를 내면서 나를 때려줬다면 폼도 나고 얼마나 좋았겠냐. 꼭 내가 날 때려야겠냐?“ 투덜대는 민준의 모습에 무척이나 아연해진 나는 멀거니 그 녀석의 형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쳇, 그래. 이런 꼴을 보니 좋냐, 좋아?”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하고 빠르게 걸어가는 녀석의 뒤를 다시 따라가는데, 민준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민준 녀석이 말을 할 때마다 무섭다.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까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그럼, 너는 네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냐?“ “...나?” 나는 멍한 어조로 민준의 말을 되풀이 해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윤씨 집안의 막내인 윤 현으로 나이는 17살이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성진 그룹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지.” 내 생각을 중간에 끊고 민준이 태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무엇이든 최고라고 불리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다. 성진 그룹도 마찬가지지. 권력과 부와 힘이 모여서 지금의 신화를 이룩해낸 거야.“ “...권력과 부와 힘?” 곰곰이 생각에 잠겨 그 말을 되풀이 하자, 민준이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힘은 유서 깊은 명문인 태한(太澣)파가 맡고 있지. 태한파의 차기 후계자인 안 재범을 중심으로 해서 말이야.“ ...재범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민준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데 민준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태한 파는 성진 그룹과는 현 성진 그룹 윤 회장님의 외갓집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져 있지. 그리고 권력은 윤 회장님의 절친한 친구인 박 중철 의원님과 그 패거리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부분이지. 현재 박 중철 의원님은 차기 야당 총수로 지목되고 있는 능력있는 정치인이며, 또.. ....내 아버지야.“ “....” ...그 말에 나는 내 기억속에 어렴풋이 저장되어 있는 박 의원님의 모습을 조용히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박 의원님과 박 민준의 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 민준은 그런 내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이 모든 것의 중추가 되는 부는, 성진 기업이 담당하고 있지. 윤 회장이 모든 것을 이끄는 가운데 이룩된 성진의 신화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이어져 현 성진그룹은 그 어느때보다도 탄탄하고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고 평가되고 있지.“ 민준이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씩 웃었다. 즐거워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불길한 느낌이 스물스물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 그만큼 적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이제까지의 성진 그룹에게는 문제 될게 없었어. 장남 윤 선재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장녀 윤 미연이 사람들을 조종하며, 차남 윤 선우가 사람들을 지배한다. 이 기본 틀에 맞추어 성진 그룹은 거대한 괴물로서 성장해 나갔다.“ 민준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나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 성진 그룹의 기본 틀 어디에도 너에 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 윤 현.” “...” “내가 누구냐고 물었냐? 나는 오히려 네가 누구냐고 묻고 싶은데. 성진 그룹의 윤씨 일가가 필사적으로 존재를 감춰야만 했던 인물, 그 윤씨 형제들이 친히 입막음을 하러 다닐만큼 대단한 존재가 바로 너다. 온갖 모욕적인 헛소문을 감수하면서 윤씨 일가가 비밀로 두었던 이름이 바로 윤 현이었지. ....지금 내가 다시 너에게 묻지. 윤 현, 너는 도대체 누구지? 왜 너의 식구들은 네 존재를 감추려고 하는 거지? 왜 너는 형제들과는 다르게 성진 그룹에 끼어드는 것 자체를 허락받지 못한 거지?“ 민준은 마왕이라도 되는 것마냥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노래하듯이 말했다. “...왜 너는, 존재 자체가 세상의 이목에서 지워져 있는 거지?” 나는 진심으로 재미있어 하는 듯한 민준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민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는 듯한 녀석의 눈동자에 말 없이 시선을 맞추고 있자, 민준이 점차 웃음을 지워갔다. “...그 대답을 해 주기 전에 나도 한 마디 묻자. ...형수님은 양호실에서 잘 계시냐?“ 순간 나는 민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광경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민준이 매일 재미, 재미를 외치고 다니는 것이 이해가 간다. 구겨진 민준의 얼굴은 혼자서 구경하기 아까울 정도로, 정말 재미있었다. -내 나이 17세,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엿보다.- -48- “괜찮냐?” “...형이 왜 여기 있어?” 번개처럼 달려와 이리 저리 살펴보는 선우 형의 모습에 얼이 빠져 대답을 하는데, 선우 형은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민준을 바라본다. “...너는 왜 그렇게 멀쩡하냐? 현이는 이렇게 다쳤는데...!“ 무언가 말이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 주위의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보자니, 단순히 내 짐작만이 아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많이 다쳤나 싶어 이리저리 모습을 살펴보는데...그렇게 많이 아픈 곳은 없다. 나는 괜찮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우 형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나도 조금 겁이 난다. 이 상황에 끼어들어봤자, 선우형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다일 것 같아 얌전히 있는데. 그 옆에서 민준이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형님... ...저도 다쳤는데요..?“ “...내 말에 시비 거냐?” 선우 형의 음산한 말에 민준이 어디 다친 사람처럼 배실배실 웃으며 사근사근하게 말한다. “그게 아니라요... 우리 현이가 나쁜 놈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막아서서 현이를 구해내느라 저도 얻어맞았다는 말이지요. 보세요, 이 상처. 대신 현이를 무사히 구...해...“ 민준이 여기저기 붓고 멍든 상처를 내 보였다. 아까 자신이 자해했던 상처를 내보이며, 못된 사람들에게 나를 구해냈다고 주장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우 형은 그런 민준에게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많이 힘들었겠구나, 우리 민준이.” ...무섭다. 뺀질이 박 민준도 역시 사람이었나 보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면. “하하, 우리 민준이. 귀엽기도 하지. 그런데 어째서 현이를 우리 현이라고 말하니?“ 사근사근 말하며 즐겁게 웃는 선우 형의 태도에, 민준이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본다. 민준은 도와달라는 눈빛을 열심히 보내고 있었지만, 나 역시 선우 형의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무서웠다. “그럼 그 나쁜 녀석들을 데리고 사이좋게 돌아왔어야지, 민준아. 그리고 얻어 맞고 와서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다고 상처를 내밀고 있는 거니?“ ...형, 제발 그만 해줘... 무서워 죽겠다. 바짝 굳어 있는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현아, 괜찮니?” “...미연 누나?” 주춤, 하고 놀라서 대답하고 몸을 뒤로 돌리는데... 미연 누나는 그대로 나를 품에 끌어안고 한참 동안 놔 주지 않았다. “...미안...” 자그마한 미연 누나의 속삭임을 들은 것도 같았다. 아주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지만. 왠지, 가슴이 무척이나 답답하고 아파서,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미연 누나가 겨우 나를 떼어놓았을 때에는, 미연 누나는 예전과 같이 천사처럼 웃고 있었다. “현아, 일단 병원에 가 보자. 많이 힘들었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말하는 미연 누나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무슨 일인가를 판단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이 곳에서 겪은 모든 일을 비밀로 해야 되겠다고, 나는 그 순간 결정을 내렸다. 미연 누나에 대한 일도,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일도... ...모든 것을, 내 스스로 알아보고, 그리고... ...그 후로 모든 판단을 미뤄놓자. ....아까 들었던 민준의 말도, 지금은 가슴 속 깊숙이 숨겨두자.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연 누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웃음지을 수 있도록. 몸 속 가득 품은 의문은 내 스스로 풀어나가자고,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괜찮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떠듬거리는 어조로 묻는 재범이를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형이나 누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 녀석까지 이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이 재범이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며, 무슨 말들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렇다. 안 재범, 내 사촌이 누구인지, 아까 민준, 그 거짓말 대왕이 똑똑히 말해줬었지. 민준의 말을 신용...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하지 못한다, 절대로...! 그렇지만, 박 민준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범위 내에서, 또는 자신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때때로 진실을 말할 때도 있다. “할 말이 있어, 안 재범.” 내 말에, 재범이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 것처럼 핏기가 사라진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피하려고 하지 마. 나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외면했던 것, 내가 상처줬던 일들을 모두 말해줘, 네가 나에게 숨겨왔던 것들까지 모두. ...너의 진실한 감정까지. 나를 붙드는 미연 누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재범이를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선우 형이 민준을 데리고 나간 방향에서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조금 신경쓰이긴 하지만, 그 뿐이었다. 박 민준, 저 녀석은 맞아야지 정신 차릴 부류라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게다가, 민준이 얻어맞았다고 뺀질거리고 다니는 짓을 그만둘지는 심히 의문스럽다. “...현아?” 재범이 주춤거리며 나를 불렀다. 아무도 없는 주위를 확인하고, 재범을 바라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이 상황은 무언가, 내가 가해자이고, 재범은 가련한 피해자가 된 듯한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기도 한 건가. 무엇을 말해야 할까. 한참동안 재범의 얼굴을 살피고, 바라보다가 결국 내가 꺼낸 말은, 엉뚱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진우를 좋아해?” 내 말에 재범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살펴본다. 그 얼굴 너머에 우울한 기운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왜 그런 말을 묻는 건데...?” 퉁명스럽게 말하는 재범을 바라보았다. 역시, 재범은 어렸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덩치가 커졌어도, 거친 척 눈동자를 가늘게 떠도, 검은 색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띄고 있었다. 내가 재범이에게 연연하는 이유는 재범이가 단순히 내 친구이기 때문일까? 내 사촌이라서? 슬비의 고백을 듣고, 내가 제일 먼저 생각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왜, 나는 재범이와 진우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그건...” 느릿하게 말을 끌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재범이가 몸을 경직시키고 나를 바라본다. 이런 모습이, 또다시 진우와 같이 있을 때 재범이의 행동과 비교가 돼서, 나는 또다시 조금 슬퍼졌다. “그건...” 다시 한 번 말을 하면서 재범이를 쳐다보다가, 나는 한 순간 숨이 멎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대로 말을 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아니라며 웃어 보이라고, 어디선가 그렇게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한다면... 나는 재범이와 친구 사이로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부드러워 보이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도 있고, 아름다운 검은 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휘어지는 모습을 볼 수도 있겠지. ...이대로 내 마음을 외면하기만 한다면.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재범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경악하는 얼굴 가득히 불신의 표정이 떠오른다. “널...사랑하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입술이 메말라서 아프다는, 엉뚱한 생각이 잠시 떠올랐을 뿐이다. 싱거울 정도로, 더 이상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내 주위의 세상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범이의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한번 거세게 내려앉았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고 났을 때, 어느새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말해지지 않은 것처럼.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다시, 재범이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얼버무려야 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굳어버린 몸은 아무리 대뇌에서 명령을 내보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하려는 재범의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여기서 뭐하냐?” “...선우 형.” 순간, 내 몸에 걸렸던 최면이 깨졌다. 스쳐지나가는 재범의 숙여진 얼굴 가득히 복잡한 감정이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형님.” “하하, 그래, 우리 재범이. 재범이도 나와 할 말이 많지, 아마? 바보, 너는 미연 누나한테 가 있어.“ ...형, 아직도 속이 덜 풀렸나 보다. 옷 군데군데 튀어 있는 거무튀튀한 자국들이 무엇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민준아, 뼈는 제대로 붙어 있냐? 등을 떠미는 형의 기세에 못 이기는 척, 미연 누나에게 걸어가면서, 나는 내가 지금 안도하고 있는지, 또는 슬퍼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어졌다. 다만, 온 몸이 땅 속으로 꺼져들어 갈 것처럼 무척이나 피곤하다는 사실만을 인지했을 뿐이다. -내 나이 17세,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백하다.- -49- “...대체 왜 그렇게 학교를 다니려고 하는 거니?” “정 그렇다면, 내가 외국에 좋은 학교를 알아봐 줄게. 솔직히 말하면, 명성, 거기 그다지 좋은 곳도 아니다.” ...형, 그 좋지 않은 학교, 형도 나오지 않았어? 그리고, 누나...굳이 학교를 그만 두게 하려는 이유는 뭔데...? 실제로 그 이유를 추측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나나, 형은 지금 걱정스러운 것 뿐이다. 이번의 납치 사건(선우 형은 흉악하고 악질적인,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일만 해도 그렇고, 민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형과 누나는 여러 모로 염려되는 것이 많을 터였다. “...정말로 괜찮아.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아냐?” 선우 형이 시비 걸 듯 불만스럽게 말했다. 가족들이 나에게 말하는 요지는 간단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잠시 외국이라도 나가서 쉬라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이번 일로 다친 내 심신을 쉬게 해 준다는 하는데,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요양차 보내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피해 내 보내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 나에게는 명성을 그만두지 못할 여러 이유와 사정이 있었다. 결국 백보 양보해서, 나는 기숙사를 나오기로 했다. 이 말에 다른 가족들은 몇 번이나 반대를 표시했지만, 결국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미연 누나와 선우 형은 할 수 없이 한숨을 내 쉬면서, 나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또다시 회사로 나갔다. ...역시, 지금 회사 일이 지금 복잡하게 돌아가는 듯 싶다. 기운 없이 소파에 앉아 있으려니, 해원 아저씨가 시원한 음료수를 갖다 주셨다. 나를 배려해주시는 행동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서, 투명한 유리 컵을 이리 저리 굴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래, 이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은 지민 누나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일단, 미연 누나에 대해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이런 때에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응용을 한다고 해서 해 될 것은 없다. 지민 누나가 말했던, 미연 누나의 과거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미연 누나의 옛날 모습을 잘 아는 사람이 좋겠지?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 한 명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 윤 현군, 지금 미연이에 대해서 알려달라는 거야?” “네.” “흐응, 글~쎄~?” 양호 선생님은 말을 질질 끌며, 나를 이리 저리 흩어보더니 눈을 빛내셨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멀쩡하네?” ...내가 멀쩡해 보이는 것이 심각하게 아쉽다는 투였다. “민준이는, 괜찮나요?” 왜인지, 내 몸에서 한 군데라도 아픈 곳이 발견되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서둘러 물어보자, 아쉽다는 듯 긴 속눈썹이 푸른 눈동자를 살며시 덮었다. “아아, 민준이는 병원에 입원했어. 내가 면회를 갔는데...그 사이에 어디로 외출을 했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병실에 돌아오지 않는 거 있지? 정말 너무하지?“ ...민준 녀석, 양호 선생님이 오신 걸 보고 도망쳤나 보다. “그런가요. 그런데, 미연 누나에 대해서는 말 안해주실 건가요?“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금방 대답이 나왔다. “응.” “...왜죠?” “으응, 글쎄?” 손가락을 한 쪽 입가에 대고 또다시 고개를 갸웃갸웃 하시는 모습이, 아무래도 저 포즈가 상당히 마음에 드신 것 같다. “일단은, 약간의 심술...이라고 해 둘까?” “...네?” “게다가 미연이 몰래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러면, 저번에 해 주신 이야기를 마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미연 누나의 사랑에 관한 것 말입니다.” “싫은데?” “...미연 누나도 제가 양호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물어본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윤 현군, 그 사이 많이 달라졌는데?” 양호 선생님이 갑자기 입가에 갖다대었던 손을 떼고 나를 향해 몸을 가까이 대었다. “...그런가요?” “흐응, 흐음.... 뭐, 좋아. 특별히 알려주지. 잠시만 기다려 봐.“ 양호 선생님은 양호실 책상 서랍에서 한 장의 메모지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쓱쓱 써서 나에게 내밀었다. 받아든 하얀 메모지 안에는 휘갈겨쓴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건?” “일단 찾아가 봐. 나머지 이야기는 상황을 봐서 결정하지.“ “...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양호 선생님의 태도에, 나는 메모지 한 장만을 들고 양호실을 나왔다. 나서는 내 등 뒤에서 양호 선생님이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참, 승호군 이야기 들었어? 현 군과 절친했던 사이로 아는데.” “이 승호, 말씀이신가요?” 고개를 돌리며 묻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응, 이번에 현 승희 양과 같이 외국으로 나간다고 하던데...? 아직 못 들었나 봐.“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 학교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잠시 복도의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머릿 속이 뒤죽박죽, 모든 것이 엉망이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몸이라도 움직이고 싶건만, 그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잠시 손 안에 쥔 메모지를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 곳을 향해 떠나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승호와의 일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다. 승호와의 만남은, 언제나 그 모든 것이 불투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마치 물이 가득 든 수조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대한 것처럼,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모든 것이 알 수 없다로 점철 되어 있다. ...그러니만큼, 승호와 나 사이에는 그만큼의 골이 패여져 있을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부터 하나씩, 천천히 풀어나가자. 하나씩, 하나씩, 알아나가는 거다. “윤 현...너...!” 애써 찾아낸 승호는, 어이없게도 얌전히 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며칠 만에 학교에 나온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나는 민현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승호에게 시간이 되는지 물어봤다.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 거절해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승호는 순순히 나를 따라 일어섰다. 먼 곳을 찾아 헤맬 곳도 없이, 근처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 승호를 세우고 마주 대하자, 무언가 쑥쓰러우면서도, 주책맞게도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예전 어렸을 때, 내가 승호를 데리고 들어갔었던 곳도 화장실이었지. 거기서 왜 나를 괴롭히냐고 물었었는데. 지금 우리는 그 때보다 커진 몸을 하고, 긴장된 얼굴로 또다시 마주 보고 서 있다. “...몸은, 괜찮아?” 어색하게 말하는 승호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이리 저리 뜯어보았다. 허우대 크고, 얼굴도 멀쩡하게 생긴 놈이건만, 왜 이리 죽을 것처럼 생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미국으로 떠나냐?” 나 역시 서먹하게 말을 꺼내자, 승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돌아오는데?” “...내가 돌아왔으면 좋겠냐?” ...그야, 나는... “응.” “...왜?” 승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건조하게 들려서, 나는 한 순간 귀를 의심했다. 멈칫하며 바라본 승호의 한 쪽 손이 가늘게 떨려, 나는 승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장해? 왜? 대체...왜? “...너, 설마...” 주춤하면서 겨우 말하자, 승호가 나를 타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말해 봐. 내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만약 그렇다면...!“ “그런다 해도, 너는 내 약혼자야.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순순히 당할 것 같아?“ 앙칼진 여자 아이 목소리가 난데없이 껴들었다. 나는 그제서야 누군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한 순간, 살얼음처럼 생성되어 있던 긴장감이 파삭거리며 깨어졌다.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승호가 딱딱하게 말하는데도, 발걸음도 거세게 들어온 현 승희는 주눅들지 않았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지금 네 태도가 얼마나 웃긴 줄 알아? 말해 봐...! 너도 눈이 있으면, 머리가 있으면, 말해 보란 말이야...!“ 다다다, 쉴 새 없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숨을 고르고는,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칼이 선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윤 현, 얼마나 이 바보를 가지고 놀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가지고 놀아?” “...그만해.” 멍하니 승희의 말을 되풀이하자, 승호가 침중하게 말했다. “싫어.” 승희는 승호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승호 너...설마, 날... 좋아해?” 멍하니 묻자, 승희가 비웃듯이 나를 노려봤다. 그 눈동자 가득 담긴 강렬한 적의조차, 아무련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이 사실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아니, 정말 충격인가?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걸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바보라도, 내 약혼자야. 그리고 나 현승희, 이대로 순순히 내 것을 남에게 줄 생각은 없어. 윤 현, 너도 이 쯤에서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야.“ 승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승희의 손을 잡고 황급히 나간다. 승희는 거세게 승호의 손을 뿌리쳤지만, 승호를 따라 순순히 화장실을 나갔다. 나가기 전, 승호가 나를 뒤돌아봤다. 또다. 그 새벽녘, 기숙사에서 보았던 허탈하고 슬픈 눈빛. ...그런 것이었나? “...미안...” 제멋대로 내뱉어진 내 말을 승호가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홀로 남겨진 화장실 안에서 나는, 갑작스레 드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미안이라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승호가 그 말을 들었으면, 하는 생각에 또다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를 보고 싶다. 지금 네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재범이, 너도 내가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런 감정을 가졌었던 거냐? 이렇게...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그 것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외면했던 모든 것들을 내 스스로 알아내서, 내가 혼자 판단하고....그렇게, 그렇게... ....그런 것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지금 나는, 단 한발자국도 제대로 떼어놓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세상 일은, 알지 못하고 외면하는 편이 차라리 즐거운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감정들을 알지 못했을 때, 내 세상은 의문에 가득 차 있었을지언정,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아파했을지언정, 그 것이 내 생활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가슴을 가득 죄는 아픔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서 있었다. 신음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지독한 영혼의 목마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내 나이 17세, 사랑을 고백받다.- -50- “...여기서 뭐해?” 가만히 서 있는 내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렸다. 김 민현이다. 이 녀석은 왜 또 여기에 왔을까. 김 민현이 이리 저리 나를 살핀다.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아픈 것 아니야?” 아니, 나는... “나...몸이 안 좋아서 집으로 갈게.” “데려다 줄게.” “괜찮아. 너는 수업이나 들어가. 그럼 이만...” 황급히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을 나와버렸다. 물어봐야 하는데,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너는 왜 내 주위를 맴돌았지? 너는, 너는... 서둘러 걷다가, 나는 그대로 멈춰섰다. 가장 보고 싶었으면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 인물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얼굴 한 쪽이 거뭇하게 멍이 들긴 했지만 다른 곳은 그다지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재범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 좀 해.” 움직이지 않는 대치 상태를 먼저 깬 것은 재범이었다. 말하고는 서둘로 내 팔을 잡는 모습이, 꼭 내가 어디로 갈까 걱정스럽다는 투여서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움푹 들어간 벽의 구석에 서서 어색하게 시선을 땅으로 돌렸다. 이대로 귀를 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다.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아는데. 그런데도... “...말 해.” 이어진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재촉하듯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나를 정말 좋아하냐?” 재범이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설마, 재범이는 내가 말했던 모든 것을 농담처럼 들었던 걸까? “그,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게...! ...나를 연인으로 삼고 싶다는, 그런 사랑의 의미냐?“ 물어보는 눈빛이 간절해서, 나는 얼핏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부정을 원하는지, 아니면 긍정을 원하는지 말이다. “...그래.” 아까까지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보냈는지, 나는 또다시 바보처럼 착실히 녀석의 질문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해도 괜찮아. 경멸해도 좋아. 소리질러도 좋으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만 나를 싫어하고,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면, 그러면.... 내가 감정을 정리하면, 그 때는 다시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나는 이렇게 천천히 승호의 눈빛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나는...너를 좋아했어. 예전부터.” ...알고 있다. 재범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절하고 상냥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재범이는, 나의 첫 번째 친구였다. 스스로를 위로하듯 떠올리다가, 나는 재범이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색 눈동자가 화산을 품고 있듯이 이글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윤 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겨우 이해했을 때에는, 손 끝이 저릿저릿하게 차가워져서, 가슴까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너는...옛날부터 착하고 상냥했다. 그래서...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냐?” “...뭐?” 재범의 눈동자를 나 역시 똑바로 직시했다. 입가가 몇 번 실룩거리더니 제 멋대로 움직인다. “안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너, 설마...!” 또 무엇을 생각하는지 재범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지금, 화를 낼 사람은 나야. 비참해하고, 울분을 터뜨릴 사람은... ...나다. “그렇지 않으면, 진우는 뭔데...?” 나직이 묻자, 재범이 몸을 움찔했다. 이제는, 슬비의 말을 이해한다. 사랑하니까, 만지고 싶고, 또 옆에 있고 싶고...그래서 입도 맞추고 싶은 거다. ...지금 내 상태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재범이 역시 그랬을 거다. 이제는, 진우의 과거 행동들도, 그 말들도 서서히 하나 둘 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잠깐, 그렇다면...! 갑작스레, 머릿 속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 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처음 재범이를 만났을 때부터...모든 것이 하나 둘 씩...! “...진우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 갑작스레 재범이가 심각하게 물었다. “...응?” “진우에게 모두 말 했는데... 진우와는 얼마 전에 헤어졌어. 진우가 이상한 말을 하던데?“ ...서, 설마? “여럿이서 하는 것은 취미가 없다던가?” ...미안하다...진우야. 그저,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이제 너도 말 해줘.” ...에엥? 흠칫, 해서 바라보는데, 재범은 진지하게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 그게... 말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기세라,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쿵쾅거리던 심장이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침묵이 무겁도록 내려앉은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꽉 쥐었다. 재범은 그런 나를 기다리듯이 고요하게 응시했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눈동자 가득 재범의 모습을 담았다.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 녀석에게 전해지도록 간절히 바라며,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감정을 고백했다. -내 나이 17, 연인이 생기다.- -51-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한 번 문패에 적힌 주소와 메모지에 적힌 주소를 비교해보았다. 맞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한 후에야 거대한 한옥의 대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학교를 간다고 나와서 일부러 이 곳까지 찾아온 이상 여러 번 실수할 수는 없었다. 몇 번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누른 후 기다리자,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딱딱한 목소리에 나 역시 정중하게 응답해드렸다. “실례합니다. 여쭤 볼 게 있어서 왔는데요. 저, 죄송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제 이름은 윤 현이라고 합니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오신 분이 아니라면 돌아가 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예의바르게 말하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성함이...?” “윤 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 후 문이 열리더니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꾸벅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자, 더 이상의 말이 없이 안 쪽으로 나를 안내해 들어갔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넓은 대청 마루를 신발을 벗고 올라서자, 곧바로 슬리퍼가 내어졌다. 슬리퍼를 신고, 소리 없이 조심조심 안내를 따라 걷자, 흰 창호지가 덧발라진 문 앞에서 멈춰선다. “윤 현님이 오셨습니다.” 조심스레 말을 했지만,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고 조용할 뿐이다. 아저씨는 그 침묵에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로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열린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아저씨의 태도에 나 혼자 방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 역시 최대한 예의바른 태도로 안에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은 환한 햇빛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퀘퀘묵은 고서의 향내가 감도는 듯 했다. 수려한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뒤로 두고 한 할아버지가 옻칠이 된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계셨다. 직감적으로 저 할아버지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우선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 현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손에 쥐고 있던 길다란 담뱃대를 책상에 탁탁 두드렸다. “왜 온 게냐?” 호통치듯이 터져 나온 질문에, 나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몇 가지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앉을 곳이 없어 보여, 그대로 할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 단호하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말이 무언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을 잡아낼 겨를도 없이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당장 나가거라~! 뻔뻔스럽게 이 곳에 들어오다니...!” 서릿발처럼 매섭게 호통치며 득달같이 나에게 달려오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를 나는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러시는지, 지금 이 상황이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무례하게 이 집에 들어온 것이 무척이나 싫으신지, 내 어깨를 잡고 막무가내로 일으켜세우셨다. “그만!” 낮고 굵게 호통을 치는 할아버지의 거센 기세에도 할머니는 주눅들지 않고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영감...! 그런데, 이 아이를 집 안에 들여놓다니요?!“ 절절이 외치는 할머니의 태도에, 무언가 내가 대단히 큰 죄를 저지른 것만 같다.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나를, 할아버지는 힐끔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나는 몇 번 입을 달싹 거렸다. 준비해 온 많은 질문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는 누구시죠?”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할머니조차 얼굴을 찡그리고 나를 바라보신다. 이 질문이 얼마나 실례가 되는 것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누구시기에, 나를 알고 계시는 듯 행동하시는 거지? 또,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시는 듯 보이는 거지? 할아버지는 들고 계시는 담뱃대를 입에 물고, 몇 번 연기를 내뿜으셨다. 그리고는 담뱃대를 입에서 떼시고 나에게 조용히 물으셨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게냐? 만약, 경영권을 원해서 온 거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만 돌아가거라.“ “...경영권이요?” 나직하게 묻자, 할머니가 나를 거칠게 일으켜세웠다. “어서 나가거라~!” 험악하게 외치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할머니가 잠시 주춤하신다. 그런 할머니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잘 잡아드리고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드렸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할머니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불러세우셨다. “잠깐...! 네가 이 곳에 온 것은 누구의 의사냐?“ “제가 원해서 온 것입니다.” “말을 안 하겠다는 건가. 그만 가 보거라.” 눈을 번득이며 말하는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사람들의 재촉에 못 이겨 그 집을 나오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고 보니, 정작 미연 누나에 대한 것은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괜히 실수만 하고 나온 것 같아 불안한 기분이 든다. “흐음, 글쎄...” 존경하는 천호 선배님은 내 질문에 나른하게 대답하고는 몸을 뒤척이셨다. 그 태도가 자고 싶어 죽겠다고 외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것을 알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천호 선배님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어봤을 때에는, 솔직히 깜짝 놀랐다. 이 선배님의 이런 모습을 갑자기 보게 되니 쉽사리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알고 싶어서요.” 얼떨결에 대답하자, 천호 선배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누군가의 충동질에 못 이겨서 이러는 거라면, 이 쯤에서 그만 둬라. 귀찮지도 않냐?” 무언가, 상당히 천호 선배님다운 충고였지만 쉽사리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젓자, 천호 선배님이 혀를 쯧쯧 차더니, 그대로 고개를 팔목에 파묻었다. 한참동안이나 그 자세가 변하지 않으셔서 아무래도 선배님이 자고 계시나 보다, 라고 판단하고 그만 떠나려는데, 천호 선배님이 나직이 말씀하셨다.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군. 분명히.... 신 지웅이라는 사람이, 윤 미연과 사귄다고 주위에서 한참 떠들썩했던 걸로 아는데...? 그런 소리도 신 지웅이 자살했다는 말에 곧바로 없어지고 말았지만... 한참동안 주위에서 말이 많았지.“ “...?” 천호 선배님은 고개를 들고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 윤 미연이 그 때 당시 외국의 모 기업과 커다란 계약을 성사시킨 일로 인해 더 그랬을 거야. 단순히 질투심에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사귀었던 사람에 대한 윤 미연의 태도가 너무 차갑다고 떠들어댔었지.“ ...내가 미연 누나를 언제부터 따르게 되었는지, 그 계기는 생각나지 않는다 . 아마 그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는 미연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미연 누나에 대한 것이라면, 두둔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어도 미연 누나의 편을 들고 싶은 거겠지. 지금도, 나는 미연 누나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터벅터벅 양호 선생님을 찾아 걸어가면서 나는 심란한 속을 애써 달랬다. 양호 선생님께는, 다시 한 번 여쭤볼 것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양호 선생님은 오늘 따라 어디를 가신 건지, 양호실 문에는 외출중이라는 간단한 메모만 붙어 있었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무언가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든다. 뭐랄까, 갑자기 이유없이 저 쪽 한 구석을 바라보기가 무척이나 싫어진다. 이 찜찜한 기분, 아니 뒷골에서 검은 연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애써 고개를 앞으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소리쳐 부르는 듯한 이상한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냥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아암, 그렇고 말고. 걸음을 빨리 해서 뛰어가자,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따라 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결국은 내 앞에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나타났다. “...너 지금 나 무시했냐?” 웃으면서 말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살벌한 어투인데도, 그다지 대꾸해줄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민준, 이 녀석이 내가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 준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 여겨 가만히 있어주는데... 민준이 뺨 언저리에 아직도 퍼런 붓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며 말하는 것이다. “이제야 나를 질투하게 된 모양이지?” 너무 잘난 사람은 이래서 피곤해, 라며 머리를 뒤로 젖혀 넘기는 모습에, 나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 여기서 이런 녀석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성큼 성큼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민준이 내 팔을 꽉 잡았다. “야, 나는 너 때문에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너야말로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스스로가 다른 이에게 미치는 폐해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한 민준의 태도에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커다란 손 하나가 하나 더 나타나서 민준의 손을 떼어내 버렸다. “박 민준, 여기서 뭐 하냐? 왔으면 교실로 들어가.” 민현의 말에 민준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씨익 웃었다. “그럼 다 같이 들어가자.” “너 먼저 들어가. 나는 잠깐 현이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단호한 민현의 말에 민준이 나와 민현을 번갈아 보다가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지. 그러면 이만 간다.”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가는 민준을 내버려 두고 민현이 나를 바라보았다.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 나는, 민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52- 아무도 없는 한적한 학교 뒤뜰에서 민현은 나를 세워두고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 동안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괜시리 초조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너와 재범이가 말하는 것 모두 들었어.” “...응?” “재범이를 좋아하는 거야?” 똑바로 물어보는 민현의 모습에 너무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기라도 했는지 내 마음은 움직임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응.” 고개를 끄덕이자, 민현이 나직이, 그리고 확실히 말했다. “나도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윤 현.”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민현을 바라보는 내 모습에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지금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줄 수는 없겠지?” 민현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이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언제부터?” 다만, 나는 짧게 물어봤을 뿐이다. 민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따스하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 살갗을 찔러댄다. 침묵만을 주위에 드리운 채, 나와 민현은 서로를 응시했다. 싸움이라도 하는 듯, 낱낱이 상대방을 탐색하고, 또... “나는 언제나 여기에 서 있을 거야.” 갑작스런 민현의 말에 나는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평소의 미소와는 많이 다른, 어딘가 쓸쓸한 미소. 상처받았다. 녀석도 아파하고 있었다. “지금 네 눈을 잡아두는 사람들처럼 황홀한 광채가 나에게는 없어. 하지만 다행히 나는 인내심이 무척 많아. 그러니까 기다릴 거다. 앞으로도 우리들 앞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단 한 순간만이라도 네가 나를 쳐다봐 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거야. 그것이 추억일 뿐이라도, 그런 시간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웃을 수 있겠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민현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 곧은 시선. 녀석은 진심이다. “그러니까 계속 네 등 뒤에 서 있을 거다. 네가 바라 볼수 있는 위치에서, 언제라도 조금만 뒤를 돌아본다면 나를 알아챌 수 있도록.” 민현의 눈동자가 너무 올곧아서 나는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다는 것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때론, 앎이란 행복이 아닌 고통일 수도 있다. 예전, 아무 것도 몰랐을 때 민현이나 승호의 행동은 나에게 그저 의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있었어?” 싱글벙글 웃으며 앞에 서 있는 재범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씩, 아니 종종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택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험 답안지처럼 답이 여러개여도 되는 경우는, 굉장히 찾기 힘들다. 그리고, 내가 정한 답이, 다른 사람의 답과 일치해, 그 답이 맞다고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일 또한... ...굉장히 드물지 않을까,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갑작스럽게 드는 한기에 서늘해진 뒷 머리의 감촉을 애써 털어내듯이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왜 그래?” 의아하다는 듯 묻는 재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런데... 연인이라는 건 뭐 하는 거야?” 순간 재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우리...이제 약혼을 해야 하는 건가?” 심각하게 중얼거리는데, 재범의 얼굴이 하얗게 되어 식은땀만 흘린다. ...그런 게 아니었나? 하지만, 연인은 사랑하는 이들이고, 또 결혼을 하게 될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기 위한 필수 과정이 약혼, 아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재범은 땀만 계속 흘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결국, 그 날 나는 끝까지 앞으로 연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흐응, 그랬단 말이야, 윤 현군?” 양호 선생님이 눈을 깜박거리며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되물으셨다. 양호 선생님의 맑은 푸른 눈동자 어디에도 거짓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누구십니까?” “그건 윤 현군이 더 잘 알지 않아?” 양호 선생님이 귀엽게 미소지으며 밝은 어조로 대꾸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손톱을 책상에 톡톡 부딪히면서 딴청을 부리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난 말이야, 윤 현군.” “...네.”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면서도 인정할 수 없어.“ “...네?” “윤 현군은 어떻게 생각해? 위에 서기 위해서는 아래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말을.” “글쎄요.”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윤 현군이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해봐. 떠오르는 이미지라던가, 아니면 단순한 감상이라도 좋으니.” 나는 양호 선생님의 곱슬거리는 적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그리고 파란 눈동자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위에 서야 합니까?” “인간이니까. 윤 현군도 가진 자의 편에 서 있잖아?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를 짓밟고 서 있다는 뜻이야. 머리를 밟고 있는 자는 위의 사람이고, 위를 받쳐주기 위해 머리를 대 주고 있는 사람은 아래의 사람이지. 윤 현군도 머리를 짓밟히는 아래의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잖아?“ “...어째서요? 아래의 사람은 어째서 머리를 짓밟도록 해 주는 거죠?” “...지금 중요한 말은 그런 게 아니지 않아? 내가 질문했던 것은 위에 선 자가...” “어째서 위에 서고 아래에 서야 하는 겁니까? 나란히 서면 안 되나요?”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신이 사람들의 모습을 다르게 만든 이유 자체가 바로 차별성에 있는 거지. 차별성이라는 것은 곧 구별이고, 분류를 의미해. 모두들 땅 위에 나란히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땅은 좁고, 사람들은 많아. 땅 위에 서지 못한 누군가는 땅 위에서 밀쳐져 바닷 속으로 빠져야 할 텐데, 그런 것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지. 그렇다면 결국 다른 이를 짓밟고서라도 위에 올라설 수밖에 없잖아?“ “나란히 서 있지 않으면 되잖아요.” “뭐?” “또다른 뫼비우스의 띠처럼... 위로 조금씩 상승하는 기다란 원형 계단위에 사람들이 서 있고, 그 원형 계단의 끝은 제일 아래의 계단과 이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모두들 서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것도 또다른 구별이야. 그렇다면 가장 위에 서 있는 자가...!” “가장 위가 어디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데요?”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 “하늘이 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요. 땅이 아래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늘과 땅도 그럴 겁니다.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면, 각자의 특성에 맞게 원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 거고요. 어째서 하늘에 가까운 곳에 서기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기까지 해야 하죠?“ 양호 선생님이 갑자기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네. 흐음, 좋아. 뭐, 어쨌든...윤 현군을 보고 있노라면, 괴롭히는 보람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야.“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양호 선생님은 그 사이에 기운을 차리신 건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셨다. “위에 선 자들은 약점을 만들면 안 돼. 약점은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계기가 되거든. 미연이 같은 경우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지. 높은 곳에 있을수록, 아래로 끌어내리기가 쉬우니까. 미연이는, 선택한 것 뿐이야, 약점과, 그리고...“ 양호 선생님은 잠시 눈을 깜박이셨다. 무언가를 망설이듯이 몇 번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고개를 저으신다. “...이제 윤 현군도 슬슬 알게 될 거야.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 “소문요?” “약하다는 모습을 보인 순간...이미 그 때부터 윤 현군도... 아니, 아냐. 그나저나, 윤 현군, 집에서 용케 학교룰 계속 다니도록 허락해 줬네?“ “...제가 고집을 부렸거든요.” “그랬어? 결국, 미연이가 진 거야, 설마?” “...하시던 이야기들을 확실히 마저 해 주십시오.” “싫어.” 개구진 얼굴로 말하는 양호 선생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양호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떠밀었다. “상담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이제 윤 현군도 곧 알게 될 거야.“ 얼떨결에 양호실에서 쫓겨나오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결국 내가 들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으려는데,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양호 선생님이 얼굴만 살짝 내밀고 나에게 미소를 지으셨다. “자아, 그럼 윤 현군? 이제 들어가서 학생의 본분을 다해야지?” 등을 떠미는 양호 선생님의 기세에 밀려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양호 선생님이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 주신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몇 번 머리를 굴리다가,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메모지를 다시 한 번 꺼내서 들여다보았다. 일단, 이 집에 관해서 알아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53- “왜 눈을 피하는 거지?” “...넌 왜 나를 귀찮게 구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묻는데도, 민준은 여전히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녀석의 능글거리는 태도가 내 신경의 한계에 다다를만큼 거슬린다고 느꼈을 때쯤, 민준이 손을 턱에 대고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흐음, 이런 이런... 정말 섭섭한 걸? 나에게는 비밀로 할 셈이야?“ “...뭘?” 이 녀석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줘야 민준이 순순히 떨어져 줄 것만 같아서 의심쩍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민준이 턱에 괸 손을 앞으로 내밀어 허공에서 흔들어댄다. “안 재범과 결국 사귀기로 한 거냐?”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이 녀석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워낙 이상한 곳이 많은 녀석이니, 새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걸려하는 것은, 왜 민준 이 녀석이 내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지 하는 거다. 자고로, 민준과 엮어져서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래, 그래서 안 재범과는 어디까지 나갔냐?” 어디까지? 그야... “멀리 나가지는 못했어.” “그럴테지. 너같은 쑥맥을 앞에 두고서 멀리 나갈수는 없겠지. 그래서 어디까지 나갔는데?” 어디까지 갔었더라... “학교하고 집은 빼고...으음, 전에 그 폐가에도 갔었고..아, 맞다. 얼마 전에...응?” 말을 하다가 시선을 느껴 민준을 바라보니, 녀석이 입을 꾸욱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건방진 민준의 눈빛에 덩달아 노려봐주었더니, 민준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절래 절래 고개만 흔든다. “됐다, 됐어. 아니, 잠깐... 그렇다면...“ 어디 아픈 녀석처럼 갑자기 헤벌쭉 웃어대는 그 모습이 정녕 공포스러웠다. 생각에 잠긴 녀석을 뒤로 하고 이만 민준과 떨어지고 싶은 생각에 몸을 살짝 움직여 보는데, 민준이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좋아. 내가 너에게 사귀는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가르쳐주지.” “...뭐?” “생각해 봐. 너는 사귀는 사이에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냐?” ...물론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경험을 상기해 볼 때 민준 녀석의 말을 믿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입을 꾸욱 다물고 민준 녀석을 외면하고 있자니, 민준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진지하게 말한다. “네가 이런 저런 일로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나를 믿어 주면 안 되겠냐?“ “응.” 단호하게 대답하자 민준이 한 순간 움찔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댄다. 고개를 돌려 무시해줬더니, 어깨에 얹은 민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쳇, 그렇게 나를 못 믿는다면...내가 정확한 증거를 보여주지. 연인 사이의 행동에 관해 쓰여진 책과 비디오를 내가 너에게 갖다줄게. 그런 것들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닌 객관적 증거들이니 믿을 수 있겠지? ” “흐음?” 미심쩍은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고 민준을 노려보았지만, 민준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어허, 내가 너에게 저번 일들로 미안한 것이 많아서 이렇게 해 주는 거니까, 고맙게 받아들여. 알았지?” 무척이나 신이 난 어조로 그렇게 말하더니,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꾹꾹 눌러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그리고 그 날 하교할 때, 나는 책가방과 쇼핑백 가득 책과 비디오를 담아 들고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그건...” 해원 아저씨가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힐끔 바라보시며 말씀하시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말했다. “친구에게 받은 것들입니다. 저녁 먹기 전까지 볼 생각이니, 나중에 불러 주세요.” 덜그럭거리며 쇼핑백과 만화책을 가지고, 주로 영화를 볼때 사용했던 방 안으로 들어가서 내용물들을 꺼내니 생각보다 더 많은 양의 비디오와 책들이 수북히 쌓인다. 이 모든 것들이 연인 사이에서의 행동에 대해서 씌여 있단 말이지? 궁금증에 그 중 하나를 들어서 살펴 보았다. 분명히 비디오인데, 이상하게 겉에 어떤 라벨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러면 1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잖아, 라고 잠깐동안 생각했다가, 곧 이 비디오들은 한 편이 끝인 것들인가 보군, 하고 결론을 내렸다. 비디오 하나를 기계에 집어 넣고 나는 소파에 편히 앉아 화면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다. 연인들은 모두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경악하고 있는 지금도, 스피커에서는 연신 ‘아앙’ 이라는 식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화면 가득 살덩어리가 철퍽대면서 맞부딪힌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저런 행동을...? 하다가, 그대로 생각을 멈춰 버렸다. 고개를 휘휘 저어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아까 전에 봤던 비디오에 눈이 멈췄다. 저 비디오도 정말 놀라웠지. 대체 왜 연인들은 상대방을 밧줄로 묶고, 또 이상한 기구를 이상한 곳에 넣는 거지? 그런 게 재미있나? ...설마 재범이 그 녀석도 나와 그런 것을 하고 싶어하는 걸까? ...이상하다. 나는 재범이와 그런 것들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럼 나는 재범이를 연인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빙글빙글 도는 머리로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컵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해원 아저씨가 쟁반을 한 손에 들고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셨다. “...죄, 죄송합니다. 하하, 목이 마르실까봐...” 바닥에는 해원 아저씨가 가져오신 걸로 추측되는 컵이 나뒹굴고 있었다. “도련님!” 해원 아저씨는 멍한 얼굴로, 그리고 이상하게 커진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네?” 얼떨결에 눈을 크게 뜨고 대답하자, 해원 아저씨가 붉어진 얼굴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닌가. “...누가 이런 것을 권해 줬습니까?” “...그건...” 순간 뺀질이 민준 얼굴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사이 내 침묵을 뭐라고 해석하셨는지, 해원 아저씨가 몸을 비틀거리신다. “...물론,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이런 것에 호기심을 가지실 만도 하시지만...” 무척이나 절망한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시는 모습에 슬그머니 비디오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보시려고요?” 고개를 끄덕이자, 해원 아저씨가 화사하게 웃으신다. “그럼요. 이런 것은 나중에 연인이 생긴 후에 봐도 늦지 않습니다.” ...저 말은 역시 연인들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인가. 비틀거리며 방을 나가는 내 등뒤에서 해원 아저씨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신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방에 가서 민준 녀석이 준 책까지 모두 읽어봐야지. 방 안에 들어가서 가방 안에서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책은 처음 보는 단순한 표지에 제목과 저자 이름만 씌여 있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외국인인지, 한국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제목은 ‘애나무집’. 으음, 뭔가 상당히 심오한 제목 같은데... 나는 느긋하게 책을 펼쳐 들었다. ...충격적이다. 정말로? 정말, 이런 것을 한단 말인가... 중간에 내 방에 들어오셨던 해원 아저씨는 내가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에 상당히 만족한 모습으로 나가셨다. 하지만, 그 사이 내 정신은 상당히 피폐해 져 있었으니... 애나무집을 팽개치고 다른 책을 꺼내들었다. ‘나만의 노예’. ...이것 역시 상당히 강렬한 제목이다. 책을 넘겨 보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대체, 왜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은 이런 내용이 없었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읽었던, 형이나 누나가 권해줬던 책들 가운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었다. ...이제까지, 나는 인생 헛 살았던 건가.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나니 머리가 멍하다. ...헉, 이런 젠장, 그런 책을 읽어서 그런지, 책에서 나왔던 표현들이 시시때때로 떠오른다. ...나는, 아무래도 재범이와 연인으로 사귀는 것을 고려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잘 봤냐? 어땠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본 것은 민준의 묘하게 들뜬 듯한 얼굴이었다. 나에게 바짝 다가와 싱글거리며 묻는 민준을 잠시간 노려보다가 책과 비디오가 담긴 쇼핑백을 건네줬다. “자, 이제 감상을 말해 봐.” “... 너 솔직히 말해 봐.” “뭘?” 굳은 얼굴로 민준 녀석을 노려보며 물어보았다.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으응, 그 때, 뭐~얼?” 말꼬리를 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민준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다음 질문을 삭제시켜버렸다. 그래, 물어서 무엇하냐. 민준 녀석의 대답을 들어봤자 분통만 터질 것을. 왠지 인생 만사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니, 재범이 나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한다. “...”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재범을 바라보기만 하자, 재범이 주춤하더니, 왜인지 민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이대로 재범을 보는 것이 껄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나이 17, 연인 사이의 행동을 알다.- -54- “같이 가자.” 학교가 끝나고 내 앞에 서서 말하는 재범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재범은 내 눈초리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꿋꿋이 서 있었다. 그런 재범의 눈초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다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버렸다. “...윤 현?” 그런 내 태도에 손을 앞으로 내밀었던 재범이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뭔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도 잘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하하, 그게...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 그럼...“ 옆에 있는 사람의 팔을 잡고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나는 재범의 멍한 얼굴을 뒤로 하고 학교를 뛰어서 빠져나와 버렸다. 허억,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옆에서도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내 손은 왜 잡고 달린 거냐?” “엥?” 놀래서 옆을 돌아보자, 민준이 같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민준 이 녀석이 갑자기 씩 웃으며 머리카락을 옆으로 사락 넘기며 거만하게 말했다. “훗, 내가 좋으면 좋다고 그냥 말로 하지.” ...이 녀석이 미쳤나 싶어, 살며시 외면해 주는데 민준의 주절거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뇌에 찬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나직이 말하는 것이다. “네 마음은 알지만...함부로 질투 하는 것 아니다.” ...아무래도, 민준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 내 팔뚝에서 오도독 소름이 돋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어서 민준 녀석을 어딘가로 보내야 할 것 같다는 강력한 의무감이 마구 들었다. “내 마음대로 너를 데리고 달려서 미안했다. 그럼 이만 헤어지자.”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드는데, 민준이 의외로 씩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어허, 왜 이러시나. 데리고 나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제발 가라, 응?” 살포시 고개를 돌리며 말해주는데도, 민준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하긴, 이 정도에서 무너지기에는 녀석의 철판은 너무도 두껍다. “이왕 데리고 왔으니 밥이나 사 줘라.”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고는 근처에 있는 가게에 씩씩하게 걸어 들어간다. 할 수 없이 따라 들어갔더니, 나를 자리에 앉혀 놓고 주문을 끝마치고 걸어온다. “여기 꽤 맛있게 하니까, 먹을 만 할거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언가 어떤 사실을 잊어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나를 마중하러 오셨을 김씨 아저씨는 지금쯤 차 안에서 얼마나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인가. 핸드폰을 들고 잠시 동안,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얌전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차라리 내가 집에 빨리 들어가서 아저씨께 연락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빠를 듯 싶어 어서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문득 나 먼저 집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먼저 간다. 돈은 여기 놔 두고 갈 테니까.” 말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민준이 내 손을 꽉 잡는다. “너, 지금 나를 거지로 아는 거냐? 오랜만에 친구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내 순수한 마음을 그렇게 외면해도 되는 거야?“ 녀석의 말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은 민준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아 버린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 저런 말을 저 녀석은 어떻게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말하는 녀석을 얼어버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니, 이어지는 말이 더 가관이다. “사실, 우리 둘이 이렇게 사이 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안 그래?” ...이제는 눈까지 찡긋거린다. 젠장, 저 말을 듣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나온 음식을 말 없이 먹고 있는데, 민준이 도중에 화장실에 한 번 갔다 오더니, 나를 바라보며 또다시 묘한 미소를 짓는다. “있잖아. 나는 요즘 정말 즐거워.” ...그러냐. 민준 녀석의 즐거움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들의 괴로워하는 모습외에는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입맛이 뚝 떨어져 숟가락으로 음식을 쿡쿡 찌르고 있자니 민준이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어제 내가 준 비디오와 책들은 잘 봤냐?” “케, 케켁.” 순간 헛기침이 흘러나와 사레가 들려버렸다. 몇 번 쿨럭대다가 황급히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민준이 고뇌어린 얼굴로 말한다. “사실, 나는 네가 재범이와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실망했다. 내가 얼마나 슬퍼하고 좌절했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알고 싶지도 않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는 않을 거야?”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 민준 녀석을 보며, 나는 어서 집에나 가야겠다고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사실, 나는...너를...” 말을 질질 끌며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민준 녀석을 향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만 집에 간다.”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나를, 민준은 잡지 않았다.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운다. 어서 집에나 가야겠군, 하면서 길거리를 걷다가, 심각한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여기는 어디일까나. 분명히 내가 아는 곳 근처일텐데, 어디인지 확실히 감을 못잡겠다. 으음, 하고 몇 번 생각을 거듭해보다 결국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가기로 결심하고 큰 길가로 나갔다. 손을 비스듬히 들고 서 있는데, 오늘따라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겨우 내 앞에 선 택시에 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이 헐떡거리며 나에게 고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눈꼬리를 접으며 화사하게 웃는 여자를 말 없이 바라보자, 택시 기사가 나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일단 택시를 보내고, 여인에게 몸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화사한 정장 차림의 여인이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 지었다. “설마, 기억 못하시는 건가요? 하긴 잠시 스치듯이 뵈었을 뿐이니까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차 한잔 어떠세요?“ 바로 앞에 있는 까페를 가리키며 말하는 여인을 나는 잠시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화려하고 세련된 여인이 내 시선에 간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에 못 이겨, 그리고 왠지 드는 호기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까페로 올라갔다. 구석의 자리에 앉자 여인은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옆에 서서 무엇을 시키실 것이냐고 묻는 카페의 종업원에게 간단히 커피를 시키자, 여인도 고개를 끄덕여 커피를 추가시켰다. 따뜻한 커피잔이 곧 앞에 놓였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 나와 여인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인의 구불구불한 갈색의 머리칼은 위로 틀어 올려져 있었고, 새빨간 립스틱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여인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연약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을 커피잔에서 떼고 다시 한 번 자세를 가다듬었다. “굉장히 오랜만이군요. 그러니까...3년만인가? 도련님을 뵌 것이요. 그 때 선우님과 같이 오셨었지요.“ “...네?” 3년전이라면 내가 중학교 1학년에 다닐 때인가? 그 때라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생각해냈다. 진한 화장을 하고 기다란 담뱃대를 들고 있었던 예쁜 누나를. “아, 안녕하세요.” 뒤늦게 인사를 하자, 살포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간단한 동작 하나하나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습관처럼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시겠죠?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불러세우다니 말이예요.” “아닙니다.” 짧게 대답하자,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유키, 라고 불러주세요. 도련님은?” “윤 현입니다.” “그런가요.” 여인의 기다란 손가락이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눈 앞의 여인을 유키 누나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너무 기분이 안 좋았거든요.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기분이랄까요. 그러던 와중에 현 도련님을 뵙게 되어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만 불러세우고 말았어요.“ 죄송해요, 라면서 애교있게 웃는 유키 누나에게 고개를 가로로 몇 번 저어드렸다. 그러자 유키 누나가 다행이군요, 라고 하면서 커피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저는, 고아예요.” 뜬금없이 나온 말에, 놀란 기색을 숨기며 나 역시 커피를 들어서 홀짝거렸다. 지독히도 단 커피 맛이 입안을 맴돌며 혓바닥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분이었어요. 결국, 저는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도시로 올라갔죠. 도시는...끔찍했어요. 속고 속이고, 뺏고 빼앗기는... 그리고 그 곳에서 저는 언제나 빼앗기는 쪽이었죠. 사실 속고 속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빼앗기지 않을 만큼, 힘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 “하지만 몸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 아이가 가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뻔한 거였죠. 필사적으로 힘을 찾아 헤매다가... 그 분을 만나게 되었어요. 사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처음, 제가 바라봤던 것은 그 분이 가졌던 힘이었으니까.“ 누나가 단정하고 고아하게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촌스러운 계집아이가 그 분에게 그만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흔하고 시시한 것이겠죠. 그래도, 좋아했어요. 그 분이 어떤 힘도 가지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상관없을만큼, 그렇게 빠져버렸어요.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누나가 나를 바라보며 화사하고 곱게 웃었다. “이런 이야기, 듣기 거북하겠죠?” “...아닙니다.” “아니예요. 웃긴 이야기죠. 그 분을 따라 이 나라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제 남은 것은 행복뿐이라고 여겼었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의 대용품이었을 뿐이었다니.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분이 저를 택하기를 기다렸지만, 그 분이 택한 것은 그 분의 가족이었죠. 결국, 시시한 계집아이 하나가 멋대로 착각하고 멋대로 버림받은...그 분에게는 단지 그 뿐인 일일 거예요.“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나 그 분을 좋아했지만, 저는 결국 버려지고 말았죠. 버려지고 난 후 생각한 것은 언제나 그 분에 대한 것뿐. 사랑이 깊어서 증오가 된다 해도, 그 본질은 언제나 사랑이겠죠. 그 사랑이 변질되어 집착이 된다 해도. 그 사랑이 썩고 곪아 결국엔 독이 된다 해도. 저는, 사랑이라는 변명을 앞에 달고 그 분께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거예요. ...이런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경멸하시나요?“ 나를 바라보는 누나의 갈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맑고 깨끗해서, 더 슬픈 빛을 띄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요. ...그렇게나 사랑하신다면...꼭 그 사랑이 이루어지셨으면 좋겠군요.“ 내 대답에 누나는 잠시 동안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누나의 얼굴은 그늘 한 점 없이 청순하고 깨끗했다. “격려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열심히 할 테니, 현 도련님도 기대해 주세요. ...만약, 만약... 저도 선택당하는 쪽이었다면, 현 도련님처럼 자랄 수 있었을까요?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으로?“ 순간 나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누나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신데요.” 나처럼,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착실히 대답을 하자, 누나가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저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는 방법이 그 사람을 쫓아 위로 올라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위에 있는 사람을 내 옆에 두기 위해서는...아래로 잡아끌어 내리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 계산을 하고 까페를 나왔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 마음 속까지 답답해졌다. 습관처럼 손을 집어넣은 주머니에서 메모지가 바스락대며 존재를 알려온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어봐도 답답한 가슴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내 나이 17, 다른 사람의 사랑에 대한 견해를 듣다.- -55-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올리려다가 뒤늦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재범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누구를 찾으려는 듯 정신없을 정도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재범이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재범이에게 다가갔다. 재범이 누군가를 찾는다면 같이 찾아줄 요량으로 주춤거리며 재범이를 불렀다. “...너...!” 그런데 내 앞에 달려온 재범이 이 녀석은 씨근덕거리며 말 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한다. 그 이상한 낌새에 얼굴을 구기고 있노라니, 내 어깨를 붙잡고 다짜고짜 주변의 골목으로 끌고 가더니 소리를 친다. “박 민준 그 녀석은 어디 있어?!” 민준에게서 뭐라도 받아내야 할 것처럼 다급히 소리치는 모습에, 어디 있는지 찾아서라도 알려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솟아오른다. “...몰라.” 잡힌 어깨가 아파서 재범의 손을 털어내면서 대답을 하고 있자니, 재범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또 왜이러나 싶어서 바라보았더니 입을 꾸욱 다물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솔직이 이 녀석이 왜 이러는지 도저히 감을 못 잡겠어서 일단 물어보았다. “박 민준에게 볼일 있어?” 진지하게 물어보았건만,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서 이를 빠드득 갈더니 나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본다. “...왜 박민준과 같이 다니는 거야?” 험악한 기세보다, 말의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 봐, 라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재범의 기세는 더욱 험악해져만 갔다. 사실, 내가 박 민준과 같이 다닌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녀석이 나를 따라다닌 것 뿐이지. 그리고 민준 녀석이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순전히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일 거라고 나는 맹세할 수도 있다. “...저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가까이에 재범의 얼굴이 다가왔다. 눈만 커다랗게 뜨고 가만히 있는데, 재범의 입술이 내 입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는 몸을 재범이 허리에 팔을 두르고 단단히 감싸 저지한다. 이를 세워 입술을 깨무는 몸짓에 눌려 입을 열자 혀가 부드럽게 입 안에 침투해 입 천장과 잇몸을 쓰다듬는다. 농염한 키스에 왠지 온 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때 내 머릿속에서는 어제 본 소설의 한 장면이 다시 재구성되고 있었으니... 제목이 ‘나는 네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였나? 거기서도 이렇게 골목에서 키스를 나누고 그리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재범을 밀쳐냈다. 갑작스레 떠밀려진 재범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달려서 골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급하게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잽싸게 멈춰서 택시에 올라타 주소를 말했다.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고 애써 뒤를 쳐다보지 않으려 하면서 나는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위험했다. 소설에 따르면 키스를 하고 나서 할 일이란 뻔했다. 밧줄도, 또 채찍도, 그 외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일들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골목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원 같은 곳에서 그런 일을 할 용기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무엇보다 검은 테이프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 어떤 것을 할 수는 없 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앞에 있는 택시 좌석에 머리를 쾅쾅 부딪히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일들을 할 수는 없어, 라는 생각에 재범과 연인이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으음, 그렇지만... 재범이, 그 녀석이 좋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연인이라면 다 한다는데... 아냐, 나는 그래도 그런 일은...! 연이어 택시 좌석에 머리를 박고 있자니 택시의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졌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빽미러로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시는 모습을 보자니, 조금 무안해진다. 아악, 그렇지만...! 가슴 속 가득한 이 고민은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역시 세상에는 차라리 알지 못하는 편이 좋은 것들이 많았다. 상황이 반대로 되었다. 예전 재범이가 나를 피해다녔었던 그 심정을 이제 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체험하고 있다. 요즈음, 나는 재범이를 피해다니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거기에, 미연 누나에 대해 주위를 이리 저리 캐고 다녀도(하다 못해 해원 아저씨까지 동원해서) 더 이상의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재범이를 피해 지하실로 가는 계단 한가운데에 걸터 앉아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친한척 나에게 말을 건다. “궁상맞게 여기서 뭐하냐?” ...실상, 나는 이제까지 몇 번이고 박 민준에 대해 의문을 품곤 했었다. 그 의문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이 녀석은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지, 불쑥불쑥 잘도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왜 왔냐?” 또 무슨 시비를 걸러 왔냐, 라는 의미를 담아 질문하자 민준이 능글맞게 웃는다. “흐음, 글쎄? 누구처럼 다른 사람을 피해서 온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때때로(아니, 종종) 이 녀석의 뒤통수를 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곤 한다. 그런 마음을 애써 참는 나에게 노벨 평화상을 줘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민준이 옆에서 나를 쿡쿡 찌른다. 눈을 치켜뜨고 돌아보자, 히죽 웃으면서 대뜸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언제는 안재범이 좋아서 사귀기로 했다면서 지금은 왜 피하고 다니는 거냐? 흐음, 이제 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싫어진 거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순간적으로 발끈해서 말하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민준은 내 말을 똑똑히 들은 모양인지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빌려줬던 책과 비디오 때문에 피해 다니는 거냐?” 음하하핫, 웃으면서 말하는 녀석을 쳐다보기도 싫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자니 민준이 내 턱을 잡고 눈을 마주쳐 온다. 순간 온 몸이 근질거리면서 소름이 오도독 돋는다. 녀석의 팔을 뿌리치려는데, 민준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이렇게 안 재범을 피하고 있는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야. 뭐든지 해보기 전에는 무섭기 마련이고, 너는 처음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안 재범을 피하는 거지. 안 그래?“ “...안 그래.” 하지만 민준은 내 말에도 끄떡도 하지 않은 얼굴로 헤죽 웃었다. “아냐. 너는 네 자신을 속일 셈이냐? 너의 절친한 친구인 내가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가르쳐 주지. 다른 사람과 미리 경험을 해 본다면, 안 재범과 같이 할 때도 자신있게 네가 관계를 주도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상대는 내가 해 줄 수 있어, 라면서 자신만만하게 웃는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로서는, 이 녀석이 더위에 미쳐 나사 하나가 빠져 버렸던가, 아니면, 원래부터 이상한 놈이었지,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이라 무서워서 이러는 거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냐?” “그건 또 틀리지. 다른 사람과 하는 것은 연습이라고, 연습~!” “...양호 선생님께도 이 사실에 대해 여쭤 볼까?” “...너 정말 변했구나.” “...내가 아무리 변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네 녀석보다 더 할까.”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하는데, 민준이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뭐, 좋아. 오늘은 이 쯤 해 둘까. 언제든지 생각나면 연락해. 윤 현.“ 그리고는 기습적으로 내 볼에 입술을 갖다대고 뛰어간다. ....저걸 그냥...! 실내화를 벗어들어 던지면 뒤통수를 때릴 수 있으려나, 하면서 거리를 재다가 나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재범을 발견했다. 순간 머쓱해져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재범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떠 재범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헛것이라도 본 모양인지, 그 자리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갑자기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몇 번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교실로 가 볼까.” 터벅터벅 발을 옮기는 것이 오늘따라 왜 이리 힘이 드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누가 알려 줬습니까?”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해원 아저씨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오신다. 왜 그러신가 해서 눈만 굴리고 있는데, 해원 아저씨의 손에 들린 종이 조각이 해원 아저씨의 움직임에 맞춰 공중에서 나폴대는 것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옷을 갈아입으면서 메모지를 빼놓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해원 아저씨는 평소때처럼 옷에 든 것이 없는지 살펴 보시다가 메모지를 발견하신 것 같았다. “...도련님.” 굳은 얼굴로 나를 부르는 해원 아저씨의 모습을 냉정한 척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해원 아저씨의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해원 아저씨가 저 주소에 적힌 집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이 곳을 찾아가 보셨습니까?”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해원 아저씨의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해원 아저씨가 눈에 띄게 밝은 얼굴이 되어 메모지를 손 안에서 꾸깃 꾸깃하게 구겨버렸다. “...그 곳에 가 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들었는데요.” 해원 아저씨의 손 안에 구겨진 채 쥐여진 메모지를 바라보며 말하자, 해원 아저씨가 몸을 흠칫했다. “도련님...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외갓집에는 미연 아가씨나 선우 도련님과 같이 가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제가 도련님이나 아가씨가 다음에 집에 들리실 때 말을 꺼내 놓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황급히 방을 나서는 해원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침대에 다가가서 벌렁 누워버렸다. 바로 보이는 천장의 벽지를 응시하다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감긴 눈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내가 메모지에 적힌 집을 방문했을 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나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런데 그 집이 나의 외갓집이었단 말인가?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고?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그렇게...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면, 나는 이제까지 외갓집에 대해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외갓집에 대해 의문을 품지도 않았던 이유는, 내 옆에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있는 어렸을 때, 어머니는 이미 내 곁에 계시지 않았고, 나는 어머니가 외국에 나가셨다는 말만 듣고 자랐다. 그럼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불편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미연 누나가 있었고, 선우 형과 선재 형, 그리고 아버지가 언제나 내 옆에 서 있었다. 생활 면에서는 해원 아저씨가 꼼꼼하게 나를 챙겨주시는데, 내가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내가 이제까지 외갓집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렇게 화가 나셨던 걸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씀이 생생하게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이상해. 정말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정말로 이상하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경영권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지? 할머니의 말씀은 또? ...아무래도 외갓집이라는 곳을 다시 한 번 찾아가봐야 할 것 같다. -56- 부제 : 인생은 괴로워. 선우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요즘, 신경을 갉작대며 긁어대는 한 무리의 인간들 때문에 심사가 꼬여 있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선우 기준에서 볼 때 즐거운 도발에 불과했다. 물론, 그런 일들로 인해 귀여운 막내와의 전화 통화를 못하는 것은 서운했지만, 선우는 미연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애시당초 이슬비라는 아이에게 현이의 일을 맡긴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모든 것이, 미연의 꼬득임 때문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현이도 너와 떨어져 있다보면, 곧 너의 소중함을 알게 될 거야. 처음 하루 이틀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옆의 빈자리를 보며 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선우 너를 다시 봤을 때 현이의 반응은 어떻게 될까?“ ...선우는 생각해 봤다. 그리고 미연의 제안에 즉석으로 동의를 표했다. 곰곰이 따져본 결과, 귀여운 현이와 잠시 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좋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사실, 잠시 동안 현이와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선우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혀 미덥지 않지만, 안 재범이나, 박 민준이나, 또는 미연이 직접 부탁한 이 슬비가 현이의 옆에 있지 않은가. 거기에 현이는 얌전히 학교와 기숙사만 왔다갔다 할 텐데 무슨 일이 생기겠냐고 단정지었던 것이 실수였다. ...납치라니, 납치라니...! 아니, 그런 흉악하고 끔찍하고 사악한 짓을 저지르다니...! 밑의 녀석들을 굴리고, 이리저리 아는 곳들을 뒤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꼬리가 잡히지 않는 것을 보아서는 상대방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선우는 더욱더 현이가 잠시라도 외국에 나가줬으면 했다. 위험도 위험이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애시당초 기숙사에서 산다고 말했을 때부터, 아니, 명성에 간다고 말했을 때부터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선우는 이를 박박 갈면서 신경질적으로 서류에 사인을 했다. 불편해 보이는 선우의 심기에 전용 비서 3명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펜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여 연기를 들이마시며, 선우는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미연, 그 마녀에게 또 당한 것만 같다. 분명히 예상대로라면 현이는 자신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안겨오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본척 만척 멀뚱히 바라만 보는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열이 뻗쳐 민준과 재범을 상대로 분풀이를 했지만, 역시나 속이 풀리지 않는다. ...설마, 헤어져 있었던 기간이 너무 짧았던 건가?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가, 선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런 것보다, 지금 현이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선우는 우선 생각해봤다. 현이는 왜 명성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그렇게나 따르는 미연의 말에도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모습이 생각나, 선우는 피우던 장초를 손가락으로 분질러서 재떨이에 버렸다. “이 봐.” “...네?” 화들짝 놀라서 대답하는 비서를 향해 선우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17살 남자가 어떤 고등학교를 꼭 다니고 싶다고 고집부리는 이유는 뭘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건만, 선우의 질문에 긴장한 비서는 급히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요?” “...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선우의 모습에 얼굴이 창백해진 비서가 황급히 사죄를 하는 것을 무시한 채 선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말을 듣고 보니, 상당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나 얼빠지고 귀여운 녀석이니만큼, 어떤 못된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 여우를 어떻게 하지?! 현이를 꼬여낸 여자가 눈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분노하다가, 선우는 갑작스레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비서가 다리를 달달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우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바로 이거다. 차라리 지금 이 쯤에서 선우가 여자 하나를 선택해서 현이와 결혼을 시켜 집 안에 들여놓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고 잘 될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바보 녀석을 닮은 아이 얼굴도 꽤나 귀여울 것도 같아서, 선우는 또다시 살벌하게 웃었다. 현이 그 녀석이 어렸을 때도 키웠는데, 현이 아이쯤이야 또 못 키울 것도 없다. 당장 현이의 아기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선우는 구체적으로 육아 계획을 세우다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3명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흠흠, 요즘 바쁜가?” 물론 3명의 비서들은 바빴다. 그것도 아주 바빠서,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제대로 잠을 잔 날조차 기억에 희미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사실대로 말할 바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선우는 자신의 심복이나 마찬가지인 이 비서 3명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말이야...아주 긴급히, 엄밀하게 처리할 일이 하나 있거든?” ...그렇게 3명의 비서들은 팔자에도 없는 신부감 고르기의 일거리를 맡게 되었다. “모두들, 내가 시킨 것은 잘 했나?” 그로부터 며칠 후, 어느 늦은 밤, 선우는 3명의 비서를 모아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3명의 비서들은 자신 만만하게 선우의 앞에 섰다. 선우의 충복을 자처하는만큼, 선우의 동생인 윤 현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고 있었기에 이번 신부감 혼사에 전력을 기울인 비서들은 각자 봉투 하나씩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모든 일에 사려 깊고 정확한 뒤처리를 함으로써 선우의 총애를 받았던 김 비서가 먼저 봉투를 선우에게 건넸다. 선우는 봉투를 건네받고 신중하게 안에 들은 사진과 서류를 꺼내들었다. “흠...”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책상에 내려놓고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는 선우를 향해 김 비서가 침착하게 말했다. “k 음대를 수석 졸업한 재원으로써, 현재는 신부 수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행동, 외모, 지성, 그 모든 것이 흠잡을 것 없으며, 건강 또한 양호한...“ “김 비서.” “네, 넷!” 침중한 선우의 부름에, 김 비서는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 황급히 대답했다. “요즘 일이 한가한가 보지? 이런 장난이나 하고. 가서 조금 쉬다 오게.” “...네?” 선우는 망연히 바라보는 김 비서를 무시한 채 최 비서에게 손을 뻗었다. 최 비서, 그는 명석하고 기민한 일처리를 함으로써 선우의 신뢰를 얻었다. 관심없다는 듯 사진을 한 번 살펴본 후, 서류를 넘기던 선우의 손이 멈칫했다. 다시 한 번 사진을 바라보고,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적혀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왜 그러십니까?” “지금 이 건 뭐지?” 선우가 내민 서류에 붙여진 여인의 얼굴에 김 비서가 숨을 들이쉬었다. 최 비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선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여자가 현이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선우의 살벌한 말에도 굴하지 않고, 최 비서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가족 사항을 살펴 봐 주십시오.” “가족사항? 대체 무슨...” 언성을 높이던 선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 들었다. 최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는 대로, 서류의 여자 분의 집안은 대대로 단명하는 혈통입니다. 25세를 넘기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하죠. 여자 분의 용모나 다른 것들은 조금 모자르지만,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봤을 때 적격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 음침하게 터져나온 선우의 말에 최 비서는 몸을 뻣뻣이 긴장시켰다. “네!”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앞으로도 열심히 해 주게.” 선우의 칭찬을 들은 최 비서가 만족한 표정으로 한편에 물러섰다. 그 뒤를 이은 박 비서가 선우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서류를 꺼내던 선우의 손길이 한 순간 멈췄다. “...이건...!” 선우의 감탄사에 박 비서가 안경을 한 손으로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네, 용모, 지력, 성품,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선정한 난자들의 목록입니다. 아무 것이나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박 비서.” 선우의 부름에 박 비서는 어깨를 똑바로 폈다. “네!” “비서가 되기에는 아까운 인재로군. 조만간 적당한 자리를 내어서 연락을 주지.” 헛기침을 하며, 박 비서의 서류를 챙겨서 나가는 선우의 뒷 모습을 다른 비서들은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서들,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깨닫다.- -57- 오늘도 나도 모르게 재범을 피해 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긴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더니 민준 녀석이 능글맞게 웃으며 서 있었다. “...난 집에 갈 거야.” 단호하게 말하자,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런데 잠시 동안만 시간 내 줄 수 없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답지 않게 간절히 말하는 모습에 잠시 동안 망설이는데, 민준이 평소처럼 뺀질거리며 말한다. “이렇게 서 있다가, 안 재범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너 지금, 그 녀석 피하고 있는 중 아니었냐?“ ...얄미운 녀석, 하고 혀를 차면서도 나는 민준을 따라 걸어갔다. 그냥 복도에서 말해도 될 텐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하의 창고 앞에 가서 멈춰선다. 태연하게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민준의 모습에, 왠지 위화감이 들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민준을 따라 창고 안에 들어갔다. 지하이긴 하지만, 위 쪽에 작게나마 창문이 설치되어 있어 창고 안은 나름대로 밝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삐딱하게 물어보는데, 민준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글쎄.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를 상대로 하는 게 아니었어. 오늘은 너보다는 다른 녀석에게 말하고 싶었거든.“ “,...뭘?” 멀뚱한 얼굴로 되묻자, 민준이 나에게 다가온다. 유연하게 다가오는 걸음 걸이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분이 나쁘다. 아니, 이 상황이 무척이나 꺼림칙하다. “왜 그래?” 민준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평소와 확연하게 틀려서,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만, 이 창고를 나가야겠다고, 나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민준에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 네가 말하고 싶은 사람을 불러서 말해 봐. 나는 이만 간다.” 창고 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민준이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그래, 나도 그 사람을 불러서 말할 생각이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없으면 안 되거든.“ “...너...!” 고개를 돌려 민준을 노려보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복부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 타격음이 귓가에 울렸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무너져 내리는 내 위에서 민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냐? 나는 요즘, 하루하루가 재미있어서 미칠 지경이라는 걸.” 몽롱한 정신을 겨우 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욱신거리는 배의 통증이 머리까지 번진 모양인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내리눌렀다. “....뭐...!” 말을 하려는 내 입을 도중에 가로막고 거칠게 입술을 부딪혀온다. 얼굴을 내리누르듯이 가까이 다가온 민준을 밀치기 위해 팔을 움직여 봤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은 그런 내 약한 저항도 귀찮은 듯이 한 손으로 내 팔을 내리누르고 내 몸에 체중을 더 많이 지탱해왔다. 이제는, 정말로 이 녀석이 입을 맞춰서라기보다는, 숨이 막혀서 죽을 지경이다. 무엇보다 민준의 몸무게가 장난 아니게 나를 내리누르고 있다. 겨우 민준이 떨어져 나가 숨만 헐떡이고 있는데, 민준이 한 곳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냐, 안 재범. 볼 것 다 봤으면, 이만 사라져 주지 않겠어?“ ...뭐? 지금 뭐라고? 겨우 힘을 내서 민준이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내 위에 있던 민준이 타격음과 함께 저 만치로 날라간다. 눈을 크게 뜨고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민준은 재범과 같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싸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생각만 하고 앉아 있을 만한 것이 아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소리칠 기력도 없거니와 어지간히 소리를 쳐서는, 저 두 녀석이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다. 바로 옆에 농구 공을 담아둔 바구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한 대로 농구 공을 집어 들어 두 녀석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그닥 세게 던지지 못했던 터라, 두 녀석은 농구 공이 날아오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싸움에만 열중해 있었다. 그 모습에 그만 열이 뻗쳐 몸을 일으키다가 바구니채 넘어져버렸다. 우당탕 하는 커다란 소리에 그제서야 두 녀석이 싸움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굴러서 그런지 더욱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서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단정히 교복을 입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 새 교복 셔츠의 단추가 중간까지 풀어져 있다. ...민준 이 자식, 이렇게 해 놓으면 셔츠가 구겨지잖아~! 얼굴을 구기고 민준을 노려보는데, 민준은 내 표정에 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배실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든다. ...손모가지를 분질러 놓고 싶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의 해충인 저 녀석을 없앨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재범이 나에게 큰 보폭으로 걸어오더니 내 앞에 우뚝 선다. 순간 깜짝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동안 이 녀석을 피해다닌 전적도 있고 해서 내 시선은 어느새 재범의 눈을 피해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돌아간 시선에 민준이 살금살금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 이제와서 도망치겠다는 건가. 얄미운 민준 녀석을 소리쳐 부르기에는 나를 열심히 노려보고 있는 재범이 상당히 신경쓰인다. 먼저 꺼낼 말이 없어서 입을 꾸욱 다물고 있으려니, 재범이 삐딱하게 말했다. “...이게 네가 하고 싶은 말이냐?”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저 녀석은. “...뭐?” 의문사를 가득 붙여 대답해 줬지만 재범은 내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대로, 몸을 비스듬히 하고 나를 노려보는 폼이 심상치 않다. “왜 이제 와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나를 피해다니면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나를 박 민준, 그 녀석 대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안 재범 이 녀석이 박 민준과 싸우더니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이 아닐까? 횡설수설, 문맥이 맞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을 들은 것만 같다.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나에게, 재범이 서글픈 눈동자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던 것은... 절대로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물러선 순간, 나 역시 실수했다, 라고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반주로 해서 되뇌이고 있었으니까. 재범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 것만 같던 표정도 곧 이어 차갑게 가라앉아 재범의 반들거리는 눈동자는 아무 것도 투영하지 않았다. “...됐어. 이제. 이제는 나에게 신경쓰지 마. 나 역시...너를... ...잊을 테니까.“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하고는 제 멋대로 뛰쳐 나간다. ...잡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재범을 잡았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떨리는 내 몸은 재범의 말을 되풀이하기에 바빴다. ...지금, 재범이 뭐라고 한 걸까. 단순한 안녕, 이라는 인사말을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운 없이 웃었다. 한 켠에 내팽개쳐져 있는 가방을 집어 들고, 힘 없이 나오다가, 갑작스레 든 생각에 걸음을 빨리했다. ...아직 재범이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조금만 더 빨리 걸으면, 아니 뛰어가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재범이를 잡아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봐야지. 화도 내면서, 앞으로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잘가, 내일 또 봐, 라고 인사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학교 현관문 앞에서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교실에 있다거나 한 건 아닐까. 교실로 뛰어 올라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재범이 이 녀석이 덩치가 크다지만, 혹시 교실 어딘가에 앉아 있는데, 오늘따라 내가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실 안으로 들어가 여기 저기, 하다 못해 교탁 밑까지 살폈는데도, 재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청소 도구함을 마지막으로 열어보고 나서야, 나는 재범이가 이미 내가 갈 수 없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려, 나는 주위의 의자를 빼서 걸터앉았다. 얼핏 본 창 밖에서는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 상황도 그런 내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일까? ...그냥, 그 비디오와 책에서 본 것처럼 해 줬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온 몸을 가득 채우는 허탈감만이 내 안에 존재했을 뿐이다. 어느새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아? 너 아직 집에 안 갔어?” ...김 민현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민현을 보고 평소처럼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고개를 창가에 고정시키고 외면하고 있는데, 그 사이 민현은 내 옆에 와서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해?” 끈질기게 뭍더니 갑자기 커다란 소리를 낸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지금 어때서? 그제서야 나는 멍한 눈으로 민현을 바라보았다. 민현은 아무 말도 없이 내 옆에 걸터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은, 어렸을 적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선우 형의 손이 아니었지만, 비슷하리만큼 닮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안 재범 때문이지?” 나직이 묻는 민현의 말에, 나는 몸을 비틀었다. “...무슨 말이야.” 목소리에 힘이 빠진 이유는, 민현의 눈이 태풍처럼 고요하면서도,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와. 안 재범은, 안 돼. 나는 너가 이런 표정을 짓지 않도록, 네가 웃을 수 있도록 해 줄 자신이 있어.” 민현은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평생토록 너만을 바라볼 거다. 언제나 너를 생각하고, 너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겠어. 내 인생의 주인공은 오직 너뿐이니까. ” “...” ... 차마 그 뒷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 행동이 비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늦춰보고 싶다. 지금은 제발 말하지 말아 줘. “현아, 너를 사랑해.” 천천히 공기가 일그러졌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민현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진심이다. 아니, 훨씬 전부터,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민현은 진심이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말을 해야 하겠지. 되도록 잔인하게, 한 점의 기대도 남지 않도록. “나는 재범이를...” 민현의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재범이를 사랑해.” “...나로는 안 돼? 내가 그 녀석보다 더 너에게 잘해 줄 자신 있어. 내가 절대로 너를 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응? 제발 나에게도 기회를 줘.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 준다면, 그 동안 내 사랑을 증명해 보일게. 그러면 너도 마음이 변할지도 몰라.” 애타는 목소리로 말하는 민현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도 머리가 묻는다. 왜 그녀석일까. 왜? 하지만 심장은 언제나 그랬듯 그에 답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해도, 나를 왕처럼 떠받드는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아니 그 어떤 누구에게도 이렇게 반응하게 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민현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동자 끝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도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나에게는 없었다. “괜찮아.” 순간 민현이 나를 소중히 품에 끌어 안았다. “ 미안해, 모두 내 거짓말이야. 잠깐 농담한 거야. 그러니까 현아,” 오히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제발 울지 마.” 민현의 품에서 나는 그만 소리 죽여 흐느꼈다. -내 나이 17, 이별의 아픔을 알다.- -58- 멍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재범이는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았고, 나와 마주쳐도 시선을 피해버린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다가갔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피해버렸다. ...알 수가 없다. 가슴이 아프다. 욱씬거리는 아픔이 만성이 되어 가슴을 짓누른다. 그 아픔에 면역이 되어, 나는 미연 누나의 말을 들으면서도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재범이?” “그래. ...아니지, 현아? 너와 재범이가 사귄다는 것, 내가 잘못 들은 말이겠지?“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미연 누나를 잠시 동안 응시했다. 어서 미연 누나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응, 사실이 아니야. 재범이는 이제 나를 바라보지도 않는걸?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내 입속에서 하염없이 굴려지다가 결국은 속으로 삼켜져버렸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하게 미연 누나를 쳐다보는 내 모습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미연 누나가 상냥한 웃음을 지었다. “현아, 누나를 믿지? 재범이와 너는 사촌이고, 또 남자끼리 사귄다는 것은 안 되는 거야. 나중에, 누나가 예쁜 아가씨를 소개...“ “....왜?” 도중에 누나의 말을 끊고 차갑게 말하자, 누나의 미소가 일순 굳어졌다. 지금 이런 내 모습이 얼마나 버릇없는 것인지, 또 누나에게 얼마나 미안한 것인지, 알고 있지만 내 자신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말들을 하는 거야? 대체...왜?“ 따지듯이 말하고 있는 내 모습에 누나가 당황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만도 하다. 지금 내 말은 아무 맥락도 없이 나오는데로 지껄이는 것처럼 들릴테니까. “...사랑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는....안 되는 거야?” 건조하게 말하고, 나는 바닥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겠다. 지금, 나는 미연 누나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고 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미연 누나에게, 애정을 빌미로 가당치 않은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이런 말들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미연 누나가 아닌 재범이였다. 왜 너는 나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거지? 왜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납득하는 거야? 그런 것이 너의 감정이고, 너의 사랑이었던 거냐? ...만약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나도 그런 감정은 필요 없어..! “사랑 같은 것은 필요없는 거야.” 미연 누나의 차가운 말에 움찔하면서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나를 보며 생긋 웃음지었다. 그 모습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런 감정이 없어도, 사람들은 살아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려도, 사람들은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어. 현아, 그러니까... ...누나 말을 들어. 재범이와 같이 있어도, 너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어.“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미연 누나는 의자에 놓았던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소리 없이 방을 나서다가, 미연 누나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현아, 한국에 있는 것보다, 당분간 외국에서 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누나가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고 올게.” 우아하게 미소지으며 밖으로 나가는 미연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손끝이 따끔거리며 저려온다. 심장의 아픔에 면역이 된 것이 무색하게, 이상하게도 다른 곳이 아프기 시작한다. ...언제쯤이면 이 아픔이 가라앉을까? 언제쯤이면... ...이 아픔에도 익숙해질까? 옥상에 올라간 것은, 갑작스런 충동 때문이었다. 울상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기사 아저씨를 돌려 보내고, 옥상으로 올라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뜨거운 옥상 바닥에 누워 있자니, 머리 속까지 이글이글 익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어 버려서, 눈을 떴을 때에는 흑청색 밤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에 어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을 일으키기가 싫어 한참을 미적대고 있었다. 그 때 옥상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마음에 그 곳을 바라보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뚜걱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내 옆에서 멈춰섰다. “여기서 뭐 하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묻는 민준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온 거지?” 나 역시 평이한 어조로 민준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민준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야, 선우 형님이 어서 너를 찾아서 집까지 데려가라고 연락하셨거든. 놀고 싶으면 뒤처리를 깨끗이 하고 놀아라. 이게 뭐냐? 너 설마 나한테 앙심품고, 내가 선우 형한테 얻어 맞도록 수 쓰는 거 아니야?“ “..왜 여기에 온 거야?” “...방금 말 했잖아.” 의아한 듯 말하는 민준의 표정에, 두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맨 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찌푸등하니 저려온다. “...하지만, 너는 날 싫어하잖아?” 신문 기사를 읽듯이, 단조롭게 내뱉자, 민준이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품 속을 뒤져 담배를 입에 문다. 익숙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연기를 한 번 내뿜더니, 나를 보고 평소처럼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과는 달리, 민준의 눈동자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알고 있었냐?” 민준이 날씨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궁금했지. 왜 너는 나를 싫어하는 거지?“ 내 질문에 민준이 다시 한 번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민준이 입을 벌려 담배 연기를 내뿜자 뿌연 연기가 춤추듯이 공중에서 사그러진다. “나는, 여자가 좋다.” 민준은 갑작스럽게 말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골 빈 사내놈들은 남자는 위에, 여자는 아래에 서 있다고 지껄여대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여자야.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속이는 것에, 빼앗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지.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꾸미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냐? ...아주 오랜 옛날 화장은 단순한 치장용이 아닌, 권력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었어. 화장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는 도구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많건 적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 살아가. 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이야. 다른 이의 위에 서고 싶어하는 것,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왜 너를 싫어하냐고 물었냐, 윤 현?“ 민준이 비웃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건, 지금 이 상황이 빌어먹게도 너무 웃기기 때문이다. 서로를 속고 속이고,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네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선한 미소를 짓는 것이 짜증나. 다른 사람들의 가면 쓴 모습만을 바라보고, 가면 뒤의 뒷 모습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 네 모습이 나는 싫은 거다. 애시당초 내 인생을 뒤틀었던 원인은 네가 아니야. 나도 그걸 잘 알지만...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기에는, 그 사람들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감한다. 그들이, 위에 서기 위해 잃어야만 했던 것들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는 투정 한 번 제대로 부리지 못했지.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화가 나 있고, 이 상황이 너무나 짜증스러워. 이 풀 곳 없는 마음이 출구를 찾아 헤매이다가.... 너를 만났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잖아? ...너와 나는 언제나 서로에게 되묻기만을 하는군. 내가 너를 싫어하는 이유? 나야말로 너에게 묻겠다. ....왜 너는,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있지? 어떻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서, 깨끗한 듯 미소지을 수 있는 거냐?“ 살기를 미묘하게 감추고 나를 향해 차갑게 눈을 빛내는 민준의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이 녀석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말이 얼마 전에 들었던 양호 선생님의 이야기와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냐?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너는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는 거냐? 위에 서고, 지배하는 그런 것들이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들이라는 거냐?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민준이 갑자기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아까까지의 증오 섞인 눈빛이 모두 거짓이라는 듯,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바닥에 짓눌러서 껐다. “싫은 것과 증오하는 것은 달라. 그 차이를 알고 있냐?“ ”...글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서 대답하자, 민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 가벼운 행동이, 재미있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모두, 전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나에게 내 인생이 비틀릴 만한 말씀을 하시는 거야. 진지하게 명령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해가면서. 그 때부터 아버지가 더욱 더 싫어져서...나중에는 증오스러웠지.“ 민준이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어울리지 않게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지. 무엇이든 다 해주겠다고 결심했는데... 아버지에게 그 사람에 대한 일을 들켜버렸어. 아버지에게 억지로 끌려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어리게도 단식 투쟁을 벌였지. 그대로, 죽고만 싶었다.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생각만 해도, 그 사람에게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생각만 해도... 아니, 그 사람이 눈 앞에 없다는 그 현실만으로도, 충분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가 찾아와서 옛날 이야기를 들어주셨지. 아주 예전에... 아버지가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대. 너무나 사랑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지. ...그래, 무엇이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지.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이는...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어. 결국, 아버지는 일을 꾸며서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지.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짐의 슬픔에 잠겨서 아버지를 찾아올 거라고...그렇게 생각했다나 봐. 그럼 아버지는, 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그 사람을 평생토록 행복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고...그렇게 말씀하시더군. 아버지의 생각대로, 그들은 헤어졌고, 아버지의 친구는 슬픔에 빠졌지. 그런데...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을 감춰버렸어. 아버지는 사랑하는 이의 행방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었지만....끝까지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대.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했던 질문은 단 하나였어. ‘후회하십니까?’ ...무엇을 후회하냐고 물었는지는, 나도 솔직히 잘 몰라. 어머니와 결혼한 것을? ...아니면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을?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가 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아?“ “...뭐라고 하셨는데?” 민준을 바라보며 조용히 묻자, 민준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안 말해줘.” ...그럼 그렇지, 저 녀석이 순순히 말해 줄 리가 없다. 잘 나가다가 삐딱선을 타는 민준의 태도에 울컥해서 입을 다물자, 민준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어. 나에게는 나만이 길이 있어. 그러니까...그 어떤 것을 잃는다 해도, 나는 길의 끝까지 가 볼 생각이야. ....아까 네가 나에게 물었지? 왜 너를 싫어하냐고. ...한 때는 아버지를 싫어했었지. 그리고 그 후에는 아버지를 증오했었고. ....지금 나는 아버지를 싫어할 뿐, 미워하지 않아. 그 차이는 굉장한 거야. 알겠냐?“ 툭툭 바지를 털고 일어나는 민준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나를 싫어하냐?“ 내 말에 민준이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어. 내가 전에도 말했지 않았었나? 지금, 나는 방관하는 입장이야. 윤 현, 너의 세계는 아직 깨지지 않았고, 나는 너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 너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민준을 따라 나도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옥상을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터벅대며 걸으면서, 나는 곧게 펴진 민준의 등을 바라보았다. ...민준 녀석은 구제 불능의 사기꾼에 뺀질이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쓸만한 말을 하곤 한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나는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이상 그 끝을 볼 책임과 권리가 있다.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다는 현실에 절망해 쓰러지기에는,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너무나 길다. 그럴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내 나이 17, 내 앞에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다.- -59- 기사를 본 것은 아침 식사를 하기 전이었다. [성진 그룹, 뇌물 수수 혐의로 조사]라는 헤드 라인을 필두로 씌여진 기사는 투명한 수사를 촉구하면서, 기업의 오랜 행태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련님.”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고 있는 내 옆에서 해원 아저씨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나를 부른다. 신문을 단정히 접어 옆에 놓고, 식탁으로 가서 음식을 꼭꼭 씹어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옷차림을 점검한 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자, 해원 아저씨가 당황한 듯이 나를 바라본다. ...사실, 지금이라도 형이나 누나에게 전화를 해서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일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문의 기사는, 형들과 누나가 억눌러왔던 반대 세력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나는 태연한 척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일이 터진 것은 하교할 때였다. 집으로 가는 도로가 막혀 있어서 방향을 틀으려고 하는데, 앞 뒤로 시커먼 차들이 길을 가로막는다. 그와 동시에 김 기사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면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씀하셨다. “...도련님, 먼저 내려서 집에 돌아가십시오. 어서...!” 다급한 그 목소리에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그보다 더 빨리 차 주위를 한 떼의 사람들이 둘러쌌다. 검은 정장을 빼 입은 아저씨들의 험악한 기세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감이 왔다. ...역시 한 번 경험을 해 보니 이제는 알겠다. 이 것은 납치를 하려는 듯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렇게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성질 급한 아저씨들은 고민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차 유리창을 내리쳤다. ...정말 성질 급하군. 쯧쯧, 하면서 다시 한 번 유리창을 내리칠 준비를 하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주위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런 내 손짓에 유리창이 덜렁덜렁 움직인다. ...이 유리창, 다시 갈아끼워야겠군. 한숨을 내쉬며 차 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밀고 나오면서 아저씨에게 친절하게 말해줬다. “문 열려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건 아는 건지, 주위가 조용해진다. 그러기에, 미리 확인을 하고 행동을 했어야지. 그러다가, 아저씨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말씀하신다. “윤 현님, 맞으십니까? 저희를 따라와주셨으면 합니다.“ “...거부권이 있는 겁니까?” “오지 않으시겠다면, 강제로라도 데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애시당초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뭘 정중하게 말하고 그러시나. 쳇,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에 보았던 그 많은 행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검은 정장 아저씨들뿐, 이러다가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은 검은 정장 아저씨들밖에 없다고 믿게 될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정중히 차 문을 열어준다. 그 곳으로 걸어가려는데, 내가 탔던 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김 기사 아저씨가 나를 가로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잡아서 차에 집어 넣고, 그 앞에 버텨섰다. ...이보세요, 김 기사 아저씨?? 이 상황에서도 아저씨, 나이들으신 몸에 무리하시면 안 될텐데, 라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싫다. 어서 나가서 김 기사 아저씨를... ...내가 지금 뭘 하려고 생각했더라? ...그래, 아저씨... ...날라다니신다. 이럴 수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김 기사 아저씨가 운동을 하고 계시는 줄은 알고 있지도 못했다. 아주, 아주... ...화려한 돌려차기를 선보이며 검은 정장 아저씨들과 엎치락 뒤치락하는 김씨 아저씨를 물끄러미 보다가, 반대쪽 차문을 열고 달리기 시작했다. ...김씨 아저씨가 저렇게 싸우시는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잡히면 어떻게 될지는 말 그대로 신만이 아신다. 저번처럼 그런 일들을 당하는 것은 나도 질색이다. 검은 정장 아저씨들이 뒤늦게 내가 도망칠 사실을 눈치채고, 나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잡힐 수는 없다. 그 불굴의 의지로(실은 이상한 고집에 사로잡혀서) 죽어라고 달리는 나와 그 뒤를 쫓는 아저씨들. ...생각해 보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착각될 법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법도 하지 않은가? 어째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그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빠진다. ...그 와중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모습까지 보고 만 나... ...황당함을 못 이겨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뒤에서 쫓아오던 아저씨들도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신 듯 하다. 멈춰서서 움직이지 못하시는 걸 보면. 그렇게, 아저씨들과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여학생들... 이제는 옆에 다가와 각도 조절까지 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 ...왠지 갑자기 울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기 시작했다. 아저씨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 상황을 종결해야 하겠다고 결정하신 듯 했다. 나 역시 어서 이 일이 끝나서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아저씨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여학생들... ...아직도 집에 안 간 모양인지 핸드폰의 동영상 촬영을 시도하고 있다. ...무서운 여학생들, 그럴 시간에 경찰서에 전화라도 해 줄 것이지. 아저씨들도 여학생들의 모습에 움찔한 듯 걸음을 멈추신다. ...또다시 대치된 상황이 이어지는 건가, 싶었지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누군가로 인해 그 긴장감은 깨어져 버렸다. “...여기서 뭐하냐?” 능글거리며 웃는 민준의 모습에, 시선을 돌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살짝 일어난다. ...뭐, 그래도 이 녀석이라도 나타나 준게 어디야...라고 여기려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민준, 이 녀석이 있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암, 그렇고말고.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떻게 내가 이 곳에 있는 것인지 알고 온 걸까. 물끄러미 바라보자 민준이 뺀질거리며 거만하게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에, 나는 자체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말자, 라고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 민준과 내 모습을 검은 정장 아저씨들이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엇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검은 정장 아저씨들이 자신들의 기분나쁜 심사를 행동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다가와 어깨를 세게 잡아당기는 검은 정장 아저씨들의 행동에 멈칫해서, 순순히 당기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순간, 내 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누구지? 하면서 본 순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이 녀석이, 재범이가 여기에 있는 거지? 머릿 속에 가득찼던 의문은 민준이 의기양양하게 재범에게 말하는 것으로 인해 쉽게 풀렸다. “안 재범, 내 말이 맞지? 끝까지 안 믿고 버티더니...“ 쯧쯧, 거리는 민준의 모습을 조용히 외면하며, 나는 민준이 재범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들을 조용히 묻어 버렸다. ...그저, 이럴 때마다 민준은 원래 이상한 놈이었지, 라는 식의 말을 지껄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정말 처량하다. 재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사이, 주춤했던 검은 정장 아저씨들은 무언가 굉장한 결심을 굳힌 듯, 주위를 둘러쌌다. ...이 상황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 이라고 여길 것도 없이 곧바로 싸움판이 벌어졌다. 나를 한 쪽에 밀어넣고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인가 내 옆에는 핸드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여학생들이 서 있었다. 싸우는 모습에 무언가를 느낀 듯 여학생 한명이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제야 신고를 해 줄 생각인가 보다, 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여학생은 전화를 걸어서 누군가에게 빠르게 말했다. “맞아, 맞다니까~! 너도 어서 와 봐. 지금 우리 증거 사진까지 찍어 놨다구~!“ 아무래도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전화 상대가 경찰일 리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엄연히 핸드폰이 있으니, 굳이 다른 사람이 전화를 해 주기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재빨리 핸드폰을 열어 일단 경찰서에 전화를 하고 안심을 한 상태에서 앞을 바라본 순간,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검은 물체가 보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검은 물체는 정장을 입은 아저씨 중의 한 명이 되어 있었고, 내 앞에는 재범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무릎을 반쯤 굽히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의 색깔이 검붉은 빛을 띄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 뚝뚝 흘러내린다. 멈춰진 시야 너머로, 여학생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캔버스 위에 그려지듯이 쓱쓱 칠해졌다. ...당황한 얼굴로 사라지는 정장 아저씨들의 모습도,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는 민준의 모습도, 나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재범아...!”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사고를 거부했다. 정신이 아찔하다. 온 몸이 후끈거리며 뜨거운 불길이 전신을 내달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에, 구급차가 달려오고, 재범이를 싣고 떠나가버렸다. 굳어있는 눈동자에 구급차에 적힌 병원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찾아가야 해. 어서, 가서... 떨리는 심장이 진동조차 없다고 느껴질 때쯤, 나는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나를 잡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택시를 잡아 아까 봤던 병원의 이름을 불렀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는 택시 기사 아저씨를 닦달해서 병원에 도착한 후, 황급히 접수처로 달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직원에게 물었다. “방금 들어온 응급 환자 어떻게 됐습니까?” “...네? 무슨...” “칼에 찔려서 실려온 환자 말입니다.” “아, 그 환자요. 잠시만요.” 뭔가 아는 듯한 얼굴을 한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보며 다른 여직원과 소곤소곤거린다. 그러다가 굉장히 기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남자분 말씀이시죠? 지금 수술 들어갔는데요. 위치는...” ...수술이라...그렇게 상태가 위중했단 말인가? 아까 한껏 긴장해서 그런지, 지금 내 발걸음은 침착했다. ...태풍이 불고 있는 듯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있는 내 감정상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틀거리며 수술실 앞으로 가서, 나는 의자에 앉아 재범이 무사히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재범이 나온다면, 이번에야말로 이야기해주어야지. 아픈 몸으로는 나를 피해 다닐 수도 없을 테니, 꼭 붙잡고...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어, 그대로 고개를 젓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야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내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무사히, 예전처럼 그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 줘. 제발. -60- 수술이 끝난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에게는 이제까지의 생애보다 긴 것처럼 느껴졌던 초조하고 긴장된 순간이 끝이 났다. 나는 수술실을 나오는 의사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환자는 어떤가요? 수술은 성공한 겁니까?” 의사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아직까지는 후유증도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고요. 지금 마취 상태니, 깨어나면 곧 면회도 가능할 겁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의사를 잡고 있는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마취가 풀릴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앉아 있는데 간호사들이 옆에서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본다.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신경쓰이는 건가 싶어서 애써 무심한 얼굴로 병실 문을 힐끔거렸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다고 고개를 들자, 의사가 나를 내려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환자분이 깨어나시길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나에게 질문하는 의사를 멍하니 보다가, 겨우 이 의사가 아까 내가 질문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의 옆에서 간호사 한 명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저기요...환자분과는 어떤 사이세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간호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뒤늦게 생각에 잠겼다. ...재범이와 나는 어떤 사이일까? 사촌? 그것도 아니면...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다가, 결국 내가 내뱉은 말은 하나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더니...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어, 라는 외침이 저 쪽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설마, 또는 거짓말이겠지. 라는 식의 소리도 들린다. 그러던 와중에 엄청난 시선을 느끼고 어색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내 앞에서 나를 감싸듯이 둘러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를 보며 활짝 웃는다. 그리고 그 중 한 간호사가 내 손을 붙잡고 수줍게 말했다. “...힘 내세요. 저희는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요.” ...무언가 무섭다. 왜 등골이 오싹하는지 모르겠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별처럼 빛나던 눈빛이 형광등 수준으로 진화를 했다. 반짝반짝이 아닌, 번쩍번쩍거리는 눈들을 보자니, 내가 대단한 실수를 한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정말 감동적인 사랑이예요. 수술실에 들어간 연인을 기다리시는 그 모습이라니...!” ...그, 그런가?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아닌 아까의 의사 선생님이다. 의사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내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제가, 반드시 책임지고 연인분을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 준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의사가 책임지고 고쳐준다고 말하니 좋은 거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과 의사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파이팅까지 외쳐댄다. ...참 독특한 병원이다, 라고 나는 그 옆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재범이 깨어났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열려다가, 나는 손을 멈칫했다. 간사한 마음은 아까와는 다르게, 재범의 모습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픈 몸을 하고서도, 나를 내치면 어떻게 하지? 싸늘한 눈으로 나가라고 말하면...? 망설이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주위의 모습에,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문을 열었다. 병실 안에 미리 들어가 있던 의사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하, 다행히 연인분의 상태는 좋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퇴원해도 될 정도로요.“ 자랑스럽게 말하는 의사의 말을 들을 정신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병실 침대에 기대듯이 누워 있던 사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기, 누구세요?” 먼저 입을 연 것은 환자 측이었다. 마취가 덜 풀린 모양인지 끅끅대는 듯한 마른 목소리다. “네? 그야, 사랑하는 분, 환자 분의 연인 아니십니까?” “...저한테 연인이 있었다고요?” ...무척이나 놀라며 대답하는 환자의 모습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표정을 굳혔다. ...실상, 나는 지금 너무 놀라서 말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재범이 수술실에 들어가서 했던 것이 성형 수술이 아니었다면, 저렇게까지 모습이 변할 이유가 없다.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에, 약간 검은 빛을 띄는 얼굴, 그리고 흑갈색 눈동자를 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재범과는 인상착의가 심하게 다르다. ...고로 내 앞에 있는 저 환자는 재범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라는 이성적인 판단이 내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몸을 돌려 나가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다. 굳어 있는 내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간호사 한 명이 환자를 잡고 소리쳤다. “아무리 환자라고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시는 분을 몰라보실 수가 있으세요?!” ...만약 저 환자가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눈 앞의 환자를 중증의 환자라고 불러줄 충분한 용의가 있다. 하지만 환자는 간호사의 말에 대단한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풀린 눈으로 이런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억 상실증인가 봐요, 저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아니 이런...!” 호들갑을 떨며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간호사 한 명이 내 옆으로 다가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기억상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이 정도는 충분히 극복하실 거예요, 저희도 적극 도와드릴게요~!“ ...실은 저도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라고 말할 새도 없이, 의사는 정밀 검사를 하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 쳤다, 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무엇보다 간호사들에게 밀려 병실을 나가기 전, 나를 바라보며 “꼭 기억해 낼 테니 기다려 줘요~!” 라고 열렬히 외치던 환자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병원 현관문 앞에까지 멍한 정신으로 걷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를 뒤져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의 화면에 떠 있는 부재중 전화 42건... ...생소한 전화 번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어떤 남자의 노랫 소리가 들리더니, 핸드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벼락같이 터져 나왔다. “윤 현~!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너 때문에 사람이 다쳤으면 예의상으로라도 와 봐야 할 것 아니야?! 지금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해?“ ...이 녀석의 말 중 녀석의 진심이 담긴 말은 제일 마지막 말 뿐일 거다. 나는 민준의 고함 소리에 잠시 동안 귀를 막았다가,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댔다. “...재범이가 실려간 병원, 어디야?” “...응? 그야...XX병원인데... 그런데, 넌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 기다리고 있었다, 왜? “...묻지 마.” 허탈하게 말하고 핸드폰을 그대로 닫아 버렸다. ...살짝 올려다 본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겨우 도착한 병원은 나름대로 크고 깔끔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병원...다시 한 번 아까의 청년이 떠오른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청년의 기억을 되찾아 준다면서 과도한 충격요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나를 발견한 민준이 헐레 벌떡 뛰어왔다. “...너 꼴이 이게 뭐냐?” “...왜?” 기운 없이 대꾸하자, 나를 아래 위로 흩어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어디서 며칠 밤새고 온 사람 같잖아? 왜 이렇게 세상 만사 초월한 얼굴을 하고 있냐?“ ...그럴 일이 좀 있단다, 애야. 한숨을 푸욱 내쉬고, 민준에게 재범이 어디 있는지, 몸은 괜찮은지 등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재범이가 괜찮다는 말도 들었고, 또 어디 있는지도 들었겠다, 한숨을 내쉬고 병원 대기실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안 찾아가냐?” 그런 내 옆에 앉아서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민준 녀석. ...나도 원래대로라면 찾아갔을 텐데 말이지... ...지금은 앞서 기운을 모두 쓴 탓인지,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움직이기도 싫다.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자 그런 내 옆에서 민준이 매정한 녀석, 이라는 식으로 투덜거린다. ...그런 녀석이 무척이나 시끄럽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말 하는 것도 귀찮다. 한숨을 내쉬며 기운없이 팔을 쭉 펴서 몸을 풀자, 옆에서 민준이 당황한 듯이 나를 바라본다. “...너 괜찮냐?” ...그럼 괜찮지 않은 것처럼 보이냐? 라는 의문이 담긴 눈길로 민준을 바라봐주고 나서, 나는 민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난 아무래도 집에 가서 자고 와야겠다.” “...뭐?” 황당한 얼굴로 민준이 나를 바라보건 말건 지금 내 상태가 너무 안 좋다.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그래도 재범이 몸이 괜찮다니, 다행이다. 하품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택시를 잡아 타고 곧바로 집에 돌아오자 해원 아저씨가 멀리서부터 뛰어와 내 옆에서 계속해서 뭐라고 말을 하신다. 나는 피곤한 마음에 해원 아저씨에게 고개만 까닥하고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일단은 자자. 그것이 먼저다. -61- 눈을 떴을 때, 무의식적으로 한 일은, 시계를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힐끔 바라본 시계는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방 안은 깜깜했다. 하품을 하고 일어나서 욕실로 가서 몸을 씻자,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아까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내 동작은 점점 더 바빠졌다. 옷을 차려 입고,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해원 아저씨가 나타난다. “현 도련님, 미연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누나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던 발이 멈칫한다. 고개를 돌려 해원 아저씨를 바라보자, 난처한 듯 웃으시는 모습이 묘하게 강압적이다. ...그러고 보니, 누나에게는 할 말이 있었다. 아저씨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얼굴로 앞장서서 걸어가신다. 서재의 문을 열자, 창문 쪽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누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현아, 표정이 왜 그러니?”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는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볼을 쓰다듬는다. “현이도, 누나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단다. 영국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두었으니, 언제라도 출국할 수 있도록 준비 해 놨어. 현이, 너는 언제든지 몸만 가면 되는 거야.“ “...누나.” “왜, 싫어? 현아, 어렸을 때 외국에 나가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란다. 우리들도 시간 내서 너를 보러 갈 테니까, 그 곳에서 푹 쉬다 오면...“ 나를 타이르듯이 말하는 미연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누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응?” 내 태도에 누나의 웃음이 조금 굳어졌다. “...신 지웅이라는 사람, 알고 있어?” 순간 누나의 팔이 내 몸에서 떨어졌다. 누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누나.” “...그런 이름을 들은 것도 같지만... 현이, 너도 알다시피 누나는 바빠서 오래 전 일까지 모두 기억하지는 못해.” 누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누나의 얼굴은 예전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그럼, 현아. 누나는 이만 가 볼게. 학교에는 누나가 수속을 끝마쳐놨으니까, 이제 나가지 않아도 된단다. 그럼 잘 있어.” “...나는 가지 않아.” 눈을 똑바로 뜨고 누나를 바라보았다. “...뭐?” “나는 이 곳에 남을 거야. 나중에 외국에 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가고 싶지 않아.” “이건, 네가 가고 싶고 말고로 판단한 문제가 아니야, 현아. 누나를 믿지? 누나 말대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누나를 믿어. 하지만, 나는 가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어.” 순간 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재범이 때문이니?” “...재범이 때문만이 아니야.” “그럼? 현아, 어째서 누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거니? 남자들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 현이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뿐이야. 누나가 시키는 대로 하면...“ “...어째서 그렇게 부정해?” “...뭐?” 당황한 듯 되묻는 누나를 쳐다볼 자신이 없어, 나는 바닥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누나는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 나도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머리가 있다는 것을...왜 알려고 하지 않아?“ “...현아, 누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제발...알아줘.” ...텅 빈 가슴으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내 쪽으로 걸어오는 또각대는 누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너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야. 현아. 재범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때로는 소중한 상대 옆에서 떠나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일 수도 있단다, 현아. 그럼 곧 떠날 수 있도록 주위를 정리하고 있거라.“ 문을 닫고 나가는 누나를 따라 뛰쳐나갔지만, 누나는 잰 걸음을 옮기며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문 앞에 서 있던 해원 아저씨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가로막았다. “...도련님, 신 지웅이란 이름은...그런 이야기들은 대체...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내 나이 17, 가족에게 반항을 시작하다.- “그건...저도 잘 모릅니다.” 해원 아저씨는 눈길을 돌리며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알려주신다면, 저도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하겠습니다.” “...도련님...! 어째서 이런 것을 알려고 하시는 겁니까?“ 해원 아저씨는 나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때론, 세상에는 알지 못하는 게 더 나은 일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 일도...종종 존재한답니다. 알지 못하셨을 때도 괜찮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과거의 존재를 알아버렸어요. 일단 알아버린 이상, 도중에 아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말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멋대로 오해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말해주세요.“ 내 단호한 말에 해원 아저씨는 침중히 눈을 감았다. 그 고뇌어린 얼굴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득 든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말을 취소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해원 아저씨는 마음을 결정하신 듯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저도,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그 분과 미연 아가씨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양쪽 집안에서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했고, 그로 인해 상심하신 남자분께서 자살을 하셨다고...그렇게 들었습니다.“ 입을 꽉 다물고, 나를 바라보는 해원 아저씨의 말에도 나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저 정도는 이제까지 알아낸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숨겨진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이제 도련님께서 말해주실 차례입니다. 이런 일들을 말해 주신 분은 대체 누구...” 해원 아저씨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자, 핸드폰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핸드폰을 받으려는 순간 갑자기 벨 소리가 끊어졌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민준 녀석이 나에게 전화를 했을 때도 모르는 번호가 뜬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이것은 민준 녀석의 번호인가? 그렇다면 그 녀석이 나에게 전화할 이유는... ...지금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친 듯이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내 등뒤에서 해원 아저씨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미적거릴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지나, 허겁지겁 택시를 집어 타고 병원으로 갔다. 몇 계단씩 한 번에 오르며 뛰어가던 나는, 재범이 있다는 병실 문 앞에 가서야, 무릎을 휘청거리며 멈춰섰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던 재범이 나를 돌아본다. ....다행이다. 재범은 무사했구나.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에 기대 서 있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그 곳에 서 있을 거냐. 들어와.” 무언가, 굉장히 쑥쓰러움을 타는 듯한 말투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재범의 말대로 문을 닫고 그 옆에 다가가니, 재범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제 이야기 할 마음이 생긴 거냐.” 농담처럼 말을 건네자, 그제서야 눈을 돌린다. “...이제 고민하는 것도 지쳤다. 네 마음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 것도... ...나는, 네가 무서워.“ 심각하게 말하는 재범에게 귀를 기울이고 진지하게 서 있다가, 나는 혼란 상태에 접어 들었다. ...내가 무섭다고? 아니, 대체 왜? 막말로 내가 재범을 때리거나 괴롭힌 적도 없는데, 대체...? “네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휘둘려지는 내 모습이 두렵다. 전전긍긍하면서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조차 질투하는 내가...너무 추하고 한심해.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너를 찾아 다니는 내 모습이 끔찍하다. ...이런 나를 네가 좋아할 리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재범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재범은, 우울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너를 놓아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도 생각했다. 네가 박 민준, 그 녀석을 좋아한다면...내가 괴로워도 네 행복을 위해서 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도저히 안 돼.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나는....“ 재범의 시선은 어느 순간 나를 향해 똑바로 꽂혀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것이 내 행동의 변명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널 놓치고 싶지 않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 입술을 혀로 축여봐도, 여전히 가슴속에 맺힌 말들이 터져나오지 않는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내가 이 녀석을 붙잡고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재범은 내 앞에서 연인이 되지 않겠다면 사귀었던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할 거라는 둥, 앞으로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키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 댔다. ...재범이 너무 흥분해서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머리를 후려쳐 줬는데,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나 역시 너무 흥분해서 힘을 더 줘 버린 것만 같다. 말을 멈추고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재범의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요즈음, 이렇게 큰 소리로 웃었던 적이 없었을 만큼, 왠지 너무나 즐거웠다. ...긴장이 풀리니,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이 떠오른다. ...그래, 나는 재범에게 할 말이 무척 많았다. -내 나이 17세, 사랑 싸움이라는 말에 웃음짓다.- -62- 부제 : 소녀와 까마귀. 한 소녀가 있었다. 오만하고 냉정한...그래서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는 소녀였다. 어떤 것에도 집착을 가지지 않았기에,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조차 소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할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손을 떼라고, 소녀는 그렇게 배웠다. 이제 와서 하찮은 감정 놀음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소녀는 부모의 옛날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무심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어느 늦은 밤 짐을 꾸리며 숨죽여 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도, 소녀는 언제나 늘 그랬듯이 태연했다. “...미안하다.”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의 작은 손을 잡고 힘겹게 사과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하며, 소녀의 어머니는 눈물 젖은 눈동자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부탁한다, 미연아.” 무엇을 부탁하는지,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소녀 또한 어머니에게 정확한 주체를 물어보지 않았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의 손을 놓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 후 집을 떠나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에게는 오빠와 동생 둘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동생은 이미 머리가 제법 굵어져서 소녀의 말도 잘 듣지 않는 말썽장이였고, 나머지 동생 한 명은 제대로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였다. 소녀는, 제일 작은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달라진 집 안의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웅얼대고 있는 동생은 너무 작고 여려서, 소녀는 문득 이 작은 동생에 대한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약한 존재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고, 소녀는 자신의 막내를 바라보았다. 눈물짓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 어린 존재를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내던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그것은, 가족들 앞에서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문득, 소녀는 이 어린 동생을 없애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스스로의 이해하지 못할 감정에 의아해하며, 소녀는 몸을 돌렸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아, 그나마 한가하게 쉴 수 있는 날이다. 후계 수업이다, 뭐다 해서 바빴던 나날 중에 생긴 휴일이었다. 소녀는 느긋하게 걸음을 걷다가 한 곳을 바라보고 걸음을 멈췄다. 까만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작은 꼬마가 베란다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놀고 있었다.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해원 아가씨의 모습에도 아랑곳 없이 꼬마는 자신만의 놀이에 열중한 듯 보였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소녀의 막내 동생이다. 예전 모습과는 달리, 아기는 쑥쑥 커나가서 벌써 소녀의 무릎에 오는 꼬마가 되었다. 막내의 옆에 선우가 없는 것을 보니, 급한 볼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사람이 달라진 듯 저 막내를 애지중지 하다 못해 옆에 끼고 사는 선우의 지난 행동이 떠오르자, 소녀는 선뜻 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졌다. 사실, 소녀가 막내를 선우에게 맡길 때에는, 골치아픈 짐덩이들을 묶어서 관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선우가 소녀 대신 막내를 없애줬으면, 하고 내심 바랬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막내는 윤씨 일가의 한 사람이다. 소녀가 관리해야 할. 소녀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막내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모습에 해원 아저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소녀는 해원 아저씨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꼬마의 옆에 앉았다. 꼬마는, 소녀가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에 열중해 있었다. 소녀는 꼬마를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꼬마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소녀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짓고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는 거니?” 그제서야 꼬마가 소녀를 바라보았다. 꼬마가 소녀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짓고는 덥썩 안긴다. 소녀는 조금 곤혹스러워져, 몸을 약간 움츠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꼬마는 아무 것도 알아채지 못한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소녀의 막내는, 소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소녀를 보면 좋아 죽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맞이한다. 정작 꼬마를 가장 아끼고 있는 선우에게는 입을 비죽대면서. 소녀는 그런 꼬마가 거북하고 싫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만큼 미숙하지는 않다. 익숙한 미소를 얼굴에 걸치고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자 꼬마는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남매의 다정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옆에 서 있던 해원 아저씨는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잠시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었던 소녀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품에 안긴 꼬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꼬마는 소녀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나. 이야기 해줘.” 오히려 잘 굴러가지 않는 혀로 자신의 의사를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아무거나.”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말하는 꼬마의 천진한 모습에, 소녀는 갑작스레 살의가 일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는 그 감정을 지그시 억누르며 소녀는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까마귀 이야기를 해 줄까.” “까마귀?” “그래. 옛날 옛적 숲에 사는 모든 새들이 모여 왕을 정하기로 했대. 가장 아름다운 새를 왕으로 삼기로 하고, 새들은 모두 냇가에 가서 깃털을 아름답게 꾸몄지. 그런데 온 몸이 새까만 까마귀도 새의 왕이 되고 싶어져서 궁리 끝에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어. 물가를 오가던 까마귀는 새들이 떨어뜨린 깃털을 주워서 치장하고 새의 왕을 뽑는 자리에 나갔지. 새들은 까마귀의 모습에 감탄 했고, 투표 결과 까마귀는 새의 왕으로 뽑히게 되었어. 왕이 된 까마귀는 거만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다가, 몸에 치장한 깃털을 떨어뜨렸고 결국 모든 사실이 들통나 까마귀는 다시는 숲속에 나타날 수가 없었대.“ 이야기를 마치자 꼬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녀는 말 없이 꼬마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이야기 속의 까마귀를 동정하지 않았다. 까마귀는 소녀의 또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필사적으로 자신을 꾸미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숲 속에서조차 쫓겨나고 마는 까마귀. 열심히 지식을 익히고, 필사적으로 성과를 이루어내도, 결국은 그 뿐이었다. 소녀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까마귀처럼 버림받고 말겠지. 소녀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차갑게 웃었다. 아버지, 그가 아끼는 이 아이가 없어지면, 그는 어떻게 될까? 소녀는 갑작스레 궁금증이 일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이대로 꼬마를 밀어버리면... 소녀의 손이 살며시 꼬마의 등에 닿았다. 그 때 꼬마가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까마귀, 정말 예쁘겠다.” “...뭐?” 움찔한 기색을 능숙하게 감추며, 소녀는 꼬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우음... 까마귀...정말 예쁠 것 같아. 까마귀는 숲의 왕이 될 정도로 멋있어. 그러니까, 숲 속을 나가서도, 까마귀는 괜찮을 거야. 그렇지?“ 짤막짤막하게 말하며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고 있는 꼬마를 소녀는 말 없이 바라보았다. 소녀의 모습에 꼬마는 답답한지 가슴을 탕탕 쳐 대며 소녀의 품에서 내려서서 날개짓하는 시늉까지 해 댔다. “이렇게... 까마귀는 숲 밖에 나가서도 날아다닐 거야. 그렇지?“ “...이 이야기는 까마귀의 허영심을 탓하는 거야. 그렇게 쓸데 없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왜? 다른 새들도 까마귀를 예쁘다고 했잖아?“ “하지만 까마귀가 치장한 것은 까마귀의 깃털이 아니었잖아...!” 거세게 튀어나온 소녀의 목소리에 꼬마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아냐. 다른 새들은 깃털을 버린 거잖아. 버려진 것을 가져다가 사용한 까마귀는 똑똑한 거야.” 꼬마의 고집 센 목소리에 소녀는 다소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 어린 아이를 데리고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까까지 들끓던 마음은 이제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녀는 처음 보는 아이를 보듯이 꼬마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까마귀는...원래 모습도 충분히 예쁠 거야.” “...어째서? 까마귀는 까만 깃털만을 가진 못생긴 새야.” “아냐. 새까만 새가 하늘을 날면... 굉장히 멋있을 거야.” “.....그러니까...” 소녀의 눈과 꼬마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한점의 티끌도 없이 맑고 깨끗한 꼬마의 눈에 소녀는 문득 매혹되었다. “...누나?” 꼬마는 소녀의 다리에 매달리며 불안한 듯 소녀를 불렀다. “...네 이름이 뭐지?” 소녀의 질문에 꼬마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현이. 윤 현.” “...그래. 현이였구나.” 소녀는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이 작은 꼬마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누나?” 까만 눈동자로 바라보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너도... 내 동생이었구나.” 꼬마는 소녀의 중얼거림을 알아 듣지 못하고 소녀의 다리에 매달려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소녀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부탁한다.- 그 말을 기억한다. 지금, 소녀는 어머니가 소녀에게 무엇을 말했던 것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꼬마를 찾아 거칠게 달려와서 꼬마를 안아드는 또 다른 동생을 바라보며 소녀는 처음으로 웃어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까마귀는 숲 속을 벗어나 하늘을 난다. 한 때는 일순간이나마 숲의 왕이었었고, 그리고 숲을 벗어난 후에는 하늘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던 새가 있다. 새들은 까마귀의 허영심을 비웃은 대가로 까마귀의 지혜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록, 그 결과로 까마귀가 혼자 남게 되었다 하더라도... ...까마귀의 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아이가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까마귀는 삶의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63- 안 잔다고 버티는 재범을 자리에 눕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해원 아저씨가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원 아저씨에게 해 드릴 말이 있었구나. 그렇지만 해원 아저씨가 나에게 꺼낸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외갓집에 찾아가셨던 겁니까?”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시는 해원 아저씨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원 아저씨가 거세게 내 어깨를 잡아 왔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해원 아저씨의 외침이 갑자기 잦아들었다. 실수했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해원 아저씨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그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나와 선을 긋는 듯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해원 아저씨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해원 아저씨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지독하게 지친, 쉰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이 일은 회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무슨 말을 들었든지간에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뚜벅뚜벅 걸어가는 해원 아저씨의 뒷 모습을 나는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재범이는 복부를 칼에 찔렸지만, 그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내장 또한 다치지 않았기에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재범, 이 녀석은 환자라는 것을 빌미로 나에게 마음대로 어리광을 부려댔다. 뭐, 나야 그 모습이 나름대로 귀여워 팔불출처럼 허허 웃으며 다 받아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재범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엉겨붙더니 겨우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 꽃병의 물이라도 갈아 올 생각으로 나는 화병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화장실에 도착해 세면대의 물을 틀어 놓는데, 전화 벨 소리가 울린다. 머쓱해져서 물을 잠그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는 내가 모르는 번호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민준인가, 하는 생각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경쾌하게 말을 띄우자,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 현, 맞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여자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 지민이야. 저번에 전화했다가 그냥 끊어서 미안. 너에게...할말이 있어.“ ...지민 누나? 재빠르게 핸드폰을 고쳐 잡고 화장실 한 편에 엉거주춤 앉았다. “안녕하세요. 누나.” “옆에 누구 있니? 있으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줄래?” “...아무도 없는데요.” 긴말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착실히 대답하자, 누나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우선 미안하다고 말할게. 나 때문에 힘들었지?“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되물었다. “저번에 내가 너를 납치한 것 때문에...네가 약하다고 인식이 되어서 사람들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틈을 보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 때문에 경력에 흠집을 내서 미안.“ “...괜찮아요.” 그럼, 이번의 습격도 비슷한 맥락의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말하자 지민 누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그 후로, 나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알아봤어. 알고 있니? 네 누나, 윤 미연이 오빠와 사귀고 있을 당시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을.“ “...아...!” 생각났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천호 선배님이셨다. 분명히 선배님은 미연 누나를 질투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말을... “그 때, 윤 미연에게 협박의 재료로 사용했었던 것이 오빠였어. 오빠를 조건으로 윤 미연이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었는데...윤 미연은 계약을 성사시켰고, 오빠는 죽었지.“ “...무슨...” “윤 미연을 원망하지는 않아. 그 여자도 그 일로 그만큼 무언가를 잃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그 여자를 해치면, 너 역시 나에게 똑같이 하겠지?“ 핸드폰 너머로 씁쓸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자살로 꾸며서 오빠를 죽였던 사람들은 용서 못해. 그 사람들에게 가기 전에, 너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하는 거야.“ “...누나?” “알고 보니, 너희 집안도 비정하더군. 윤 선우도 그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던데? 윤 선우를 사랑하는 여자를 붙잡고 협박을 했지만, 윤 선우는 끝까지 오지 않았고, 결국 그 여자는 정신이 나가 버렸다지? ...윤 선우가 일본에서 데리고 돌아와 애지중지했던 여자였다고 들었는데... 그래, 이름이 아마 유키...“ 커다란 손 안에 쥐어진 핸드폰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앞에 멈춰 선 아저씨들이 나를 향해 정중히 말한다. “윤 미연님의 명령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어서 따라오시지요.”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그들은 나를 둘러쌌다. 도착한 곳은, 시내 어느 곳에 숨겨져 있었는지 모를 커다란 건물이었다. 가장 위층에 올라가자, 복도를 걸어 제일 끝의 화려한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기를 기다린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넓따란 방 안에 미연 누나가 서 있었다. “자리에 앉거라, 현아.” 미연 누나의 말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미연 누나가 창가 쪽으로 차분히 걸어갔다. 밖에서 화려하게 점점히 밝혀져 있는 불빛의 행렬들을 보면서 미연 누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배터리가 다해 정지해 버린 인형처럼. “...선우 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 “...” 나는 미연 누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붙잡고 협박을 할 때 내팽개쳤다는 것들이 모두..!“ “...말했잖니? 그런 건 쓸데없는 감정일 뿐이야. 약점이 되기만 하는. 알고 있니? 현아, 아래에 있는 이들이 위의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야. 위의 사람이 같은 위쪽의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는 거지. 그리고, 사랑같은 감정은 위에서 밀어 떨어뜨릴 좋은 계기가 되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래. 그러니까 현아, 너도 이제는 고집을 꺾고 누나 말을 들으렴. 재범이와는 나중에 좋은 사촌 사이로 지낼 수 있을 거야.“ “...싫어.” 단호히 말하자, 누나가 다시 한 번 말한다. “...그런 감정은 너를 망칠 뿐이야. 누나가 말했잖니? 약속해 줄 수도 있어. 나중에 누나가 좋은 여자를 너에게 소개시켜 주면...“ “싫어.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재범이가 내 사촌이라던가, 둘 다 남자라던가 하는 사실에 내가 연연할 것 같아?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극복해 낼 수 있어.“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야.” 단호한 누나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범이와 나는 나중에라도 좋은 사촌 사이가 될 수 없어. ....우리는 이미 연인이 되었으니까. “ “...너는 아직 어려.” “언제까지 그렇게 말할 셈이야? 모든 것을 감추면, 내가 모를 것 같아? 선우 형의 일도, 누나의 일도, 모두 다 알고 있어. 외갓집도...!“ 흥분해서 말하다가, 나는 누나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모든 것을...?” “...그래.” 허세를 부리듯 대답하자, 비웃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기억하고 있니? 현아, 너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는 아이였지. ” 쿡 하고 웃으면서 말을 꺼내는 미연 누나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위화감이 느껴진다. “나는 달랐단다. 언제나 다른 이를 의심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 그래서 늘 이상했어. 어째서 아버지가 우리 셋을 바라보시지 않는 건지.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너에게만은 헌신적이신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 독하고 냉정하게 우리들을 다루시면서도 너만은 도자기를 다루듯 소중히 하셨다. 네가 어리기 때문에, 라는 이유를 붙여도 봤지만 나는 그런 어설픈 변명을 믿을 수 없었단다. 우리들에게는 지어지지 않던 미소가 언제나 너에게만은 아낌없이 베풀어졌지. 비뚤어진 어린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원인을 캐내기 시작했어. 그래서 나는 알 수 있었지. 아버지의 책상 서랍 속 깊숙이 감춰진 한 여인의 사진을 보고, 나는 어떤 가설을 세웠어. 나는 기억력이 좋았거든.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불룩한 배도, 아기가 태어나는 모습도 자신이 보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지. 그저 나는 외국에 나갔다가 일 년 후에 돌아오신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아기를 봤을 뿐이었어. 나는 어머니가 방 안에서 혼자 서럽게 우시는 것도 볼 수 있었지.“ 미연 누나는 경쾌하게 나를 향해 돌아섰다. 공기가 파삭 하고 깨어졌다. “그러다 나는 옛날 이야기 하나를 알게 되었지. 어떤 부유한 도련님이 있었어. 그 도련님이 한 가난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거야. 사랑에 눈이 먼 도련님은 여인에게 맹세했지. 영원토록 당신을 지켜주는 기사가 되겠노라고. 여인에게는 친구 한 명이 있었어. 친구는 여인의 자매였고, 가족이었으며, 그리고 여인이 일하는 주인집의 딸이었어. 친구는 여인의 기사님을 우연히 보게 됐어.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친구는 기사님을 애타게 바라봤지만 기사님은 여인만을 바라보고 있었어. 친구는 여인이 기사님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몰랐지. 그래서 여인에게 울면서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했어. 여인은 어찌할 줄 몰랐고, 다만 친구를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지. 어느 날 기다림에 지친 친구는 자살을 시도했어.“ “...” “여인은 기사를 찾아가 이별을 고했다지. 자신은 충분히 강하다며, 자신에게 주는 그의 사랑을 친구에게 달라고 부탁했어. 기사는 여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 후로 여인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어. 기사는 여인을 찾아 헤메었지. 그러다가 지쳐버린 기사는 친구와 결혼했어. 친구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무척 행복해했어. 하지만 사실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가면은 벗겨지게 되어 있어. 결혼 뒤에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된 친구는 무척이나 불행해 했지. 그 후 기사님이 어느 외딴 섬에서 여인을 겨우 찾았을 때 여인은 병이 들어 있었어. 하지만 여인은 기사님을 피해 또다시 사라져 버리지. 그러다가 기사는 어느 날 외국으로 나가서 한 동안 돌아오지 않았어. 기사의 부름을 받고 외국으로 떠난 친구는 아이 하나를 안고 집에 돌아왔지. 무척이나 서러워하면서.“ -64- 미연 누나는 아름답게 웃었다. 그제서야 나는 미연 누나의 눈이 하나도 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갑다. 아니, 저것은 차가운 것이 아니다. 마치 단백질 덩어리를 보고 있는 듯한 그런 무관심한 눈동자. 낯설다. 너무 낯설어서 나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미연 누나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비가 팔랑거리듯이 웃자락이 흔들리면서 손 끝이 내 얼굴에 와 닿는다. 희미하게 풍기는 따스했던 향기가 사실은 독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손 끝이 천천히 내 볼을 얼리고, 팔을 얼리고, 발을 얼리고, 나중에는 심장까지 얼려버렸다. “누...누나.” 간신히 새어나온 내 목소리는 지독히도 쉬고, 갈라져 있었다. “아까, 왜 그랬냐고 물었었니? 사랑이라고? 그런 덧없는 감정을 위해서, 가문을 버리라는 거냐? 너는, 그럴 수 있다는 거니? 호시탐탐 우리를 끌어내릴 기회만 노리는 이들에게 얌전히 당해줬어야 했다는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얼마 전에도 그런 자들이 주제 넘게 도전해왔었지. 지금쯤은 그 일당들도 모두 정리가 되었겠지만. ...알겠니, 현아? 너는, 이대로 있으면 돼. 이제까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추악한 사실 같은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러면...“ “...그럼, 내 감정들은, 내 생각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울 듯이 질문하는 내 앞에서 미연 누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아, 너는 앞으로도, 이제까지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필요 없어...! 나는, 재범이를 사랑해. 그 녀석이 내 사촌이고, 또 같은 남자라서...“ “누가 그러니? 네가 재범이의 사촌이라고. 너와 재범이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 내 시선에 누나의 눈동자가 부딪쳤다. “선우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것은 나야.” 마치 재미있는 영화를 감상하듯, 입꼬리만 위로 싱긋 올라간다. “우리 윤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똑같지. 무언가에 빠지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단 하나만을 향해 걸어가게 돼. 아버지처럼, 선우도 그랬지. 내가 선우에게 요구했다. 가문과, 선우의 행복. 둘 중에서 하나만을 택하도록.“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누나는 눈을 빛냈다. 그 눈동자 속에 숨어 있는 일그러진 광기를 이제야 볼 수 있었다. “ 너도 선택해야만 할 거다. 현아.” “...누나.” “알고 있니?” 누나는 흥분으로 볼을 붉혔다. 그 모습이 예전의 미연 누나인 것 같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모든 것이 장난이라며 웃어 줄 것 같아서, 나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내가 너를 무척이나 죽이고 싶어했다는 것을.” “...!” 누나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다정한 향기가 내 몸을 휩싸고 돌았다. “ 사실 하나 알려줄게, 현아. 사랑 같은 것은 없어.“ 미연 누나는 얼어 있는 내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조심스런 손짓이, 건조한 누나의 눈빛과 맞물려 내 마음을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주마. 이 곳에서... 머리를 식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려주렴. ....내 동생으로서.“ 누나는 망설임없이 몸을 돌리고 나갔다. 나는 나가는 미연 누나의 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절그럭거리며 잠그는 열쇠소리가 방 안을 울리는데도, 나는 발끝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고정되지 못하고 정신없이 허공을 헤매이던 시선 끝에 점점이 빗방울이 그어지는 유리창이 들어왔다. 그 순간 무슨 신호라도 들은 듯, 나는 정신없이 유리창으로 달려갔다. 언젠가 똑같은 일을 반복했던 듯한 기시감 속에서 유리창을 한 없이 쓰다듬었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점점이 밝혀진 불빛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또한 초라했다. 차가운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었지만, 소름끼치는 광물의 감촉만 느껴질뿐, 그 어디에도 내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망연히 유리창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창의 먼지로 지저분하게 더럽혀진 손을 하염없이 내려보며... ...나는 겨우 깨달았다. 나는 방 안에 갇혀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밖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서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음식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것을 먹지 않았다. ...음식이 먹혀지지 않았다. 억지로 먹어서인지 먹은 후 곧 토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음식을 먹지 않았음에도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눈앞이 노래지면서 자꾸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그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힘겹게 눈을 떠보니 미연 누나가 내 앞에 앉아 있었고, 팔에는 링겔이 놓아져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미연 누나가 차분하게 나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연 누나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내 몸을, 미연 누나가 잡아 일으켜주었다. 등 뒤에 베개를 받쳐주려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미연 누나를 어색하게 품에 안았다. 내 앞에 멈춰서서, 나를 이끌어주던 미연 누나의 커다랗고 따스했던 품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내 품에 들어올 만큼, 그렇게 미연 누나는 작고, 그리고...여전히, 아니 기억했던 것보다 더 따스했다. 미연 누나는 당황한 듯, 순간 몸을 굳히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현아?” “...미안해, 미안...” 나는 끝없이 되뇌였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지만, 미연 누나에게 사죄 할 수 있을까? “...결국 재범이와 헤어지지 못하겠다는 거니?” 미연 누나가 파삭한 어조로 질문했다. “...아냐.” 나는 기어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애써 눈물을 참고 참아서, 그 눈물이 독이 되어 내 몸 전체에 녹이 슨 쇳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몸을 조금 떼고, 미연 누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인형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건조함과 차가움을 안고 있는 눈동자에 마음이 한없이 시렸다. “...미안해. 그 동안... 혼자서 힘들었지? 정말로 미안해.“ 순간 미연 누나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태연한 척 웃음짓는 미연 누나의 모습에 나는 또다시 한없이 슬퍼졌다. “정말로...미안해. 누나 혼자 이렇게 힘들게 해서... 나누어 갖지 않아서, 정말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나는 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혼란스럽게 해도 아무 소용없어.” 문을 열고 나가는 미연 누나는 저번과 같이, 왼손의 손가락 하나를 오른손으로 감싸 잡고 있었다. -65- 나는, 애시당초 잘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유리창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내 마음 안에도 유리창은 존재하고 있다. 그 유리창은 이기적이고 이상한 내 성격에 걸맞게 제멋대로 비뚤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양이 아무리 이상하고 괴상하다 하더라도, 유리창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 유리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유리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저, 약간의 수고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유리창에 묻어 있는 먼지를 닦아야만, 밖을 내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내가 관심있어 했던 것은, 유리창의 모양이었다. 나는 유리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유리창을 볼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유리창 너머에는, 다른 사람들이 간절한 얼굴을 하고 서 있다는 것을 모두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 유리창에 먼지가 부옇게 앉아, 더 이상 바깥의 모습을 비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내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도 외면했다. 유리창의 두꺼운 먼지가 내 전폭적인 협조 아래 창문 밖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온 몸이 먼지로 새까맣게 더럽혀 진다고 해도, 설사 그 먼지가 각인처럼 내 몸에 새겨져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놨어야만 했다. 나는 깨끗한 내 모습에만, 화려한 유리창 모양에만 관심을 둔 대가로, 유리창 너머에서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내 유리창을 두드리다 지쳐 눈물조차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내 유리창 안으로 들어와 쉬어가고 싶어했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간단한 그 한 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외면했다. 이것은, 그 죄의 대가다. 내 잘못의 당연한 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나는 또다시 사치스런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마냥 가슴을 움켜쥐고 뒹굴 수밖에 없었다. 엉키고 엉켜 있는 감정의 사슬이 너무나 복잡해 풀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나는 또다시 못된 결심 하나를 심장에 품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어지러운 머리를 치켜들고, 옷을 단정하게 입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자, 문이 달칵하고 열렸다. “...데리러 왔다. 현아.” 선재 형은 문 앞에 서서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그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따라 나왔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는...” 내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은 선재 형이 내 등을 떠밀었다. “미연이는 괜찮다. 내가 지금 집으로 데려가서 푹 쉬게 할 테니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하지만...” 머뭇거리는 내 마음을 아는지, 선재 형이 나를 붙잡고 내 눈과 시선을 맞췄다. “나는, 네 큰 형이다. 그렇지?”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은 점차 커져서, 선재 형은 그런 내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현이 너는 제멋대로 해도 돼. 귀여운 막내니까, 어지간해서는 혼내지 않으마. ...그럼, 집에서 기다리겠다.“ 주머니에 지갑을 찔러넣어주고, 선재 형은 돌아보지도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 또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지금, 나는, 나의 유리창을 닦기 위해, 내 몸에 먼지를 가득 묻히러 가는 중이다. 밖에 나오니, 깜깜한 어둠이 주위에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밤의 어둠을 밝혀줄 조명은 한 구석에 세워진 을씨년스러운 가로등 하나뿐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계속해서...생각을 했지요.”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낯익은 여인이 아름답게 웃음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웃음이 가로등 불빛에 비쳐 숨막힐 듯 몽롱한 느낌을 뿌려댄다. “그 분을 어떻게 하면 내 옆에 둘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이가 어떻게 하면 그 기억속에 내 모습만을 담아줄까? 그 어떤 몸부림도 통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한 가지 뿐이겠지요.“ 하얀 얼굴이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다. 여인의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칼 한 가닥이 흘러 내려 이마를 처연히 덮고 있다.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지독한 비현실감을 띄고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랑도, 감정도, 웃음도,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라면서 여인은 안개처럼 아스라하게 눈을 반짝였다. 하얗고 길다란 손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저 손이 아름답다고, 여인이 퇴폐적이면서 슬픈 처연한 미를 품고 있다고, 그렇게 여겼었다. 얼떨결에 몸을 움직이자 뜨끈한 피가 얼굴에 튀어 오른다. 지금 이 순간, 여인의 감정이 내게도 전이된 모양인지, 지독하리만큼 슬픈 증오와 아픔이 내 속을 차고 올라온다. “...그만해...!”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여인의 팔을 붙잡고 그 손에 잡힌 칼을 빼앗는 선우 형의 모습마저 환각으로 여길 만큼, 그 모든 것이 꿈의 색채를 띄고 있었다. “...제발 말해 주세요..” 밀치는 힘에 바닥으로 쓰러진 여인이 기묘하리만큼 오싹한 미소를 품고 질문한다. “...후회하시나요?” ...여인의 질문에 선우 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여인의 고개가 숙여진다고 생각한 순간, 선우 형이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유키...!”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검붉은 액체가 바닥을 타고 흐른다. 축 처진 여인의 하얀 손가락에 꽉 쥐어진 작은 칼날이 어둠 속에서도 시린 빛을 내뿜었다. 미치도록, 이 밤의 어둠이 매혹적인 빛을 띄고 침묵을 집어삼켰다. 형의 손이 확연하게 떨리며, 주머니에서 나온 핸드폰을 미친 듯이 두드린다. 오늘, 밤의 광기를 틈타 모두 미쳐버린 것처럼, 세상이 빠르게 움직인다.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여인을 품에 안고 뛰어가는 선우 형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 어느 순간 달리고 있었다. 이 다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가쁜 숨을 집어 삼키며 달려갔다. -66- “...오랜만이구나.”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문고리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내 부름에 응답하듯이 스위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꼬리에 잡힌 잔주름이 아버지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듯이 일그러져 있다. “...물어보거라, 듣고 싶은 것들이 있지 않니.”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말하시는 아버지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은 없어요.” 단호히 말하자, 아버지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무슨 의미냐?” “미연 누나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것은 누구였죠?” 떨림 하나 없이 매끄럽고 차갑게 나온 내 말에 아버지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단 한 번도 강요한 적은 없었다. 단지 그 아이는 현실을 인식하고 선택한 것 뿐이었어.“ “...아버지처럼요?” 조용히 묻자, 아버지의 눈이 한순간 부릅떠졌다. “...알고 있었던 거냐?”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격렬한 감정의 흐름과는 달리, 아버지의 어조는 평이했다. “...미연 누나는 아버지가 아니예요. 선우 형도, 선재 형도, 그리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저도...다른 사람이 아니예요. 제 이름은 윤 현, 아버지가 저를 통해 바라보시는 사람과 저는...전혀 다른 존재예요.” “...알고 있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시선을 나를 피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럼, 어째서 저희의 인생에 아버지의 과거를 비추어 보시는 겁니까? 쓸데없는 감정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 거죠? 희생해도 되는 거라고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 겁니까?“ 격한 숨을 몰이쉬다가, 나는 결국 내뱉듯이 말했다. “...아버지도, 이렇게 후회하시면서....왜...! 지켜주지 않으신 거죠? 선택을 하도록 관조하신 겁니까?“ 서글픈 감정이 허공 속에 녹아 들어 어둠에 삼켜진다. “...어째서...!” 소리 없이 오열하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딱딱하게 말했다. “...그녀를 사랑했다.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을 만큼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할 만큼... 나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존재가 내게 짐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박 의원, 그 친구는 자신의 계략에 빠져 그녀와 내가 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뻔히 알면서도 속는 척 응해줬던 것은 나였고, 이별을 예감하고 떠나버린 것은 그녀였다. 그녀가 떠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나는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그녀를 만나고 나서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고 나서, 나는 이제까지 내 자신을 능숙하게 속여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 내게 짊어진 짐이 너무나 무거워서, 그녀에 대한 감정을 몸에 지니고서는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버리고, 그녀를 향한 감정을 가치없다 말하며 가슴에 묻었다. ...그 모든 것이 나 자신을 향한 속임수였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겨우 깨달았을 때, 그녀가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이미 재가 되어 없어져 있었다. 가슴 속에 묻어둔 내 감정은 아직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데, 그녀는 나에게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렇게 말했다.“ 텅 빈 듯, 허무한 어조로 아버지는 계속해서 중얼거리셨다. “그렇게 뒤늦은 열병에 걸려버렸지. 열병에 걸려 미쳐버린 나를 피해 그녀는 끊임없이 달아났고, 그런 내 옆에서 아내는 절망에 빠져 눈물만 흘렸다. ...그녀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한 일본인 남자와 결혼해 있었다. 남자는 죽어 있었고, 그녀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지. 그녀를 향해 다가갔지만 그녀는 끝까지 내 손길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를 겁간했지. 내 광기에 젖어들어 미쳐버린 그녀가 결국 목을 매었을 때 태연히 뱃속의 아이를 꺼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겨우 숨을 쉬게 된 아이를 아내의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오면서도...나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견디지 못한 아내가 내 곁을 떠날 때에도 나는...“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래서, 태한 파에서 내 행동에 분노를 표시할 때에도, 나는 오직 너만을 바라보았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조건에 동의했지. ...태한 파에서, 내 부정의 증거인 너의 존재를 인정했던 이유는...너에게 경영권이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 저에게는 필요 없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그녀를 닮은 아이였고, 그녀 역시 귀찮은 것도, 화려한 것도 싫어하던 여자였으니까. 내 품에 가두고, 좋은 것, 예쁜 것,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 주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저는, 아버지가 사랑했었던 여인이 아니예요.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다른 자식들 중의 한 명이예요.“ 아버지는 메마른 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통곡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아, 그렇지. 너는 내 자식이었지. 그리고...나에게는 자식들이 있었는데... ...나는...“ 나는 발걸음을 죽여 걸음을 옮겼다. 문을 돌리고 나오려는 순간, 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했던 걸까? ...어째서,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몸을 멈추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모두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저도...잠시 후에 들어갈게요. ...아버지에게 저희는...자식인가요?“ 내 질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에야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단 한번도, 너희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나는 그녀를 상대로 그랬듯이, 너희를 상대로 또다시 나 자신을 속여왔을 뿐이었다. ...이런 나라도, 용서해줄 수 있다는 거냐?“ “...아버지는, 못난 자식이라고 저희를 내팽겨치실 수 있나요? 집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다른 이들을 향해 웃어 주세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아버지가 느끼시는 만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문을 닫고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밖으로 나와 재범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이대로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지금 나에게는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의 짧은 만남 후에 우리는 서로를 외면해야만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재범과 나의 시선은 엇갈려 있었고, 서로의 모습이 아닌, 제멋대로 만들어낸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상대방의 모습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슬프긴 해도, 살아갈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은 재범이었고, 상처를 주었던 것은 나였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지만, 내밀은 손을 잡지는 않았다. 서로의 온기를 원하면서도 무서워서, 그저 그렇게 떨고만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이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죽고 싶을 만큼 슬펐지만, 그래도 살아갔다. 지금 나와 재범이는 세 번째 이별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번에 이별을 고할 사람은 나였고, 이 이별로 인해 서로가 똑같이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맞닿았던 온기의 감촉은 아직도 신경 구석구석에 뿌리 박혀 있다. 어느새 우리는 마주보기가 아니라 서로 나란히 서 있었다. 둘중 누구 한 명도 먼저 가는 법 없이, 계속해서 같이 있게 될 줄 알았다. 세 번째 이별을 맞이하는 지금, 나는 예감할 수 있다. 이번의 이별로 인해, 내 자신이 죽게 될 것임을. ...아픔이 몸 안에 쌓이고 고여 돌처럼 내 심장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67- 부제 : 기다림의 이유. 깜깜한 어둠만이 깔려 있는 복도를 선재는 차분히 걷고 있었다. 어느 곳에 도달하자, 마치 앞을 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확히 발이 멈춘다. 선재는 앞에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문 안쪽은 고요했고, 어두웠다. “내가 잘 못 한 걸까?” 아무도 없는 듯 적막한 공간 안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말 소리에 선재는 발을 멈췄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켜자 팟 하고 형광등이 들어온다. 미연은 창가에 놓여있는 책상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괜찮아.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은 없으니까.” 선재는 조용히 말했다. 이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미연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하, 웃기는 군! 뭐야, 나한테 지금 설교라도 하러 온 거야? ” 싸늘하게 말하는 미연에게 선재는 그저 웃었다. “좀 춥다. 나가자. 집에 가서 해원 아저씨한테 따뜻한 우유에 꿀을 넣어서 타 달라고 하는 거야.” 순간 미연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유리 화병을 집어서 선재에게 던졌다. 선재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나며 유리병이 벽에 부딪쳐서 산산조각 깨졌다. 깨지면서 파편 조각이 공중을 날아 선재의 뺨을 길게 찢었다. 피가 선재의 볼을 타고 흐르다가 입술까지 스며 들었다. 선재는 슬며시 혀로 피를 햝았다. 피의 맛은, 지독하게도 짰다. “나가~! 네가 뭔데, 지금 나한테 잘난 척 하는 거야?”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미연에게 선재는 슬며시 웃었다. “나는 미연이 네가 좋아. 네가 나를 때려서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업무를 팽개치고 놀러 나가서 대신 일하느라 밤샘 할 때도, 엉뚱한 사고를 쳐 놓고 뒷 수습을 모두 나에게 떠 넘겼을 때도 계속 네가 좋았어. 한 번도 너를 미워하거나 싫어한 적 없어. 그래, 네가... ...날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선재의 말에 미연이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이의 마음을 살피는 훈련을 받았지. 그래서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내가 계속 바라보고 있는 상대라면 더욱 더 알 수 밖에 없지. 그래, 네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까지 모두... ...내가 언제나 방관하는 쪽에, 지켜보는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너를 단 한 번도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된 것이 모두 내 잘못이라는 것도... 알아.” “그걸 알면서도 지금 나를 찾아온 건가?” “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네가 애써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던 것들까지.” “...” “나를 싫어하면서 내가 아플 때는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돌봐줬지. 그 후에 내가 정신을 차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듯 냉정하게 곁에서 사라졌지만. 선우가 방황할 때도, 그 녀석을 붙잡아서 때려 준 건 너였어. 현이를 미워한다고 하면서, 정작 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일먼저 달려가는 것도 너였고.“ “...웃기는군.” 미연의 비웃음을 들으며, 선재는 피식 웃었다. “기억 나?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혼날 일이 생기면... 나는 혼날 꺼리를 몰래 숨겼지. 그리고 선우는 도리어 더 큰 사고를 쳐서 아예 이목을 분산시켜버렸고. ....미연이 너는 사고를 저질러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어. 그런 네가 흔적을 남기는 경우는 단 하나였지. 우리들 일로 인해 화가 났을 때, 우리들에게 해를 입힌 자를 상대로 화를 낼 때. 그 때마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대형사고를 터뜨리곤 했지. ...너는 단 한번도 너의 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 언제나 네 이성을 잃게 하는 것은 우리들이었지.“ “...착각도 그 정도면 기가 막히군.” 차가운 미연의 말에도 선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미연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자. 괜찮아. 다시 되돌릴 수 있어.” “회사를 위한 눈물겨운 충정, 잘 들었어. 지금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성진 그룹을 떠나지 않아. 그러니까 어서 나가주지 않겠어? 아니면, 설마 이렇게 나를 설득하고 있는 이유를, 현이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싸늘하게 빈정대며 말하는 미연을 향해 선재는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너를 위해서다. ”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고 싶은 거야?”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또다시 후회하지 않도록. 나는 계속 그것만을 생각했어. 어렸을 때는 너의 상처를 알면서도 내 자신의 힘듬을 핑계로 한 번도 보듬어 주지 못했지.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어떻게 하면 위로해 줄 수 있는 건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다가가지 못했어.“ 선재는 진심을 다해 이야기했다.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다.” “웃기는 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미연의 떨리는 음성을 들으며 선재는 가만히 미연을 응시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도록, 염원을 담아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나는 부모님의 옛날 이야기 같은 건 알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 입힌 네 모습도 난 보지 못했다. 다시 같은 짓을 현이에게 한 네 모습도 난 몰라. 후에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것을 말한다 해도, 나는 또다시 잊어버릴 거다.” “...무슨 말이야?” 미연은 혼란스러운 눈길로 선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너는 돌아오기만 하면 돼. ” “...!” “지치고, 힘들 때, 심심할 때, 그 언제 어느 때라도 그냥 나에게 걸어오면 돼. 네 마음이 끌리는 대로. 나는 계속 서 있을 거다.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너희들을 바라보면서.“ 선재는 간절히 미연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확신을 담았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지키는 방식이다. ” 어두운 공간 안에서 선재는 미연이 스스로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차가운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리고, 지금은 슬쩍 말해줘야지. 사실, 나는... ...너희들을, 내 동생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노라고. 물론 미연은 이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면서 도리어 선재를 모질게 때려줄지도 모르지만... ...선재는 또박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68- 재범이 있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새벽이 되어 해가 떠 있었다. 재범이 있는 병실로 다가가 마음을 다잡으며 문을 열었다. 재범은, 새근대며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재범은 감기에 걸려 있었고, 나는 휘장이 쳐진 재범을 바라보며, 지켜주고 싶다는 엉뚱한 사명감에 불타올랐었다. ...재범은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의자를 가져와서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하염없이 재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이 녀석이 깨어나지 않는 시간만큼 나의 이별은 미뤄진다. 집행 유예를 바라는 죄수처럼, 나는 그렇게 간절히 영원을 빌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부정하듯이, 재범이 몸을 뒤척였다. 곧 재범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떠졌던 재범의 눈은, 곧이어 확연하게 커져서,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현아? 언제 왔어?” 병문안을 오지 않았었던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재범을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하면, 재범이 충격을 덜 받을까. 어떻게 말하면, 내 말이 덜 잔인하게 들릴까. ...아니, 잔인하지 않은 이별은 없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한다 해도, 이별의 본질은 언제나 잔혹하고, 또한 교만하다. “우리 사귀는 것,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 순간 기쁨에 들떴던 재범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이야?” 거칠게 내뱉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하지만 그 아래 깔려있는 짙은 두려움도,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지나치게 녀석의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야. 앞으로 5년간 만나지 말자.” 최대한 냉정하게 말하자. 한 순간의 떨림도 없이.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답이겠지. “씨발, 누가 그래? 누가 또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무도,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건 내가 정한 거야.” 이미 나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재범도, 그것을 알아챘다. “ ...대체 왜? 현아, 가지마. 제발, 제발 내 옆에 있어 줘.” 내미는 손을 나는 외면했다. 지금 저 손을 잡으면 평생 떠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못 보내! 내가, 너를 다시 보낼 것 같아? ” 광포하게 소리치는 녀석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은 머리와 뜨겁게 불타고 있는 심장 사이에서 당장에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아픈 눈을 한다면 재범은 금방 알 것이다. 녀석은 그랬다. 언제나, 언제나 나에게 주기만 했다. 바보같은 나는 그저 외면했다. 자신의 세계에 앉아서 녀석의 상처도 한 번 보듬어 주지 못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 내밀었던 손을 잡아주는 건데. 지나가 버린 세월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지금 내 심장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5년 후에, 그때도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의 인연이 다시 맞닿아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내가 너에게 다가갈거야. 평생 잡고서 놓지 않을 거다. ” “만약 네가 떠난다면, 나는 그 순간 너를 잊을 거다. 왜냐하면-.” 재범의 눈에 광기가 번뜩이는 순간 세상이 빙글하고 돌았다. “네가 떠나는 순간 내가 너를 죽일 테니까.” 머리가 바닥에 쾅하고 부딪쳤다. 순간적으로 흐려진 시야에 재범의 얼굴이 들어왔다. 녀석은, 울고 있었다. 내 목을 힘껏 조르면서 재범도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아파하지 마. 제발, 네가 이렇게 아파한다면 나도... 나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몸은 본능적으로 녀석을 끌어안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녀석에게 뻗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을 잃으려는 찰나에, 재범의 몸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콜록대며 일어나는 내 몸을 누군가가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이 녀석을 죽일 셈이냐.” 무식한 놈, 하고 혀를 차는 녀석은 내가 무척이나 잘 아는 뺀질이 녀석이다. “...가...!” 재범은 낮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단호하게 담긴 거부의 표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다. 너는 몸조리 잘 하고 잘 지내라.” 민준은 능글맞게 말하며 나를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 “...잠깐...” 순간 휘청이는 몸을 다잡으며 재범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이라도 재범의 상처를 나눠갖고 싶다고 바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서 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거다.” ...그 말이 옳다. 민준과 같이 병원 밖으로 나오자, 민준이 팔을 쭉 펴서 몸을 풀더니 나를 바라본다. “...일단, 이야기는 다 들었다. 대체, 5년이라는 허황된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거냐?“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말하는 민준을 나 역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힘을 갖는데 걸리는 시간.” “...뭐?” “자립해서, 내 감정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도록... ...내가 힘을 키우는데 걸리는 시간의 최소치다.“ “...그러니까, 너 지금, 안 재범 저 녀석을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거냐?” 멍한 눈으로 되묻는 민준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위에 서든, 아래에 서든 그런 것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 하지만, 재범에게 그 것들이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위에 서야만 하는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재범의 옆에 서겠어. 그리고...그러기 위해 소중한 것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줄 거다.“ “...어떻게?” “...잘 있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민준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나를 붙잡는다. “야, 말해 봐. 어떻게?“ “...안 말해 줘.” 언젠가 민준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답해 주자, 민준이 얼굴을 씰룩거리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좋아, 대신 내 비밀 하나를 말해 주지. 언젠가 해 줬던 이야기 기억하냐? 내가 아버지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었던 그 말...“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나직이 말했다. “ ...사랑하는 이가 모습을 감춘 후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가 없어졌대. 그래서,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고...그렇게 말씀하시더군. 그 사람에게 한 짓이 떠오를 때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더욱 더 이 세상을 재미있다고, 즐겁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시더군.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준 이기적인 자신이, 그 사람 앞에 나중에라도 당당히 설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나에게는 처음부터 후회할 수 있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할 말을 잃은 채 민준을 바라보자, 민준이 평소처럼 내 어깨에 친한 척 손을 올린다. “뭐, 나처럼 멋진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경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보다, 너 어떻게 할 건지 어서 안 말할래?“ “...내가 언제 말해준다고 했냐?” “...하지만...!” 나는 잽싸게 손을 들어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세웠다. “너가 말해주고 싶어서 말하는 것까지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너...!” 얼굴이 시뻘개진 민준 녀석을 피해 잽싸게 택시에 올라탔다. 빠르게 주소를 부르고, 나는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나는 지금 집으로 돌아간다. -69- 외국으로 나가기로 했다. 선우 형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병원에 있다는 짤막한 연락만이 왔다.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모른다. 미연 누나는, 돌아온 나에게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누나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어떤 것인지, 누나가 떠나 보내야만 했던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나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어 보였지만, 이미 모두들 알고 있다. 이제는 변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깨달음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만능 슈퍼맨이 아니고, 번쩍이는 지능의 천재도 아니다. 내 팔은 모두를 감싸안을 만큼 길지 않고, 내 마음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깊지 않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복을 찾아 내 마음을 끌어안는 것 뿐이다. 가끔씩 나를 돌아볼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가족들의 옆에서 어깨를 빌려주는 것... 나는 극히 제한된 일만을 할 수 있고, 내 시야는 아직도 좁다. 그렇기에, 나는 또다시 뻔뻔스럽게 내 길을 찾아 가겠노라고, 홀로 서고 싶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가족들은 다정히 끌어안으며, 건강 조심하고 잘 지내라는 말들을 속삭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출국일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는 날씨가 화창한 날이었다. 간단히 꾸린 짐을 들고 공항에 도착했다. 바래다 준 기사 아저씨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출국 수속을 밟았다. 이제, 이 곳과도 안녕이다. 다시 돌아올 그 날까지 나는 상상 속에서만 이 나라를 볼 수 있겠지. 묻어두고 온 아픈 감정과 함께. ...다시 돌아온다면, 그러면 너는 나에게 웃어줄까? 나를 바라봐주기나 할까. 어쩌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무겁고 아프다. ...그리고 너무나 그 녀석을 보고 싶다. ...그래, 이렇게 환상을 볼 만큼. 내 앞에 서 있는 재범이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재범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나를 바라본다. 상상속에서조차 화를 내고 있는 재범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옆을 돌아보니 민준이 나를 향해 씨익 웃는다. “잘 했지? 내가 데리고 왔다.” 말 안 해 준 복수다, 라면서 웃는 민준 녀석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내 앞에 버티고 선 재범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뒤돌아서 뛰어가고 있었다. ...괜히 뛰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정말 의문스럽다. 내가 왜 뛰었지? 무언가 굉장히 잘못한 사람마냥 뛰는 내 등뒤에서 연신 쿵쿵 소리가 난다. ...이제는 창피해서라도 못 멈추겠다. 내 등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재범과, 땀을 흘리며 뛰어가는 나, 그리고 우리를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저 멀리서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오는 공항의 경비 아저씨. ...재범이가 내 이름이라도 안 불렀다면 못 이긴척 멈춰섰을 텐데, 저 빌어먹을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지 내 이름을 공항 전체에 울려퍼지도록 불러대고 있다. ...절대로 멈출 수 없다~! 라는 불굴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데, 옆에서 발이 쑥 나온다. 발을 보고서도 얼결에 걸려 넘어져 버린 내 등 뒤에서 재범이가 나를 꽉 잡고 일으켜 세운다. 이 상황이 창피스러워 고개를 숙이는 찰나 우리와 일행이 아닌 척 핸드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리는 박 민준이 보였다. ...저 뺀질이 녀석, 저 녀석이 발을 걸지만 않았어도 잡히지 않았을 텐데...! 민준에 대한 분노를 곱씹으며, 재범과 나는 경비원 아저씨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녹초가 됐다. 출국 시간...시계를 힐끗 보니, 이제 들어가야 될 시간이다. 그렇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출국이고 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싶다. 아저씨들의 혼이 담긴 설교를 듣고 나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재범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재범이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그런 식으로 도망칠 셈이냐?” ...너는 모른다. 지금 내 심정이 어떠한지. 파삭거리며 부서지는 심장이 말한다. 후회할 거야. 떨리는 손끝이 말한다. 그를 잡아. 휘청이는 발끝이 말한다. 어서 그에게 달려가. 그리고 차가운 내 머리가 말한다. 이대로 외면해. 그를 바라보지 마. 이것은 내가 아닌 재범을 위한 길,이라면서 교만하게 웃는다. 돌아서도 다시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야. 나는 그런 말들을 침묵 속에 모두 담아버렸다. 뚜벅대며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뒤에서 재범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째서, 너는 나를 믿지 않지?” “...! 너도, 나를 믿지 않았잖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차분히 말했다. 늦었다는 것, 어서 가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재범은 간단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재범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서로를 믿을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 나는 아직 어리고, 알지 못하는 것도 많아. 그래서, 네가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걸로 내 감정의 깊이까지 판단하지는 마. 지식이나, 힘 같은 것은 계속해서 쌓아갈 수 있어. 하지만 잃어버린 감정은, 한 번 깊이 묻어버린 감정은 어떤 방법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거냐?“ “...” “연인이라고 했잖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나란히 서서 상대방을 포용하는 감정이잖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 앞의 현실을 바꾸려면 힘이 필요해.” 내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들려주듯이 거세게 말했다. “그렇다면 같이 힘을 키워 나가자. 같이 성장해 나가자. 혼자가 아닌, 같이... 서로를 지탱해 주며 그렇게 커 나가자.“ 재범은 나를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애원하듯이 바라보는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17살은 어른이 아니다. 나는 아직 어리고, 그만큼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나에게는 누군가를 지켜줄 만한 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을 토닥여 줄만큼 마음이 강하지도 못하다. 그것이 나의 17살이었다. “...같이...” 그 말을 입 속에서 굴리듯이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재범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강요하듯이 바라보지도 않는다. 내 결정을 기다리는 순교자처럼,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작게 미소지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연인이라는 단어의 핵심 사항이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자칫 잘못하면 놓칠 뻔했다. “...같이 가자.” 앞으로 내민 내 손위로 따뜻한 손이 겹친다. ...되찾은 온기가, 다시금 심장을 따뜻하게 데웠다. 후에, 나는 민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녀석, 나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했으면서 어째서 마지막 순간 내 앞에 재범을 데려왔었던 거냐?” 내 질문에 민준은 고뇌하는 척 사색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매끄럽게 찰랑거리는 녀석의 머리카락이 느끼하게 느껴졌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완성되지 않은 사랑이지. 그런데 내가 감히 나를 물 먹인 녀석들이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경험하도록 놔 둘 것 같아?” “...나에 대한 판단은 내린 거냐?” “그야, 당연히 보류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옆에서 천천히 결정내려주마.“ 민준은 나를 향해 평소처럼 씩 웃었다. 나는 그런 민준을 보고, 역시 알 수 없는 외계인 녀석, 이라는 결론을 남 몰래 내렸다. 내 앞의 현실은 여전하다. 아직도, 나와 재범이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일이 많았다. 외갓집에서는 난리가 나서 재범을 불러들였고, 미연 누나는 내 결정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선우 형은 담배를 뻑뻑 피며, ‘우리 귀여운 재범이’가 외갓집에서 돌아오는 즉시 ‘다정한 개인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는...나에게 단 하나만 물으셨다.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냐고.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음지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격려도, 한탄도 하지 않고, 예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가버리셨다. 민현은 침울한 얼굴로 한 동안 돌아다니더니, 민준과 어디론가 사라져 며칠 후에야 나타났다. 다시 나타난 민현은 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동물을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냐고 물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주자, 좋아라 사라지는 민현의 뒷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민준이 나에게 민현이 수의학과에 가겠다고 말했다고 깔깔 웃어대며 말해주었다. ...뭐, 민현 자신이 좋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우연히 만난 진우는 나를 보자마자 후다닥 도망을 쳐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승희에게서 국제 우편이 도착했다. 열어본 소포 봉투 속에는 승호와 찍은 사진이 가득 들어 있었고, 승호는 사진마다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비는 결국 천호 선배에게 끌려 다니는 것 같았다. 하긴, 존경하는 천호 선배님이 대단하시긴 하지, 라고 말했다가 민준에게 실컷 비웃음만 들었다. 양호 선생님은...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얼마 전 그녀의 진정한 실체를 보았노라는 말만 해 두겠다. 아무래도 양호 선생님은 내가 미연 누나를 상처입혔다고 생각하시는 듯해, 나는 앞날이 두려워졌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것도 많다. 나는 아직도 어리고, 앞으로도 나에게는 스스로의 미숙함을 통탄할 만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나는 혼자가 아닌, 모두와 같이 겪고 헤쳐 나가며, 살아가면서 필요한, 중요한 무언가를 하나하나 얻을 것이다. 그래, 앞으로도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무한한 성장의 기회 속에서 많은 것을 알고, 또한 잃어버린 것들을 후회하며 살아가겠지. 그렇지만, 그런 인생 속에서도 꿋꿋이 걸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창 너머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격려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주 잡은 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고, 나는 엉성하게 닦인 내 창 너머로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며 필요할 때마다 말할 것이다. 혼자가 아니야. 이것은 성장의 한 과정일 뿐이야. 이렇게 우리는 멋진 스스로를 만들고 있는 거야, 라고. ...나는 그렇게 오늘도 무언가를 배운다. -내 나이 17, 내 자신을 만들어 가다.-